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강림(2)
섬의 서북부 끝에 위치한 높다란 건물.
물을 다루는 마법사들이 수학하고 연구하는 이곳은 ‘지식의 등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카스크 내해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한 건물은 그 이름답게 코르디스 근처의 상선들을 안내하는 등대의 역할도 겸했다.
덕분에 바다에 이변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도 바로 이 등대였다.
그 등대의 맨 꼭대기 층.
열정 있는 학생들은 오늘도 늦은 시각까지 건물에 남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
어퍼 클래스는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상석에 앉았고.
나머지는 구석 자리나 심지어 몇몇은 자리가 없어 서서 명상해야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성적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게 된다.
‘곧 있으면 학기 말이야.’
‘좋은 평가를 받아서 어퍼클래스에 올라가야 해. 안 그러면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어.’
‘이번에는 반드시 저놈들을…….’
그 또래의 아이들답게 잡담이라도 할법하건만.
학생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자기 위에 있는 학생을 제치기 위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깨달음의 실마리를 붙잡기 위해 끙끙거렸다.
고요하지만 필사적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 숨 막힐듯한 침묵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이미 학교에 다니며 매일 겪었던 일상에 불과하니까.
그때.
누군가의 혼잣말 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뭐야.”
무심코 흘러나온 작은 목소리. 하지만 워낙 주위가 고요했던지라 명상하던 학생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혼잣말을 뱉은 학생은 무안한 얼굴로 창밖을 가리켰다.
“저거…….”
바다에 짙게 깔린 해무.
그 해무 너머로 보이는 집채만 한 거인의 실루엣과 땅을 기듯이 다가오는 어둠.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인 건 명백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어찌 행동해야 할지 발만 동동 굴렀다.
하필이면 이들을 인솔한 험멜은 당직으로 빠져 있었다.
그렇게 의미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사이.
마침내 어둠이 등대에 당도했다.
등대의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 어둠을 보며, 그제야 위기감을 느낀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뭐, 뭐야!”
“꺄악!”
창문의 틈 사이로 흘러들어온 어둠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학생부터 집어삼켰다.
“으아아악!”
겁을 먹은 학생은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자. 조용히 눈을 떴다.
“어?”
어둠에 삼켜져 아무것도 안 보일 줄 알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찰박.
발목까지 오는 차가운 물의 감촉이 서늘하게 전해졌다.
호수.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호수가 이곳에 있었다.
‘갑자기 왜 고향이…… 원래 이렇게 얕은 호수가 아닌데.’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그런 의문을 가지던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예쁜 공간이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하기 힘든 중성적인 목소리.
뚜렷한 특징 없는 얼굴과 체형.
어딘가 흐릿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
분명 처음 보는 게 확실한데, 마치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친근한 존재가 그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있었다.
그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이방인이 말했다.
“가슴에 품은 호수…… 물을 다루는 마법사인가 보네? 풍경이 아름답고, 호수의 주위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제법 사랑받는 환경에서 자란 모양이야. 그렇지?”
그의 질문에 학생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마법의 수준은 낮아. 솔직히 말해, 형편없어.”
“…… 뭐?”
“봐봐. 이 호수를.”
이방인이 허리를 숙여 호숫물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느릿한 파문이 퍼져 학생의 발목까지 다다랐다.
“얕아. 호수 자체는 제법 크지만, 그 바닥은 훤히 들여다볼 정도로 얕지. 한마디로 네 지식의 깊이는 그 정도라는 거야. 다시 말하지만 형편없어.”
이방인의 비웃음에 학생은 발끈했다.
“나는 어퍼클래스야! 내 또래 중에서도 나보다 재능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아. 물론 그렇겠지. 지금은 말이야.”
“…… 뭐?”
이방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지금은 타고난 혈통을 바탕으로 상위권을 유지하지만, 솔직히 너도 느끼고 있잖아? 네 성장이 너무나 느리다는 거.”
“그걸…….”
“재능이란 말이야. 꽤 얄궂은 면이 있거든. 승승장구하던 사람도 단 하나의 벽을 못 넘어 고꾸라지는 일은 흔하고. 그 반대의 상황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지.”
그리고 이방인은 입을 다물었다.
마치 눈빛으로 ‘너라고 다를까?’ 하며 말하는 듯했다.
하나하나가 자신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이다.
그가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불안감들.
학생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이곳 코르디스는 철저한 능력주의다.
능력이 있으면 대우하고, 능력이 없으면 차별하는 게 당연한 곳.
그 능력을 인정받아 어퍼 클래스에 들어간 건 다행이었지만, 언제고 이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강한 스트레스가 되었다.
차라리 플로라처럼 누구도 넘보지 못할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의 재능은 애매하게 뛰어나다.
그렇기에 다른 어퍼 클래스 학생에게는 열등감을 느끼고, 사이드 클래스 학생은 언제고 자기 자리를 뺏을 수 있는 적으로 보인다.
악마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았는지, 한 가지 달콤한 제안을 건넸다.
“방법이 있어. 더는 불안에 떨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확고한 힘을 얻을 방법이.”
“…… 어떻게?”
“내 손을 잡는 거야! 네가 수십 년간 시간과 품을 들여도 미처 쌓을 수 없는 지식을 한 번에 줄게! 이 호수 바닥을, 내가 직접 넓혀준다는 거지. 어때?”
이방인이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학생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본능이 말했다. 절대 저 손을 잡지 말라고.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하다.
마른침을 삼킨 학생은 저도 모르게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이방인이 웃었다.
그리고 그 둘의 손이 맞닿기 직전. 학생이 손을 거두었다.
학생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흐음.”
이방인이 빙그레 웃는다.
그 표정에 소름이 끼쳤지만 학생은 말을 이었다.
“설령 벽을 마주해 배움이 정체된다고 해도 그건 온전히 내가 극복할 문제지. 이런 식의 편법으로 통과해서는 안 되는 거야.”
유혹에 갈등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굳은 신념만이 두 눈동자에 감돈다.
이방인은 안타깝다는 듯이 얘기했다.
“마음이 강하면서도 우둔한 아이구나. 그런 낡아빠진 사고방식에 아직도 갇혀 있다니, 결과만 좋으면 다 상관없는 것이거늘…… 하지만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이방인이 손뼉을 치자, 주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순순히 보내주는 모습에 혼란을 느끼기도 잠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원래의 등대 안이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학생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얘들아! 어서 정신 차려! 뭔가 이상한 일이…….”
피슉.
물줄기 하나가 학생의 목을 꿰뚫었다.
기본적으로 언제든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 훈련받은 그였지만.
이번 공격은 너무 빠르고, 강하며, 급작스러웠다.
“컥!”
울컥 새어 나오는 피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학생의 시선이 물줄기가 뻗어온 쪽으로 향했다.
“커…….억!”
사이드 클래스 학생이 그곳에 있었다.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해, 평소에 은연중에 무시하고 있던 학생이었다.
자세히 보니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컥……!”
학생은 어떻게든 상처를 부여잡고, 제발 정신 차리라고.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필사적으로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피슉. 슉.
사방에서 날아온 물줄기가 학생을 순식간에 넝마로 만들어 버렸다.
“끄……!”
그제야 학생은 깨달았다. 애초에 자기한테 주어진 선택권은 없었다는 것을.
서서히 의식이 꺼져가고.
모든 게 끝나가던 순간.
이방인의 목소리만이 귓속에서 차갑게 메아리쳤다.
“안타깝게도 네 친구들은 너처럼 마음이 강하지 못한 모양이야.”
***
이안이 걸음을 서둘렀다.
이미 완전히 해가 져 버렸고, 저 멀리 어디선가 나지막한 비명이 들려온다.
‘시작된 거야.’
코르디스에 소환되는 건 ‘질투의 악마.’
마주치는 생명체를 홀려서 자기 권속으로 만들어 버리는 녀석이다.
‘게임식으로 표현하자면 잡몹을 많이 만들어서 까다로운 보스죠.’
일단 라이젤을 시켜서 학생들을 대피하게 했지만, 얼마나 의미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일단 맡겨두는 수밖에 없다.
당장 향한 곳은, 코르디스의 유물들이 보관된 창고.
심상치 않은 사태를 감지했는지. 창고 앞을 지키던 기사도 어디론 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어차피 비상 상황이니, 이 창고도 개방될 테니…… 조금 빠르게 챙겨도 되겠죠.’
이안은 창고의 입구를 빠르게 통과했다.
어떤 마법적인 장치가 되어 있는 건지, 창고의 내부는 그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이안은 속도를 높이면서도 장식 장에 진열되어있는 무구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천둥 장화. 가데오의 투구. 저건 파트라의 토시…… 탐난다.’
하나하나가 코르디스 스토리의 끝을 봤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무구들이다.
저 중 하나만 챙겨도 이후에 얼마나 편해질까?
이안의 눈동자에서는 미련이 뚝뚝 떨어졌지만, 끝내 유혹을 이겨냈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보안 시설 때문에 난리 날 거예요. 우선은 목적에 집중하죠.’
[이안. 느낄 수 있어요. 성검에 더 가까워지고 있어요.]
‘예!’
코르디스가 자랑하는 간판급의 무구들이 장식된 구역을 지나고, 상대적으로 유명세가 덜하지만 가치가 뛰어난 물건들이 전시된 구역도 지나고. 마침내 도착한 창고의 끄트머리.
그 역사나 가치, 용도조차 알 수 없는 낡고 오래된 유물들이 쌓여 있는 이곳은 창고라는 표현에 아주 잘 어울렸다.
‘그나마 보안이 덜 철저한 곳이죠. 여기서도 물건 하나 슬쩍하면 바로 경보가 울리지만.’
하지만 지금은 경보가 울려도 상관없다.
이미 학사는 난리가 나 있을 테니까.
이안은 창고 안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원하던 걸 발견했다.
‘찾았다.’
창고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투박한 검.
지금 들고 있는 성검과 디자인이 비슷하지만, 미약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게 차이점이었다.
‘…….’
[가죠.]
“예.”
잠시 머뭇거리던 이안은 성검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팟.
주위가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변하고.
함께 선 이네스와 이안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이네스는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아.”
은은한 빛무리에 둘러싸인 또 다른 이네스가 홀로 자리에 앉아 잠에 빠져 있었다.
***
“세상에.”
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둠이 섬의 가장자리부터 잠식해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제법 빠르다.
머지않아 저 어둠이 언젠가는 이곳까지 당도할 거라는 건 확실했다.
‘악마…….’
레아는 검의 손잡이를 부러져라 꼬나쥐었다.
이야기로만 들어왔던 악마지만, 저 어둠을 보니 악마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레아는 쿵쿵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최대한 냉정히 생각하려 노력했다.
‘우선 학생들. 그리고 다른 직원들을 대피시켜야 해.’
이곳 상업지구에는 학생들 외에도 노동자나 일반인들이 많았다.
평생 전투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귀족에 비하면 너무나 나약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저 어둠에 단 한시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제야 레아는 라이젤이 하려던 일을 모두 이해했다.
‘이 사람들을…….’
레아는 테라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슬슬 이변을 눈치챈 학생들이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고.
평온하던 분위기가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도, 도망가!”
“비켜!”
“꺄아악!”
아비규환.
학생들은 서로 밀쳐가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일반인들은 그 몸싸움에 못 이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에서는 어떤 명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위험이 닥치면 똑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레아는 고민했다.
학생들은 몰라도, 다른 일반인들의 속도로는 결국 어둠에 잡아 먹힐 터다.
게다가 방금의 그 무질서한 퇴장으로 부상자들도 생겨났다.
레아는 후회했다.
라이젤이 소리칠 때 조금이라도 더 유심히 들었다면…….
‘아니. 내가 더 적극적이고,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였으면 달라졌을까.’
레아는 남에게 무관심하고,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성격을 자신의 장점이라 여기곤 했다.
그런데 그 장점이 이럴 때 발목을 붙잡았다.
레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은 후회할 때가 아니야.’
지금은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야 할 때다.
레아는 앞을 보았다.
저 어둠이 몰려들고, 그 어둠 속에 형형히 빛나는 무수한 붉은 눈이 보였다.
대부분은 동물의 형체지만 몇몇은 교복을 입은 학생의 모습이다.
악마의 군세.
레아는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부상자와 다른 일반인들이 힘겹게 도망치고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들을 버리고 내벽에서 농성하는 게 맞아.’
내벽에 가 자신의 힘을 보태는 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인명피해를 줄이는 방법일 수도 있다.
레아는 황태자를 떠올렸다.
‘오라버니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저들을 포기했겠지.’
그게 옳으니까.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지 않고. 저들 모두의 목숨을 합쳐도 레아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하나뿐인 피붙이는 이런 식의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을 너무나 많이 겪었을 거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아는 검을 쥐고 어둠을 향해 다가갔다.
합리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미련한 일이었고.
얼마 전이었다면 다른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소년이 레아의 사명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그래서 레아는 걸어갔다.
그녀가 평생을 짊어온 사명은, 저 사람들을 버리는 걸 용납지 않았다.
‘악마를 벤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던 레아가 걸음을 멈췄다.
‘저건…….’
낯익은 뒷모습이 홀로 길가에서 떨고 있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난 플로라 피에람이니까.”
플로라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