44. 가슴은 뜨겁게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키 작은 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2학년. 혹은 3학년일까?
옷을 입은 테며, 지은 표정, 짝다리를 짚은 자세까지. ‘나 불량 학생이오’라고 광고하는 듯한 모습에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푸흡.”
“왜 웃는 거지?”
“……갑자기 재밌는 기억이 떠올라서요.”
사내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본론을 꺼냈다.
“승부 도박에 참여할 생각 없어?”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역시 이번에도 있는 건가.’
승부 도박.
일종의 스포츠 토토 같은 것이었다.
‘몇 주 전부터 소문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호객하러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이네스의 어서 거절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이안의 머릿속을 짓눌렀다.
하지만 이안은 기어코 묻고 말았다.
“배당이나 규모는 어떻게 되지?”
“우선 걸 수 있는 최소 금액은 금화 한 개부터. 4학년인 크로스가문의 정령사와 빌헬름 가문 마법사의 대련은…….”
이안은 사내의 설명을 유심히 들었다.
확실히. 있는 집 자식들이라 그런지 도박판의 규모도 생각보다도 더 큰 편이었다.
설명이 길어지자 이안이 말을 끊고 물었다.
“나는 다른 학년보다 1학년이 대련이 궁금한데.”
“그쪽은 일방적이야. 8대2. 피에람 가문의 마법사가 이길 거라 생각하는 쪽이 8이다.”
“역시인가.”
아직 식견이 부족한 1학년들과 달리. 선배들은 대부분 피에람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루크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명백히 그 숫자가 적었다.
이안이 머뭇거리자, 사내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봐.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곧 대련이 시작한다고. 안 할 거면 꺼져.”
이안은 빠르게 고민했다.
‘확실히. 게임 속 토너먼트에서도 이런 도박 이벤트는 있었지. 이놈이 먹고 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 신뢰도는 보장된 셈이야.’
[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건 무조건 플로라가 이길 수밖에 없는 대련이야. 8대2면, 지금 가진 돈의 25프로를 벌 수 있어.’
[이안. 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안은 주머니를 슬쩍 열어 보았다.
근래 의뢰를 수행하고 받은 동전들이 들어있었다.
솔직히. 빈말로라도 많은 양은 아니었다.
지금은 학사에서 밥을 공짜로 주니 버틸만하지만.
학사를 벗어나게 되면 또다시 궁핍하고 배고픈 생활을 해나가야 할 수도 있다.
‘지긋지긋한 가난.’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이안은 돈이 제일 무서웠고.
제일 간절한 것도 돈이었다.
‘이런 기회를 걷어차는 건 바보 짓이지.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거저 주는 기회를 걷어차는 건 너무나 바보 같은 것.
이안은 돈 자루를 내밀며 생각했다.
‘어차피 황태자가 보는 앞에서 루크가 플로라에게 벌일 수 있는 수작은 제한되어 있어. 눈에 띄는 짓은 증거가 남으니까. 그 정도로는 절대 못 이기지. 이건 도박이 아닌 투자야.’
결정했다.
“플로라가 이긴다에 전부.”
“좋아. 돈, 확실히 받았…….”
“잠깐.”
작은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플로라한테 수작은 못 부려도…… 흠. 설마 그렇게까지 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안이 내밀던 손을 멈추며 물었다.
“만약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서, 무승부가 난다거나. 경기가 취소되거나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네가 다 꿀꺽하는 거냐?”
이안이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자, 사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경우에는 당연히 다 돌려줄 거야. 그 정도로 양심 없지는 않아.”
“그렇다면 믿을 수 있지.”
이안은 만족스럽게 돈을 맡겼다.
계산은 완벽하다.
이제 돈이 굴러들어오는 것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제서야 슬슬 눈치가 보인 이안이 물었다.
‘이네스 님?’
[…….]
대답은 없었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이네스가 조금 삐진 것 같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다.
이안은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어퍼 클래스원들에게는 앞쪽에 좋은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안은 빈자리를 찾아 헤맸고, 이내 수많은 관중들 사이에서도 기묘하리 만치 텅 공간을 발견했다.
‘저긴 왜 저렇게 비어 있…… 아.’
빈공간의 중심에는 소심한 인상의 검은 머리. 로든이 혼자서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네까짓 게 왜 여기에 있냐’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로든은 잔뜩 움츠러든 채로 그 시선을 끙끙거리며 받아내고 있었다.
‘마침 잘됐네.’
앉을 자리가 필요하던 차다. 아는 사람이랑 같이 보면, 더 좋지 않겠는가.
“어?”
이안이 옆에 앉자, 잠깐 의아해하던 로든이 이안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에 띄게 안도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아, 안녕. 자, 너도 인사해야지.”
로든은 가디건의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던 그림자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그림자 정령은 한낮의 햇빛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로든이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주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이안에게 앙증맞게 인사했다.
‘귀엽네요. 그쵸?’
[…….]
‘거 참.’
이안이 로든의 옆에 앉자. 끼리끼리 논다느니, 불길한 녀석들이 두 배가 됐다니,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로든은 혼자가 되지 않은 게 마냥 좋은지.
홀가분해진 얼굴로 그림자 정령을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원래 매도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함께 맞으면 덜 아픈 법이니까.
그런 로든에게 이안이 물었다.
“의외네요?”
“뭐, 뭐가?”
“뭔가 이런 건 관심 없을 줄 알았거든요.”
로든의 성격이 어떤지. 이제는 대충 알 수 있었다.
겁이 많은 로든은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았고.
굳이 이렇게 불편한 시선을 감내하며, 보러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로든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저 무대는 이곳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거잖아? 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마 평생 동안 저런 곳과는 관련이 없을 거고.”
“우리? 아, 음. 뭐. 그렇죠.”
이번 시범 대련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참가하는 토너먼트와는 의미가 다르다.
각 학년에서 가장 뛰어난 둘에 들어야만 설 수 있는 자리.
평범한 학생이라면 그저 꿈꾸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자리인 것이다.
“난 그런 반짝이는 사람들을 보는 게 좋더라고. 부럽기도 하고. 헤, 헤헤.”
언제나와 같이 로든이 어색하게 미소 짓자, 그림자 정령도 웃는 시늉을 했다.
“뭐. 선배도…….”
열심히 하면 저 무대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덕담을 건네려던 이안은 말을 삼켰다.
전생의 한 기억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혹자는 말한다. 노력만 있다면 재능 없는 이들도 천재를 이길 수 있다고.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건, 이안은 너무나 뼈저리게 경험했다.
세상에는 주어진 재능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등수가 정해진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비참한 현실에 짓눌려, 이안이 폐인처럼 지낸 세월이 대체 몇이던가.
그렇기에 듣기에만 달콤한 거짓말을 차마 뱉어낼 수가 없었다.
“어…… 음?”
이안이 갑자기 말을 끊자, 혹시 자기가 잘못했나 싶어 로든이 끙끙대고.
분위기가 어색해지던 그때였다.
“흠흠. 혹시 옆에 자리가 남나요?”
“……?”
이안과 로든은 동시에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틀었고.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선배님!”
쫙 째진 눈동자와 의미심장한 미소가 특징적인 소년.
한 학년 위의 헤더 페어윈드가 서 있었다.
‘엄청 오랜만이네.’
학사에 들어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건만. 헤더 페어윈드와 마주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같은 학교에 있는데,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드네요.”
“하하. 아마 저랑 후배님의 동선이 완전히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저는 주로 내벽 밖에서 수업을 들으니까요.”
내벽 안에 대부분의 건물이 뭉쳐 있는 어퍼클래스와 달리. 사이드 클래스는 내벽 밖에 건물들이 자리해 있었다.
굳이 찾아가지 않으면, 마주치지 않을 수밖에.
이안이 물었다.
“아, 그럼 선배는 사이드 클래스였군요. 뭔가, 저번에 마법을 다루시는 걸 보고 당연히 어퍼 클래스인 줄 알았어요.”
“아뇨. 저도 일단은 어퍼 클래스가 맞습니다.”
“……네?”
이안이 당황하자, 옆에 있던 로든이 대신 설명해주었다.
“헤더…… 씨는 어퍼 클래스지만 특혜 같은 건 받기 싫다고 우리랑 같이 수업을 듣고 있어.”
“솔직히. 모처럼 넓고 아름다운 섬에서 학생 시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갑갑한 내벽 안에 갇혀 있는 건 싫잖아요?”
이안은 대답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순 미친놈이구만.’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헤더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괴짜라고 해야 할까.
헤더의 관심이 로든에게 향했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로든 씨랑 후배님이 친분이 있었다니.”
같은 학년끼리도 경어에 이름 뒤에 꼬박꼬박 씨 자를 붙이는 게 거슬렸지만, 이안은 그러려니 하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까요. 같이 욕먹는 처지끼리 의기투합해야죠.”
“그런가요?”
그 뒤로도 헤더는 온갖 질문을 쏟아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보는 만큼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신변잡기적 말이 이어졌고. 둘의 대화에 못 껴 로든이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어느새 기다리던 시간이 되었다.
“아. 시작하네요.”
첫 번째 순서는 4학년들이었다.
아름다운 은발이 특징적인 마법사와 다부진 몸을 가진 정령사.
둘은 황태자에게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고. 황태자도 치하의 말과 함께 둘의 건투를 빌어주었다.
몸에 일정 이상의 충격이 오면 대신 충격을 받아주는 아티팩트를 몸에 지니는 것으로 마무리.
둘이 자세를 잡았다.
“이야. 저 둘의 대결을 보다니. 오늘은 좀 재밌겠는데요?”
“아는 사람들인가요?”
“존경하는 선배님들이랍니다. 저 둘은 입학할 때부터 라이벌이었는데. 둘 간의 승률이 정확히 반반인건 유명한 일화죠. 아, 그리고 이건 풍문이지만. 둘은 서로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고 하니. 이번 대련은 더더욱 재밌겠죠?”
헤더가 해주는 쓸데없는 설명들을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정령사와 마법사의 싸움을 구경했다.
콰아아.
마법사가 사방에 얼음의 비수를 흩뿌렸고.
몸에 흙의 정령을 둘러 단단하게 만든 정령사가 날아오는 비수를 주먹을 쳐냈다.
예상외로 정령사는 근접전 위주의 전투를 선호하는 듯했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건가.’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며, 냉정하게 공세를 이어가는 마법사의 모습은 훌륭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이목을 끄는 건 정령사 쪽이었다.
‘다루는 정령의 수는 넷. 셋은 자기 몸에 붙여서 갑옷처럼 쓰고, 하나는 주위 환경을 바꾸고 있어.’
흙의 정령 하나가 대련장 위에 흙을 토해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아무렇게나 흙을 뿌리는 것 같지만. 하나하나가 상대를 방해하기 위한 치밀한 설계였다.
‘실시간으로 계산…… 했을 리는 없지.’
이런 부분에서 마법사와 정령사의 차이가 드러난다.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정신 집중이 필수인 마법사와 달리. 정령사는 정령에게 명령을 내려두기만 해도 되었으니까.
꽤 수준 높은 공방이 이어졌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정령사의 승리였다.
바닥에 깔린 흙에 마법사가 균형을 잃었고.
그 틈을 노려 공격한 정령사의 흙주먹에 마법사의 아티팩트가 가 깨져 버렸다.
“종료!”
심판을 맡은 교수의 선언에, 정령사는 서둘러 마법사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워주었다.
혹시 다친 곳이라도 없나 걱정스레 둘러보는 모습을 보면, 헤더가 말한 풍문이 완전히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짝짝짝
황태자와 그 뒤에 있던 두 마법사가 갈채를 보냈다.
이어서 학생들의 환호성이 온 경기장을 울렸다.
“와아아아!”
“둘 다 잘했다!”
훌륭한 대련을 보여준 둘은 그런 관중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꽤 볼만했네요. 그렇죠?’
[…….]
‘아 쫌. 아직도 삐져 계세요?’
이안이 이네스를 달래기 위해 뻘뻘 대는 사이.
삼학년과 이학년 대련도 끝이 났다.
그 두 대련도 꽤 수준이 높았지만.
아무래도 앞서서 보였던 4학년들의 대련이 더 화려하고, 수준이 높았던지라 관중들의 흥미는 조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1학년들의 대련이다.
꽤 많은 이들이 이 매치 업을 기대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희대의 천재라는 플로라가 어느 수준인지를 보고 싶어 했다.
화려한 차림의 플로라가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루크는 능숙한 동작으로 황태자와 관중에게 예를 표했다.
“힘내라 루크!”
“열심히 해!”
“할 수 있어!”
“플로라 양도 힘내세요!”
관중들은 저마다 원하는 쪽을 향해 응원을 보냈는데, 한눈에 봐도 루크가 더 많은 응원을 받았다.
‘하긴 원래부터 이미지 메이킹을 해서 좋은 인상이니까. 선배들과 친분도 있고.’
눈치 없는 플로라와는 달리, 루크는 모두가 좋아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승률이 낮으니까, 더 응원하는구나.’
언더독 효과.
사람은 언제나 약자를 응원하게 되고, 의외의 반전을 꿈꾸게 되는 법이다.
여러 사람이 모인 이런 형태의 전투에서는, 관중들의 반응 역시 전투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다.
루크는 이미 효과적으로 관중의 반응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오고 있었다.
‘흐음. 역시 이것저것 준비는 한 것 같은데…….’
하지만 부족하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이 정도로는 절대 못 이기지.’
이안은 차분한 마음으로 둘을 쳐다봤다.
이제 플로라가 루크를 요리하고. 루크가 형편없이 쓰러지는 꼴을 보면 될 뿐이다.
그러면 돈이 알아서 굴러들어온다.
‘이렇게 쉽게 벌 수 있는데 말이야.’
그렇게 이안이 장밋빛 꿈을 꾸는 사이.
황태자가 선언했다.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 명예롭고 용감하게 겨루거라!”
그 말을 끝으로, 둘이 자세를 잡았다.
처음에는 탐색전.
둘은 대련장의 끝과 끝에 서서 서로를 응시했다.
‘결국. 어떻게 거리를 좁히는 싸움이네.’
마법사는 근접전에 약하다. 이는 검과 마법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중력과도 관계가 있다.
눈앞에 칼이 왔다 갔다 하는데, 냉정을 유지하며 마법을 사용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어쨌든 루크의 첫수가 전투의 향방을 크게 결정지을 거라는 건, 자명했다.
그렇게 모두가 숨을 죽이며 집중하던 그때.
울컥.
루크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