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머리도 뜨겁게
루크의 입에서 한 줄기 피가 새어 나왔다.
줄기는 점점 커지더니, 루크의 발아래에는 이내 새빨간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싸늘한 정적.
수천 명이 들어찬 이곳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이해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건 플로라였다. 플로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크에게 다가가려 했다.
“무슨 일이야. 괜찮…….”
루크는 그런 플로라에게 한쪽 손바닥을 뻗었다. 더 다가오지 말라는 제스처였다.
당황한 플로라는 걸음을 멈췄고, 그제야 관중들도 웅성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갑자기 피를 쏟은 거지?”
“독…… 이라도 마신 건가?”
“피 속에 덩어리진 것들도 있는 걸 보면 내장도 상한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짓을. 이건 너무하잖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의료 담당 교수가 루크에게 달려가 몸 상태를 점검했다.
루크의 입에 빨간 약이 든 약병을 물려주었는데.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운지 그 루크가 연신 얼굴을 찌푸려댔다.
사제이기도 한 보건 교수가 신성 마법을 사용하자, 파랗게 질렸던 루크의 안색도 차츰 나아졌다.
그사이에도 웅성거림은 더 커지고 있었다.
이안 역시 사건의 배후에 대해 고민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대체 왜 이런 짓을 했을까.
굳이 루크에게 독을 먹여 당장 이득을 볼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답은 금방 떠올랐다.
‘…….플로라.’
문득. 관중석으로 올라오기 전. 루크의 대기실 앞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던 플로라의 추종자가 떠올랐다.
‘설마 플로라가…… 아니. 그럴 리 없지.’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맹한 구석도 있고, 눈치 없고 허당이지만.
그래도 천성은 나쁘지 않다는 게 플로라에 대한 이안의 결론이다.
이런 식의 수작을 부렸을 리 없다.
‘그렇다면 추종자의 과잉 충성으로?’
꽤 그럴듯한 이야기다.
플로라를 너무 동경한 나머지,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했다고 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상대가 루크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놈이 이렇게 허술한 수에 당해준다고?’
그건 루크 답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고, 머릿속이 흐린 기분.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는 방향은 사뭇 달랐다.
“설마 피에람 양이……?”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대기실 앞을 잠깐 지났는데 거기서 누굴 봤냐면…….”
의심이 칼끝이 플로라를 향한다.
애초에 이미지가 좋았던 루크.
알게 모르게 미움과 시기를 받던 플로라.
상대적으로 약자라는 루크에 대한 동정심.
게다가 군중들 사이에서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부정적인 여론을 조장하는 사람이 몇 명 눈에 띄었다.
그걸 보며 이안은 한 가지 배제하고 있던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스스로 독을 먹은 거야?’
이렇게 여론이 흘러갔을 때.
오히려 가장 수혜를 보는 건 바로 루크였다.
‘독약. 대기실 앞을 서성이던 플로라의 추종자. 군중 사이에 섞인 바람잡이. 미리 다 치밀하게 준비해 둔 건가.’
황태자가 지켜보는 자리다. 직접 상대에게 수작을 부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하지만 스스로 독약을 마셔 자작극을 꾸민다면?
‘애초에 루크는 이번 대련보다는, 경쟁자인 플로라를 작살 내는 데에 집중한 거야.’
이미 여론은 플로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시범 대련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에게 독을 쓴 사악한 여자.
그런 불명예를 얻는 것만으로도 이미 플로라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사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플로라가 그럴 이유는 적다.
나중에 조사하면 명확한 증거가 없기에 플로라가 처벌을 받을 일은 없겠지.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라는 건 진실보다 우선시되는 법이고. 인간은 한번 믿은 걸 계속해서 믿는 경향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하는 법이다.
한번 머릿속에 뿌리박힌 플로라에 대한 적대는, 설령 플로라의 무죄가 밝혀져도 꿋꿋이 살아남겠지.
그러면 플로라는 정치적으로 끝이다.
학사에서는 완전히 고립되어, 더는 루크의 적수가 될 수는 없을 터였다.
설령 플로라가 희대의 재능을 가진 천재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 많은 비난과 모멸을 감내해야겠지.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어놓은 거야. 플로라의 추종자는 미리 매수해둔 건가?’
플로라의 추종자가 루크의 대기실 앞을 서성거렸다는 정황 증거.
그것만으로도 여론을 선동할 수 있었다.
플로라의 추종자는 매수가 되었을 터다.
‘독한 놈이잖아. 생각보다도 더.’
루크가 마신 건 꽤 효과가 강한 독약이었을 거다.
당장 치료를 한다 해도 후유증이 남을 만한 독약으로 말이다.
아무리 보건 담당 교수가 바로 달려올 거라는 걸 계산했어도.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독약을 마시는 건 보통 각오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사실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 지나가듯이 생각했지만.
혹시나. 아주 혹시나 루크가 스스로에게 수작을 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이나마 한 적이 있었다.
역사 속 어떤 황후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안은 혹시나의 일을 대비해 불랑한 사내에게, 대련이 취소되었을 때의 일을 물어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현실로 이루어졌다.
충격에 빠져 있던 이안이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뭐. 씁. 대단하긴 하네. 이렇게 되면 대련은 취소가 되겠죠? 그러면…….’
그때.
대련을 중지하려고 다가오던 교수에게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대련. 계속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하게 해주세요.”
그러곤 제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플로라에게 강한 시선을 보냈다.
그 표정 연기가 아주 그럴듯해서. 보고 있는 관중들은 그런 루크를 절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래야 브레이브하트지!”
“포기하지 마!”
지켜보던 교수들은 난감해졌다. 원칙적으로는 중단하는 게 옳으나.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결정을 내릴 건 황태자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황태자에게 쏠리자, 황태자는 무료한 얼굴로 자신의 충실한 마법사들에게 말했다.
“브레이브하트와 피에람. 구세대의 영웅과 신세대의 영웅의 격돌이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재미없어졌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발칙한 꼬맹이가 여러 가지를 획책한 모양인데. 끝까지 봐주는 게 예의겠지. 뜻대로 하게 둬 보시오.”
그의 말에 흰색 로브의 마법사. 대현자 오테르가 걱정스레 말했다.
“하지만 피에람 가문의 아이가…….”
“그대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소. 하지만 이 정도도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국, 그뿐이라는 거겠지.”
어딘가 심드렁한 태도의 황태자가 계속 진행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대련이 재개되었다.
루크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고. 당황한 플로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탓.
루크가 빠르게 땅을 박찼다.
훌륭한 재능답게, 그 속도는 어지간한 검사들의 속도를 훨씬 상회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플로라가 마음만 먹는다면 손쉽게 제지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플로라는 그러지 못했다.
“윽!”
너무나 손쉽게 거리를 내준 플로라는 날아오는 목검을 향해 급하게 화염을 퍼트리고. 그 시야의 사각을 이용해 허겁지겁 다시 거리를 벌렸다.
초조하고. 엉성한 모습.
플로라는 명백히 집중력을 잃은 상태였다.
“상처 입은 상대한테 저렇게 가혹하게 마법을 날리다니. 너무해요.”
“예전부터 플로라 양. 아니. 플로라 저 년은 마음에 안 들었어.”
“긍지라는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항복하지. 쯧.”
관중들의 반응은 최악이다.
이미 플로라는 악인이 되어, 그 죄에 대한 응당한 벌을 받기를 모두가 한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그리고 플로라의 예민한 감각은 그런 목소리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플로라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점점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안은 그 모습을 보며,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마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마법사를 상대하려면 멘탈을 흔들어야 한다 이거지?
―결국 정신력으로 심상 속에 있는 마법을 현실에 구현하는 거니까. 심리적으로 흔들리면 마법을 실패할 가능성도 커져. 심하면 자기 마법에 잡아먹히는 경우도 있지.”
그렇기에 마법사 가문에서는 그런 정신적 교육을 중요시한다고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불씨를 품고 있는 화염 마법사들은 쉬이 냉정을 잃고, 스스로 무너져 버리곤 한다.
플로라는 지금.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에 침묵을 지키던 이네스마저 입을 열었다.
[이안. 큰일이에요. 분명 플로라 양은 타락해 적이 될 수 있다고 했었죠?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플로라양이…….]
‘안 돼…….’
[예?]
이안이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시선이 따갑다.
사람들이 내뱉는 악담은 송곳이 되어 파고들어 온다.
마음에 형태가 있다면. 플로라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너덜너덜할 것이다.
“아냐. 나는 그런 짓은…….하지 않았어.”
미약한 목소리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지만,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 누구도, 자신의 억울함을 믿어주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패배를 바라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몰락을 원하고 있다.
관중석을 애타게 둘러봐도 보이는 건 차가운 눈빛들.
심지어 평소에 항상 붙어 다니던 추종자들도 자기와는 관계없다는 듯. 필사적으로 플로라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아…….”
이 넓은 공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플로라는 마치 혼자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 세상에 마치 혼자서만 남겨진 듯한 압도적인 고독감.
이름있는 집안에 태어나,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고 누구에게나 떠받들어져 살아왔다.
이렇다 할 시련도, 고통도, 어려움도 없었다.
그저 성공만이 약속된 굴곡 없는 인생.
그런 인생을 살아온 플로라가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감정이다.
좀 더 나이를 먹었다면 달라졌겠지만. 지금의 플로라는 견딜 수 없었다.
‘왜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 거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는다.
마음속의 불꽃이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어두운 충동이 머릿속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여기서 전부 끝내버린다면.’
시야가 점점 좁아진다.
루크가 승리를 확신한 얼굴로 이곳을 향해 점점 걸어오는 게 눈에 보였다.
여기서 플로라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독으로 약해진 상대를 무자비하게 쓰러트렸다는 오명을 뒤집어쓸까? 아니면 독을 쓰고도 패배한 한심한 여자로 남을까?
그렇게 되면 가문의 명예는?
모두의 기대는?
미래는?
체념과 어두운 충동. 그 두 가지 감정이 충돌하고.
후자가 전자를 먹어치우려던 그때.
누군가의 고함이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뭐 하는 거야!”
몹시도 거친 어조였다.
무식할 정도로 큰 목소리에 플로라와 루크 모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이안이 서 있었다.
“당장 일어서! 일어서라고!”
신성한 대련 중에 느닷없이 고함이라니.
이 천박한 행동에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놈 당췌……!”
“황태자 전하의 앞에서 예의 없이!”
교수들은 뒷목을 잡으며 분노했고.
“어떻게 저렇게 천박할 수가!”
“역시 검은 머리. 평민이라 예의라고는 눈 씻고 찾을 수 없네요.”
곱게 자란 영애들은 그 추태에 비난을 퍼부었으며.
“누가 저놈을 말려!”
“감히 이놈이!”
황태자의 충실한 기사들. 혹은 의협심 강한 남학생들은 직접 실력 행사를 위해 자리를 박차려 했다.
이 모든 걸 즐겁다는 듯이 보는 인물이 딱 둘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헤더 페어윈드였다.
“푸하하. 후배님. 화끈해서 좋습니다.”
그렇게 폭소하며, 헤더는 마법을 일으켰다.
회오리친 바람이 이안의 목소리를 증폭해 온 대련장에 울려 퍼지니.
그 인상은 더욱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안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떠오른 건 과거의 트라우마.
야구장에서 폐인처럼 살아가던 흑역사.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때가 자꾸 떠올라 피가 끓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는 플로라와 그녀에게 쏟아지는 비난에서 이안은 그 이전의 기억을 보았다.
더럽혀진 팀 유니폼을 입은 소년.
그 소년에게 쏟아지는 모멸과 비난.
그 아픔을 못 이겨, 주저앉고. 좌절하던 소년.
소년이 아직.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특별함을 믿던 시절의 기억.
플로라의 모습이 그 소년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렇기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네가 상대한테 독약을 먹였어도 일단 일어나! 일어나서 저놈을 지져 버리라고! 증거와 함께 태워 버려! 왜 주저앉아 있는 거야! 네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피에람은 그따위 밖에 안 되는 거야?”
주저앉아 있던 플로라가 이안에게 응수했다.
“내, 내가 안 했어! 그리고 가문은 욕하지 마!”
가문에 대한 모욕은 또 다른 분노를 일으켜,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플로라가 평소 그러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애초에 독약은 내가 한 거 아니라고!”
이안이 즉답했다.
“알아! 네가 안 했다는 거, 나는 믿으니까 당장 일어서서 싸워! 그리고 반드시 이겨! 과정이 어떻고 자시고, 누가 욕하고 자시고.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나는 너한테 모든 걸 걸었다고!”
플로라는 이안은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과정이 어떻든 이기기만 하면 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썩 바람직한 말은 아니었다. 대체 저 검은 머리 사내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하지만 그 말에 담겨 있는 건 분명, 가식이 아닌 진심이었다.
마치 자기 경험을 담은 듯한 진한 진심이 그 안에 깃들어있었다.
그렇기에 기뻤다.
모두가 자신을 의심할 때.
믿어주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조금의 주저도 없이 이안은 자신을 믿어주었다.
설령 그 사람이 평소에 그토록 얄밉던 상대라도.
그게 어찌나 기쁜지. 어찌나 기쁘고 기꺼우며 안심이 되는지.
저절로 촉촉해져 오는 눈가를 플로라는 억지로 훔쳐냈다.
냉정과 전의를 되찾은 플로라는 다시 일어섰다.
일이 어떻게 되든…….
‘일단 이겨보자.’
그러다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나한테 모든 걸 걸었다는 게 뭔 소리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가 그런 의문을 가지는 사이.
달려든 기사들이 이안의 양팔을 붙잡았다.
“놔라! 놔!”
이안은 저항했지만, 기사들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마음이 놓이는 건.
플로라가 기운을 차린 것 같다는 것.
‘불은 더 큰불로 끄면 되지.’
오히려 어쭙잖게 응원의 말을 외쳤으면, 플로라의 마음에는 닿지 않았을 수도 있다.
순간적으로 끌어올려 진 분노는 그만큼 빠르게 식어 역설적으로 플로라에게 냉정을 찾아주었고.
플로라에게 향해지던 관중들의 혐오와 분노의 많은 부분이 이안에게 향해지게 되었다.
플로라와 달리. 이안에게 이 정도 시선은 너무나 익숙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플로라는 완전히 기운을 되찾았고. 이제는 루크를 때려눕히는 일 밖에 안 남았다.
이번에는 조금 감정적이었지만…….
어떻게든 플로라가 무너지는 걸 막아냈고. 이는 곧 플로라의 타락을 막아내는 길이며.
무엇보다 호주머니 속 금화들이 모두 날아가는 참사를 막아냈으니.
‘한 점 후회 없음.’
문제는 이 기사들이 이안을 끌고 가 어떻게 할지가 걱정이었는데…….
“모두 멈춰라.”
엄숙한 한마디.
분명. 크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공간을 울리는 그 목소리에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황태자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감히 내 앞에서 신성한 대련을 방해하다니. 아무리 네 친우를 위해서라고 하나, 주제넘은 짓을 하는구나.”
싸늘한 정적이 감돈다.
이안은 강제로 무릎 꿇려진 채로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심히 잘못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황태자가 엄하게 말했다.
“당장 황실 모욕죄로 너의 사지를 찢고, 목을 베어도 되나. 너의 용기를 봐 이번 한 번은 너그러이 넘어가 주겠다.”
“아. 그것참 너그러운…….”
“하지만!”
화색이 돈 이안이 재빨리 감사를 표하려 했지만, 황태자의 말에 곧바로 가로막혔다.
“루크 브레이브하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네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분명. 승패는 브레이브하트의 것이었다. 그렇지 않나?”
고민하던 루크가 무릎을 꿇으며 그리 말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모든 일이 어그러지고 말았다는 생각에. 루크도 어떻게 대처할지 갈등하고 있던 참이었다.
루크는 황태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기에 제안하겠다. 플로라 피에람과 루크 브레이브하트의 대련은 무효다. 대신, 브레이브하트가 죄인을 직접 단죄할 기회를 주겠다.”
“그 말은…….”
황태자가 이제껏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크 브레이브하트. 그리고 이안. 둘은 다음 대련을 준비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