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52화 (53/222)

52. 강림

“죽일 생각까지는 없어. 괜히 피하려다가 급소 맞으면 네 손해니 가만히 있어.”

그리 말하며 라이젤은 다짜고짜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퉁.

이안의 허벅지를 노리고 정확히 날아오는 화살.

화살촉 끝이 구부러져 있는 걸 보면, 한번 박히면 쉬이 빠지지 않는 녀석이었다.

캉!

이안은 검을 뽑았고. 날아오는 화살을 그대로 두 동강 냈다.

“허. 그래, 실력에는 좀 자신 있다 이거지?”

“덤벼.”

“담백해서 좋아.”

라이젤은 품에서 초원의 전사들이 사용하는 곡도를 꺼내 머리 위에서 붕붕 돌리다, 주저 없이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카각!

두 검이 부딪히며 불씨가 튀었다.

이안은 호쾌하게 검을 휘두르는 라이젤의 움직임을 보며 생각했다.

‘초원 전사들의 검술.’

이미 이네스를 통해 숱하게 봐왔고, 그 파훼법을 고민했었다.

‘애초에 말을 타고 사용하기 위해 만든 기마 검술이야. 스치면서 베기 쉽게 곡도를 사용하는 거고. 기동력이 없는 지금이라면…….’

캉!

이안은 현란하게 움직이는 곡도의 궤적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찔렀다.

순식간에 끊기는 흐름.

균형을 잃는 라이젤.

이안은 그대로 라이젤의 숨통을 끊으려 했지만 라이젤도 숙련된 전사였다.

“흡!”

그대로 곡도를 버리고 미련 없이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마치 개구리처럼 이안에게 힘껏 달려들어 그 허리에 팔을 휘감고 중심을 무너뜨렸다.

첨벙.

그대로 둘은 핏물 속에서 이리 저리 뒹굴며 어떻게든 상위를 차지하기 위해 바닥을 굴렀다.

붙잡힌 자세에서도 상대의 갈비뼈에 주먹을 박아 넣고, 입에 피를 머금어 상대의 눈에 뱉고, 입을 크게 벌려 상대의 살점을 물어뜯고.

추한 싸움이다.

검사와 검사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뒷골목 왈패들간의 싸움.

이안이 예전에 자주 경험했었던 그런 싸움과 같았다.

하지만 치열하다.

이게 단순한 대련이 아닌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었기에.

이 코르디스에서 와서 했던 어떤 싸움보다 더 치열했고, 심장이 뛰었다.

꽉.

기회를 잡은 라이젤이 팔과 다리를 이용해 이안의 오른팔을 단단히 붙들려 했다.

솔직히 놀랍다.

단순 무식하고 호전적인 라이젤이 정작 싸우는 방법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세련된 구석이 있었다.

‘기술이 걸리기 전에…… 흐읍.’

이안은 온 힘을 끌어다 써 라이젤이 달라붙어 있는 채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붕 떠오른 라이젤의 표정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괴물 새끼라고.

씩 웃어준 이안은 그대로 팔을 앙래로 내리쳤다.

첨벙!

“컥!”

바닥에 등으로 떨어져 고통스러워하는 라이젤의 몸을 이안이 단단히 짓눌렀다.

꼬르륵.

핏물에 잠겨 몸부림치는 라이젤의 입에서 기포가 올라왔다.

‘이대로 마무리한다.’

과연 숨을 못 쉬고 얼마나 버틸까.

아무리 훈련된 전사라도 3분은 못 버티겠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우 고통스럽겠지만 뭐 어떠한가.

라이젤은 아마도 악마 소환에 관련된 인물이고. 자기를 죽이려고 했는데.

이안은 웃었다.

사람을 죽이는 거지만, 승리감이 환희를 가져다주었다.

라이젤의 몸부림이 점점 줄어든다.

그러면 이제…… 이제…….

이안은 미간을 좁혔다.

계속해서 피부 위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찝찝한 느낌.

머릿속에 처음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의문과 함께 머릿속에 한 가닥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사실 지금까지는 머릿속에 어둠이 들어차 흐려져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 안!]

‘…….’

[이안! 들려요?]

‘…… 이네스 님?’

어느 새부턴가 안 들리던 이네스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어요. 이안! 하다못해 얘기라도 들어봐야죠! 만약 악마 소환과 관련이 있다면, 그에 대한 정보도 듣고요!]

‘아…….’

이안은 황급히 라이젤의 상체를 들어 올렸다.

“컥! 커억!”

라이젤이 가쁜 숨을 내쉬며 들이마신 핏물을 내뱉었다.

이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라이젤을 보자마자 죽이고 싶었어요. 그동안 안 좋게 생각하던 게 갑자기 커지면서…….’

[감정지배. 악마의 능력이에요.]

마음속에 있는 자그마한 불씨를 끌어내 커다랗게 키우는 것.

그게 악마가 가진 힘 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다고 라이젤을 그냥 봐준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이안은 라이젤의 팔을 단단히 고정한 채로 차갑게 말했다.

“그동안 루크 지시를 받고 날 감시하던 거,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냐?”

“......하. 그래. 반신반의했는데, 진짜일 줄 몰랐군. 처음 화살부터 제대로 급소를 노렸어야 했는데. 나답지 않게 마음이 약해졌어.”

라이젤은 이를 악물었다.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 꽤나 화가 나는 것 같았다.

이안이 말했다.

“쓸데없는 말 말고, 알고 있는 거 다 불어.”

“그냥 죽여. 내 목을 베고 심장을 파낼 수 있을지언정, 내 혼마저 빼앗갈 순 없을 거다.”

그렇게 말한 라이젤은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여 목을 들어냈다.

마치 이 부분을 검으로 내리치라는 듯한 동작.

다른 이였다면 참으로 전사답다며 감탄을 흘렸겠지만, 이안은 뭔가.

뭔가 대화가 잘 맞물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야. 뭔 소리 하는 거야. 지금 뭔가…….”

이안과 라이젤의 대화가 이어졌다.

본론만을 말하는 이안과 라이젤의 시원시원한 성격 덕에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얘기를 듣고 곰곰이 고민했고.

이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

“이런.”

하수구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빛이 힘을 잃고 어둠이 득세하는 시간.

하지만 그나마 지고 있는 노을도 자욱한 해무에 가려, 제대로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원래도 해무가 자주 끼는 카스크 내해라지만, 이런 시각. 이런 계절에 이 정도로 짙은 해무는 확실히 이질적이다.

‘이걸로 섬이 고립되었네요.’

[이런 해무를 뚫고 출항할 배는 없을 테니까요. 특히 악마가 만들어낸 안개라면 더더욱.]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강림한 악마는 섬의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잠식해나가겠지.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이제부터는 악마의 시간이다.

‘그 전에 대비해야 해요.’

이안은 멍하니 해무를 바라보고 있는 라이젤에게 지시했다.

“일단 너는 내벽 바깥에 있는 학생들을 모아서 전부 내벽 안쪽으로 이동시켜. 딱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우선 상업지구 쪽으로 가면 될 거야.”

“…… 너는 어쩌고?”

“섬에 있는 방어 시설들을 작동시켜야지.”

코르디스는 하나의 요새나 다름없다.

수백 년간 전쟁을 위해 준비해 둔 방어 시설을 가동하면 악마라도 쉽사리 섬을 장악할 수는 없으리라.

라이젤이 회의적으로 말했다.

“아직 악마는 완전히 소환되지도 않았어. 긴 시간 평화에 찌들어있던 교수들이 네 말 한마디에 방어 시설을 작동할 것 같아?”

“악마보다 무서운 걸 들이대면 되겠지.”

“…… 뭐?”

라이젤이 의문스럽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구구절절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서 애들을 구하지 못하면 쉽지 않을 거야.”

“알았다. 일단 네놈을 믿어보기로 하지.”

그렇게 말한 라이젤은 뒤돌아서 경쾌하게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라이젤을 보며, 이안도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섬의 방어 시설은 어디서 작동할 수 있을까요?’

[방어 시설이 한두 개가 아니라 다 나뉘어 있지만, 일단 내벽의 방어 시설은 학사 본부에 있는 당직 교수의 권한으로 발동시킬 수 있을 거예요.]

‘학사 본부. 알겠어요.’

단걸음에 학사 본부로 찾아온 이안은 우선 자치회 집무실을 찾았다.

여느 때와 같이 마틴이 서류 더미에 파묻혀 신음하고 있었는데, 이안이 노크도 없이 들어오자 조금 놀란 듯했다.

“…… 무슨 일이야.”

“당직 교수님 어딨죠?”

“당직 교수님은 왜 찾는 건데?”

“그건 됐고, 빨리 장소만 알려줘요!”

이안의 기백에 놀란 마틴이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어…… 건물 꼭대기 층에 있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선배님도 미리 무기 들고 대비하세요!”

“…… 뭐를?”

그렇게 황망하게 중얼거리는 마틴을 뒤로하고. 이안은 거의 날듯한 발걸음으로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노크 없이, 부서질 기세로 문을 벌컥 여니. 지루한 얼굴로 앉아서 책을 읽던 당직 교수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누, 누구인가요.”

“…….”

다행히 아는 얼굴이었다. 얼마 전 황태자 방문 때 곤욕을 치렀던 교수.

험멜은 당황한 얼굴로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인가요?”

이안은 고민했다.

여기서 악마가 소환됐다느니 뭐니 하나하나 설명해서 말하면 험멜이 순순히 그 요구에 따를까?

‘그럴 리 없지.’

조직에 소속된 사람들이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건 자기가 어떤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설령 악마에 대한 얘기를 들어도, 직접 자기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이야기를 듣지 않겠지.

그래서는 너무 늦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부끄러워도…….’

이안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건물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소리로 외쳤다.

“엄명이다아아!”

“예…… 예?”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사자후에 험멜의 정신이 쏙 빠졌다.

이안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적이 오고 있다! 당장 섬의 방어 시설을 모두 가동해라!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다!”

어차피 마지막이니만큼, 황태자가 준 신분을 활용하기로 했다.

호통을 들은 험멜은 이야기를 따라오지 못해 쩔쩔맸다.

“예? 적? 방어 시설? 황태자 전하? 대체 무슨 말인지…… 방어 시설은 예 그. 피에트로 교장님께 우선 보고를…….”

이안은 그런 험멜에게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네노오옴!”

“예, 예!”

“그간의 모습을 좋게 봐, 황태자 전하 앞에서 내 직접 두둔해줬건만, 정신조차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구나.”

얼마전의 곤란했던 기억이 떠올라 험멜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 죄 죄송합니다!”

“더 늦기 전에 방어 시설을 가동하라! 정녕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책임을 지는 게 두렵다면, 더 큰 두려움을 제시하면 될 뿐.

험멜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다른 이도 아닌 험멜이니만큼, 이안이 하는 말을 의심하는 법이 없었다.

지금 험멜의 눈앞에 비친 이안은 그냥 평판 안 좋고 꺼림칙 하게 생긴 검은 머리 소년이 아니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을 벨 권한이 있는 황태자의 대리자였다.

예상대로 험멜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아, 알겠습니다.”

험멜은 허겁지겁 일어나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 움직이라고, 이안이 검을 뽑은 건 덤이었다.

우우웅.

몇 번의 간단한 조작만으로 장치는 너무나 쉽게 작동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걸로 두 가지나 나아졌어.’

게임에서는 이렇게 빠른 시기에 악마가 소환되지 않았다.

분명 소환되는 악마는 원작에서보다 약할 터다.

‘원작에서는 방어 시설이 제대로 작동되지도 않았고 말이에요.’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뒷골목에서 노예로 살며, 성장하지 못했던 그 공백은 이걸로 어찌어찌 메꿔졌다.

이제부터는 이안이 하기 나름이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성검을 찾을 시간이네요.’

홀로 얼이 빠져 있는 험멜을 뒤로하며, 이안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내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라이젤의 외침에 학생들은 비웃음을 흘렸다.

“하. 야만인 녀석이 뭐라는 거야.”

“꼴이 그게 뭐야. 아무리 미개하더라도, 최소한 씻고 다니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라이젤은 이를 악물었다.

사실. 동부 초원 출신 라이젤은 이안만큼은 아니어도, 무시와 차별을 당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지금은 핏물에서 이미 한바탕 구른 뒤다.

지금의 엉망진창인 라이젤의 모습은 학생들의 경멸을 살 뿐이었다.

‘나로는 안 돼.’

라이젤은 애꿎은 땅을 걷어차며, 이를 악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의 라이젤로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다.

‘이럴 때는…….’

라이젤은 설득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대신해 이들을 설득해줄 사람을 데려와야 했다.

그런 라이젤의 뒷모습을 보며 학생들은 재수 없다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 중에서도 이 일을 기묘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뭐지?’

근처 3층짜리 레스토랑의 테라스에서 식사하던 레아는 라이젤이 외치는 말들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라이젤이라…….’

레아는 이안에 대해 감시…… 가 아닌 정보를 알아내면서 자연스레 이안이 어울리는 다른 학생들에 대해서도 알아봤었고.

그중 하나에 라이젤도 포함되었다.

‘조금 별난 구석이 있어도, 인상과는 달리 사리 분별을 잘 하는 사람이지. 이유 없이 다짜고짜 이렇게 행동할 사람은 아닌데…….’

문득.

레아는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껴 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며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양이 사라진 공백을 메워야 할 별과 달이 보이지 않는다.

검은 물감을 쏟은 캔버스처럼 그저 새까맣기만 한 하늘.

레아는 저도 모르게 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세상에…….”

섬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