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찾았다
“이것으로 오늘 수업은 마치겠습니다. 벌써 학기 수업의 절반을 들었는데. 혹시라도 새로 마법의 재능을 깨우친 학생이 있을까요?”
험멜의 질문에 학생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하긴.
마법의 재능이란 게 어디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흔하겠는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은 험멜이 이어 말했다.
“마법을 못 깨우쳤다고 너무 상심하지는 마세요. 당연한 일이니까요. 벌써 제가 교편을 잡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 수업에서 새로 마법을 깨우친 학생은 단 두 명밖에 없었답니다.”
애초에 기사, 마법사, 정령사 가문 출신 학생들이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화합을 목적으로 한 수업이다.
본래의 수업 목적은 이미 충분히 이뤄진 셈.
다만 이안은 조금 의아했다.
‘원래 게임에서는 이 정도로 수업 들으면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는데…….’
코르디스 1학년 정령술 개론을 들으면 초급 정령술을. 마법학 개론을 들으면 초급 마법학을 배울 수 있다.
당장 전투에 있어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은 아니지만, 잘만 성장시킨다면 활용할 방안은 무궁무진하다.
구태여 코르디스에 첫 번째 순서로 찾아온 건 그런 이유도 있었는데…….
‘쓸 수 있을 기미도 안 보이는데?’
시간이 지나면 점점 성장하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아직 마법이나 정령술은 한 걸음 조차 못 뗀 기분이었다.
오히려 다른 수업으로 듣는 승마는 날이 갈수록 실력이 일취월장하니, 그 대비가 더욱 눈에 띄었다.
‘뭔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 건가. 하긴, 난 게임 캐릭터가 아니니까…….’
원래의 몸에서 조금 어려졌을 뿐, 이안은 원래 자신의 신체 그대로 이곳에 떨어졌다.
사실, 이네스의 재능을 물려받지 못했다면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이안의 고민을 함께 생각하던 이네스가 답을 찾은 듯, 말해주었다.
[아마도, 그 원인은 알 것 같아요.]
‘뭔가요?’
[마법. 그리고 모든 걸 구성하는 네 요소를 기억하나요?]
이안도 그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교감 이해 직감 믿음. 맞죠?’
[네. 정령술은 교감이 특히 중요하고, 마법은 이해. 검술은 직감. 그리고 신성력은 믿음을 가장 중요시 여겨요.]
‘이미 물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정도면 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마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이해지만, 그렇다고 다른 요소가 결여 되면 마법은 펼칠 수 없어요. 이안에게 부족한 건…… 믿음입니다.]
이네스는 차분히 설명했다.
[마법을 사용하려면 자신을 믿고, 자신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저 교수가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마법 그 자체를 믿어야 해요.]
‘마법 그 자체를 믿는다니요?’
[생각해보세요. 이안은 원래 마법도, 정령도, 검광도, 신성력도 없는 세계에서 살다 왔잖아요?]
‘그렇…….죠.’
이안이 살던 한국에서 그런 얘기들은 소설이나 게임에나 등장하는 허구의 이야기.
하다못해 요즘 어린애들도 마법이 있다고 하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코웃음을 칠 터였다.
[그런 세계에서 평생을 나고 자랐다면, 당연히 마법과 정령술의 존재를 무의식의 단계에서 부정하고 있지 않겠어요?]
‘설령 눈앞에서 마법과 정령술을 직접 보고 겪어봤어도요?’
[사람의 정신이라는 건 원래 그런 법이에요. 그리고 보는 것과 직접 펼쳐내는 건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기도 하고요.]
원래도 극소수만이 가지는 재능이 바로 마법이나 정령술이다.
사실 코르디스니까 흔하게 보이는 거지, 섬 밖으로 나가면 쉽게 볼 수 없는 이들이기도 하고.
당장 이안도 이곳에 떨어져 수개월을 뒷골목을 전전했지만, 그곳에서 본 마법사라고는 순 사기꾼들밖에 없었다.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이안처럼 마음속에 커다란 벽을 지니고 있으면 더 사용하기 힘들겠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극복이 가능할까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사람의 무의식이라는 건 제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잖아요.]
이안은 조금 충격받은 얼굴로 굳어 버렸다.
확실히. 이네스의 말은 정론이었다.
원래 플레이하던 게임 캐릭터와 지금 이안의 가장 큰 차이.
그건 게임 캐릭터는 원래 이 세상의 주민이었고, 이안은 이방인이라는 것.
믿음이 중요한 세상이다.
별거 아닌 거 같은 이안의 출신은, 사실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럼…… 일단 이걸 해결할 방법도 고민해봐야겠네요.’
[네. 일단 저랑 이안은 정신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으니. 저를 통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 힘이 크게 약해져 있는 터라…….]
‘결국. 성검을 모아야겠군요.’
돌고 돌아 결론은 성검이다.
그리고 그 성검을 얻기 위해 지금 당장 신경 써야 할 건.
바로 이번 학기 말에 있는 이벤트. 악마 소환 사건이다.
***
이안, 마리, 그렉.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삼인방이 다시 도서관에 모였다.
그렉은 묻고 싶은 게 몹시 많은 모양이었다.
“야!”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루크랑 대련하는 거 다 봤다. 우리랑 싸울 때는 실력을 숨긴 거냐?”
그렉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듯했다.
이안에게 진 것 그 자체보다, 이안의 본 실력을 다 못 끌어낸 자신에게 화가 난 듯했다.
마리도 같은 심정인지,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안은 짧게 대꾸했다.
“뭐래. 그때도 내 온 힘 다 끌어다 죽을 듯이 싸웠고만.”
“그럼 그사이에 실력이 그 정도로 늘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이안의 뻔뻔한 답변에 그렉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이곳은 대륙의 뛰어난 재능이 모인다는 코르디스다.
일반적인 잣대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렉은 허탈한 얼굴을 했다.
마리가 옆에서 걱정하듯이 물었다.
“……그렉. 괜찮아?”
그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를 눈앞에서 봤으니, 어떤 감정이 생길지는 뻔했다.
그나마 분야가 완전히 다른 마리는 괜찮아도, 그렉이 느낄 좌절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렉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흥. 더 노력하면 될 뿐이야. 이건 빨리 달리기 시합이 아니니까.”
“……그렉.”
“지금은 내가 많이. 아니. 살짝 뒤처져도. 네놈이 언제든 벽에 가로막혀 정체해 있을 때, 내가 바로 앞질러 주마!”
그렉의 선언에 이안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벽은 무슨 벽. 아주 저주를 해라.”
“아무튼. 인정한다. 루크와 검을 섞을 때. 솔직히 감탄했어. 보는 사람도 배울 게 많은 대련이었다.”
마리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깨졌으니, 루크도 타격이 크겠지. 듣기로는 자기 방 안에서 안 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저 야만인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마리는 도서관 한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라이젤을 흘겨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라이젤이 씨익 웃었다.
“야만인이라니. 자칭 문명인의 언사에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구만.”
분위기가 과열되기 전에 이안이 말을 받았다.
“그래서. 너희 도련님은 조용한데, 넌 왜 계속 여기 있는데.”
“뭐, 약해빠진 사내놈이 방에 처박혀 있든 말든 관심 없어. 나랑은 큰 상관 없지.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그러고 보니…….”
라이젤은 이안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제법 훌륭하던데? 그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이면, 우리 부족에 가면 극진하게 환영받을 거야. 이곳처럼 귀족이니 뭐니 하는 걸로 차별하는 병신 짓은 없거든.”
라이젤은 동부 초원 출신이다.
동부 초원은 야만 부족들의 영역으로, 전전대 황제가 가장 세력이 큰 부족의 부족장에게 작위를 주어 제국의 세력권 내에 편입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거칠고 전투적인 풍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당장 라이젤만 해도 혈통 있는 집안 출신으로 이곳 코르디스에 초청되었을 텐데, 이렇게 사납게 굴지 않나.
이안은 생각했다.
‘언젠가 초원 쪽에도 한 번 가야 하긴 하지…….’
또 하나의 성검 조각이 잠들어있는 곳. 늦든 빠르든 동부에도 한번은 들러야 했다.
정보를 얻어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그래. 너희 부족 이름이 뭔데.”
“오? 뭐야.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 관심 있어 할 줄은 몰랐네?”
의외의 관심에 기쁜지,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 보인 라이젤이 말을 이었다.
“샤카자이. 샤카자이 부족이다. 왜. 진짜로 들릴 생각이냐?”
“언제 한번 동부 초원에는 가보고 싶어서 말이야.”
“음! 무릇 전사라면, 우라 대평원에 한번 가봐야지. 그곳에 펼쳐진 끝없는 지평선을 보면, 저기 저 쪼잔한 여자나 참을성 없는 남자 놈의 마음도 조금은 넓어질걸?”
“뭐야!”
“……말 다 했어?”
라이젤의 도발에 마리와 그렉이 다시 끼어들어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런 라이젤을 가만히 보았다.
아마도 루크에 의해, 이안의 감시를 맡았을 거라 생각되는 인물.
‘얘도 참 묘하단 말이지.’
웬만한 남자보다 더 잘 단련된 근육질 몸.
사납다 해야 할지, 호탕하다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성격.
그 이전에는 가끔 심심해지면 시비를 걸어왔지만…….
대련에서 루크를 꺾은 후로는 그 이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도가 놀랄 정도로 호의적으로 변했다.
[동부 초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강한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단지 그것만으로 저렇게 태도가 변한다고요?’
[생각보다 세상은 단순하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어쨌든. 더 낭비할 시간은 없다.
대화를 끝낸 이안이 말했다.
“일이나 시작하자고.”
“켁. 또 책 정리냐. 이제 그만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나가면 안 되냐?”
진절머리를 내는 라이젤에게 이안이 대꾸했다.
“너도 돕던가. 그러면 이곳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 텐데.”
“흐흐. 지금은 낮잠 잘 시간이라 말이야.”
라이젤은 능글맞게 웃으며 책 하나를 꺼내, 얼굴 위에 올렸다.
그 뒤에 곧바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
마리가 질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면 지는 거야.”
“우리 일이나 하자고.”
이안은 다시 책을 펴,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목표는 악마 소환 방법에 대해 조사해, 소환되는 악마를 약하게 할 수 없나 찾는 것.
‘아직 시간 흐름으로 봤을 때, 소환까지는 2달이나 남았지만…….’
언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안은 정령술에 관한 서적을 주로 훑었다.
이전에 만났던 사령술사에게서 들었던 조언대로, 악마와 비슷한 성질을 공유하는 정령에 대해 찾아보면 뭐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여태까지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시간을 더 갈아 넣을 수밖에 없네요.’
이안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이미 해가 져 버려 마리와 그렉. 라이젤도 모두 돌아갔을 시각.
한 서적이 이안의 눈에 띄었다.
‘고대인들의 정령 소환 의식.’
정령과 소환. 딱 이안이 찾던 키워드들이었다.
이안은 서둘러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몇몇 고대 부족은 전쟁에 임하기 전. 자신들의 정령을 직접 소환하곤 했다.’
‘그들은 부족 대대로 내려져 오는 신성한 장소. 주로 까마득히 높은 산기슭에, 자연적으로 좋은 기운이 몰리는 봉우리나 바위틈에서 의식을 벌였다.’
‘이들이 되도록 높은 장소에서 소환의식을 벌인 건, 그들이 소환의식이 무작위 정령을 불러온다는 점 때문이었다.’
‘때론 사악하고 강대한 정령이 소환되어 부족원들을 몰살하는 일도 있었는데, 고대인들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높은 장소일수록 그런 사악한 정령이 나타날 확률이 적은 걸 알아냈다.’
‘필자의 사견을 덧붙이자면, 이는 감정의 성질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부정적인 감정은 본질적으로 무거워, 아래에 고이는 성질이 있고. 긍정적인 감정은 정반대로 위로 떠오르는 성질이 있다.’
‘그렇기에 높은 봉우리에서 펼치는 의식이 상대적으로 온화한 정령이 소환되는 확률을 올려주었을 것이다.’
‘이들의 소환 의식 과정은 독특하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의식을 진행하고 마지막에는 항상 춤과 노래, 술과 약으로 부족민 수백 명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하나로 묶었다.’
이안은 눈동자만 움직여, 책의 내용을 훑었다.
그러다 어느 한 대목에서 눈을 멈췄다.
‘그러나, 어떤 고대인들은 일부러 사악한 정령을 소환시키려 하기도 했다.’
이안은 그 문장 아래에 있는 내용을 모두 읽었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정답을 찾은 모양이네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실마리를, 드디어 찾아내었다.
이안은 책을 집어 들고 사서에게 달려가, 대여 신청을 했다.
사서는 책 제목을 보고 잠시 의아해했지만, 그동안 서적 정리로 신뢰가 쌓인 터라 별말 없이 대여해주었다.
오른쪽 겨드랑이에 두꺼운 책을 끼고 이안은 서둘러 기숙사로 향했다.
‘이 내용을 토대로 대책을 생각하면, 답이 보일 것 같아요.’
그렇게 이안이 해가 져 어두워진 거리를 빠르게 걷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