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54화 (55/222)

54. 강림(3)

성검의 손잡이를 잡자 주위가 변한다.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

그런 공간의 한쪽 끝.

하얀 빛무리에 둘러싸인 또 다른 이네스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이안은 입을 열 수 없었다.

고이 잠들어있는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가세요.]

이네스가 이안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이안이 앞을 향해 걸어가자, 또 다른 이네스를 감싼 빛이 주위로 갈라지며 이안에게 길을 만들어주었다.

한발 한발 다가선 이안이 이네스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이 잠들어있던 이네스의 눈도 스르륵 떠져 다가온 이안과 그 뒤에 선 이네스를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수백 년을 홀로 검 안에 갇혀 있던 이에게 무어라 인사를 건네야 할까.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 이네스가 느꼈던 외로움과 괴로움을 희미하게나마 이해 한 이안이다.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이내 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오래 기다렸죠?”

이네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린다.

이안이 내민 손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빙그레 미소지으며, 이안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파앗.

밝은 빛이 주위에 퍼져나갔고. 나뉘어 있던 성검이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

레아가 플로라에게 말을 걸었다.

“피에람 양. 여기서 뭐 하시나요? 위험해요.”

“아…… 레아 님.”

플로라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둘은 코르디스 이전부터 자주 마주치곤 했다.

하지만 처음 몇 번 외에는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코르디스에서도 마찬가지.

플로라는 언제나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레아는 굳이 남에게 다가가는 성격도 아니다.

둘 다 그 뛰어난 재능으로 칭송받는 입장이었지만, 둘의 분야가 완전히 다른 것도 한몫했다.

플로라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저들이 완전히 대피하지 못해 시간을 벌려고 했어요.”

“…… 평민들을 위해서 말인가요?”

레아가 묘한 얼굴로 플로라를 바라봤다.

플로라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원래부터 황가와도 인연이 있는 가문이다.

레아는 플로라의 어렸을 적 성격을 기억했다.

‘재능은 아주 뛰어나. 뛰어나지만…….’

인성은 그 재능을 받쳐주지 못한다는 게 레아의 판단이었다.

물론, 플로라의 성격을 다른 또래의 귀족 여식들과 비교하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레아의 기준에 만족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관심을 끌고 살았는데…….

‘직접 나설 줄이야.’

다른 이도 아닌 평민들을 위해 직접 나서다니.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그런 레아의 시선이 부끄러운지, 플로라가 황급히 덧붙였다.

“저, 전 긍지 높은 피에람이니까요. 이런 상황에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죠.”

잘된 일이었다.

사실 저 악마의 군세를 혼자서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조금 막막하던 참이었으니까.

레아가 말했다.

“함께 싸우죠. 저 사람들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때까지 버티다가, 내벽으로 천천히 후퇴해요. 내벽에서 방어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 예!”

과거의 옛 영웅들. 그 영웅들의 핏줄이 모여 다시 동료가 된다.

그 사실에 묘한 고양감을 느끼며, 플로라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두두두두.

악마의 군세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든다.

그 안에는 쥐나 새, 개 따위의 짐승부터 지네나 바퀴벌레 같은 벌레. 타락해 버린 정령.

그리고 군세의 뒤편에는 인간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플로라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갈게요.”

화륵.

양손을 들어 큼지막한 화염구를 만들어냈다.

화염구를 제자리에서 빠르게 회전시켰다.

긴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 불꽃을 압축해 주먹만 하게 만든 뒤.

레아에게 경고했다.

“조금 시끄러울 거예요.”

미처 레아가 대답할 새도 없이.

플로라는 손안에 격렬하게 진동하던 화염구를 날렸다.

휘이이.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화염구가 악마의 군세. 그 한가운데에 안착했다.

화염구에서 한 줄기 두 줄기 빛이 빠져나오고…… 한순간 주위 일대가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폭발.

꽈르릉!

거대한 화염 줄기와 충격. 그 뒤를 이어 한발 늦게 터져 나오는 엄청난 굉음.

대지가 흔들리고, 어마어마한 열기가 밤하늘을 달군다.

“끼에엑!”

짐승들이 울부짖었다.

아무리 악마의 권속이라 해도, 고통은 느끼는 모양이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녀석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원형으로 퍼져나간 불길의 가운데에 있던 놈들은 미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문자 그대로 소멸해 버렸으니까.

괴수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비명이 메아리쳤다.

악마들의 고향이라는 지옥이 이러할까.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목도한 레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전력으로 마법을 사용하면 이 정도라니…….’

지금껏 플로라가 학기 중에 보였던 마법은, 그 실력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소름이 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점점 화염과 열기가 사그라들고.

플로라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처음에 기선을 제압하려고, 일부러 무리해서 위력을 올렸어요.”

“…… 계속 싸울 수 있겠어요?”

“머리를 식힐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물론, 다시 참전한다고 해도 아까만큼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레아가 플로라의 앞에 보호하듯이 섰다.

“제가 피에람 양을 지킬게요. 천천히 후퇴하죠.”

“네!”

불꽃의 빛과 열기에 잠시 주춤한 어둠이 다시 전진하기 시작하고. 그 안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군세가 다시 진군했다.

아직 상대해야 할 적은 너무나 많았다.

‘게다가 어둠이 섬의 모든 가장자리에서부터 몰려오는 걸 생각하면, 이미 내벽이 공격당하고 있을 수도 있겠어.’

레아는 플로라와 함께 천천히 물러서며 검을 뽑았다.

황태자의 ‘임페리얼 엣지’ 만큼은 아니어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명검에서 서늘한 예기를 흩뿌렸다.

“계속 움직여요. 뒤는 제가 맡을게요.”

“…… 부탁드릴게요.”

플로라가 먼저 후퇴를 시작하고.

조금 거리를 벌린 레아는 마주 오는 괴수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샤악!

빠르게 휘둘러진 검이 공간을 가르고, 다가오던 괴수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그 과정이 어찌나 신속하고 정확한지, 검날이 지나가고 몇 박자 뒤에서야 괴수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몸이 가볍다.

최근, 물이 오른 실력이 레아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혼자서 전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벌레나 동물. 하찮은 정령 따위는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레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레아는 방심하지 않았다.

피슉.

깡!

세 방향에서 날아오는 물줄기를 단번에 베어낸 레아는 그쪽을 노려보았다.

“…… 쯧.”

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학생들이 더 강해진 힘으로 레아를 공격해왔다.

일대일이라면 가볍게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조합을 갖춘 마법사들을 상대로 검사 혼자서 싸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밀려든 어둠이 자꾸만 레아의 다리에 달라붙으려 했다.

불을 밝혀 떨쳐내려 해도 이 어둠은 유독 끈질기다.

레아는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걸 느끼며, 다른 학생들을 홀린 게 이 어둠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래 노출되면 안 돼.’

레아는 싸움의 박자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빠르게 검을 내뻗어 상대를 물러서게 한 뒤, 신속하게 뒷걸음질 쳤다.

그때쯤부터 시작해, 다시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플로라의 지원이 날아왔다.

“피해요!”

화륵!

괴수들의 중간중간에 일자로 된 화염의 벽이 만들어져, 놈들의 진군을 방해하고.

그 틈을 타 레아는 빠르게 후퇴했다.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둘은 오늘 처음으로 같이 싸웠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합이 잘 맞았다.

각자가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을 정확히 깨닫고 있으니, 아슬아슬하고 힘겨운 상황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보이는 거대한 성벽.

방어시설이 가동된 내벽은 환하게 빛을 내며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늦지 않게 방어 시설이 가동되었네요.”

“예. 학사가 생각보다 악마에 빠르게 대응했네요.”

성벽 위에서는 학생들이 우왕좌왕하며 전열을 갖추고 있었다.

플로라와 레아는 내벽에서 쏘아지는 원거리 지원으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성벽 위에서 내려준 줄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른 둘은 다른 사람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두, 둘 다 괜찮나요?”

4학년 교수 중 하나가 둘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레아가 손을 저었다.

“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우선 현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주시죠.”

“아, 그래요!”

교수와 학생 간의 사이지만, 황녀의 이름값은 가볍지 않다.

자연스러운 명령에 교수가 얼른 설명했다.

“벌써 피해가 너무 큽니다. 학생들의 절반은 악마한테 홀린 거 같고, 교수님들도…… 시간대가 너무 안 좋았어요.”

“농성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워낙 오랫동안 대비를 해와서 부족한 건 없습니다. 최소 5년은 여기서 버틸 식량과 물자는 있죠. 근데…… 아무래도 그 정도로 시간은 안 줄 것 같네요.”

성벽을 향해 악마의 군세가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악마의 본체.

놈들은 단 한시도 쉴 틈이 없어 보였다.

레아가 분개하며 물었다.

“대체 누가.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인 건가요!”

“피, 피에트로 교장께서 필사적으로 범인을 알아보고 있지만 당장은 알아내긴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얼떨결에 고개 숙여 사과까지 하는 교수를 착잡하게 쳐다본 레아가 말했다.

“대책은 있습니까? 여기서 농성해봤자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결사대를 조직할 겁니다.”

“결사대요?”

“예. 내벽의 방어 시설로 버티면서 놈들의 주의를 잔뜩 끌었을 때. 실력자들로 구성된 결사대가 돌파해 악마의 본체를 칠 겁니다.”

레아는 턱에 손을 괴고 곰곰이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별로 성공률이 높은 계획은 아니었다.

당장 저 악마의 본체를 상대하는 데에 얼마만큼의 전력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

게다가 악마의 본체를 노리기 위해 핵심 전력이 모두 빠져나가면, 내벽에 있는 다른 학생들이나 일반인들도 위험해진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야.’

외부와 연락도 안 되고. 성벽을 이용해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시간은 이쪽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레아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결사대에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 하고 있었습니다. 피에람 양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각 학년에서 가장 뛰어난 서너 명.

그리고 전투에 능숙한 교수들로 이뤄진 20여 명 규모의 결사대가 금방 모여들었다.

레아는 결사대원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한가락 하는 인물들.

그중에서도 자신만만하게 몸을 푸는 라이젤과. 홀로 조용히 앉아 검을 쥐고 있는 루크가 눈에 띄었다.

이안에게 패배한 이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루크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로 초췌했다.

“…….”

플로라와 루크의 눈이 마주쳤다. 플로라는 팍 인상을 찌푸렸고, 루크는 무덤덤한 얼굴로 읊조렸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야. 멍청아.”

“아무 말도 안 했거든? 그리고 너처럼 어정쩡한 실력을 가진 놈이 끼면 오히려 방해만 되는 거 아니야?”

플로라의 신랄한 말에 루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읊조리듯이 말했다.

“내버려 둬. 죽든 살든, 발목은 안 잡을 테니까.”

“너……!”

더 따지고 들려는 플로라였지만 그럴 시간도 없다.

쾅! 콰쾅!

굉음과 비명.

악마의 군세가 내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악마에게 넘어간 사람들이 앞장서서 공격해오기 시작했어!”

“망설이지 말고 공격해!”

“나, 난 못 하겠어…….”

악마의 권속이 된 인간들이 쏘아내는 마법이 성벽을 두들기고.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선뜻 공격하기도 힘들었다.

아무리 경쟁하는 사이였어도, 같은 공간에서 수학하고 생활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공격하는 건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레아는 이를 악물었다.

‘도우러 가고 싶지만…….’

그들의 임무는 악마의 본체를 치는 것.

어쭙잖게 도와주러 갔다가는 그나마 남은 조금의 가능성도 날아가 버릴 수 있다.

결사대원들은 성벽에서 애써 신경을 끄며, 계획을 세워나갔다.

“말을 타고 갈까? 그편이 돌파력이나 속도에서는 압도적이잖아.”

“아니. 중간에 악마에게 넘어갈 확률이 높아. 낙마라도 해서 대열에서 낙오하면 그걸로 끝이야.”

“저 어둠은 마법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었어. 마법의 위력은 비슷한데, 효율 자체가 엄청나빠진다고 해야 하나.”

“그럼 모두 달려서 돌파할 수밖에 없겠네. 그럼 선두에는 4학년 둘이 두꺼운 갑옷을 입고 달려나가면서…….”

계획은 순식간에 세워졌다.

애초에 거창하게 고민할 정도로 복잡한 계획도 아니었고.

남은 건 이제 타이밍을 재는 것뿐.

적의 공세가 가장 치열할 시기.

그 시기에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야 했다.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은 죽겠지.’

승산은 높지 않다.

생존 확률은 더더욱 낮다.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이는 없었지만, 다들 조용히 사색에 잠겨 있었다.

아마 홀로 신께 기도하거나, 마지막으로 인생의 기억들을 정리하는 것이리라.

그때. 레아의 눈에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플로라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

“피에람 양. 혹시 찾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예? 아, 그……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람이 무사한가 궁금해서요.”

그제야 레아는 플로라가 누굴 찾는지 깨달았다.

‘이안…….’

가장 실력이 뛰어나고. 가장 용기있는 자들이 모인 결사대다.

이안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도 결사대에 합류했을 것이다.

‘죽었나?’

레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인정한 사내다.

그 정도 실력으로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을 리 없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다 한 가지 암울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차라리 죽었다면 오히려 나을 수 있어. 만약 악마에게 홀려 밑으로 들어갔다면…….’

침묵과 함께 레아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사색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결사대의 지휘를 맡은 교수가 일어나 외쳤다.

“빌어먹을. 너무 빠르잖아! 생각보다 더 공세가 거세다! 슬슬 준비해야 해!”

성벽을 이용해 학생들이 필사의 방어를 하고 있었지만, 스멀스멀 기어온 어둠이 성벽을 타고 오르는 순간 상황이 달라졌다.

모두가 저 어둠에 노출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잘 알았다.

‘농성하는 학생들 중에서도 배신자가 나와 버리겠지.’

성벽 위에서 횃불의 빛이나 신성마법으로 어둠을 쫓으려 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수준.

때가 왔음을 직감한 결사대가 하나둘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지휘를 맡은 교수가 사제이기도 한 신학 교수에게 부탁했다.

“부디, 마지막으로 기도해주시죠.”

신학 교수는 둥그런 은색 고리가 꿰어진 목걸이를 붙잡고 짧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부디 당신의 어린양들을 지켜주시고, 거대한 악을 마주하더라고 그 마음속 정의가 꺾이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설령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일지라도, 끝까지 그 긍지만은 잃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교수의 기도와 함께 신성한 빛이 결사대원의 몸에 서렸다.

공포는 사라지고, 용기가 샘솟는다.

신성력의 놀라운 효과에 모두가 힘차게 무기를 쥐었고.

드르륵.

마침내 성문이 내려갔다.

“자, 가자!”

선두를 시작으로 결사대가 달렸다.

거의 박살 내다시피 해서 무리하게 연 성문을 밟고 해자를 건넜고.

최후열의 사람이 다리 겸 성문을 산산이 조각내버렸다.

“캬악!”

“빌헬름! 동료들을 두고 어디로 도망치는 거냐!”

“죽어!”

곧장 결사대를 향해 공세가 퍼부어졌다.

개중에는 결사 대원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까지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소름끼치고 끔찍한 경험.

악마는 인간의 마음속 빈틈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결사 대원은 없었다.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선두가 길을 뚫었고.

그 뒤를 나머지가 마치 한 몸처럼 뒤따랐다.

쾅! 콰직!

괴수든. 인간이었던 무언가든. 이곳에 이들을 막아낼 것은 없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 특유의 절박함과 의지 덕일까?

아니면 강한 마음의 힘의 발현일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결사대원의 속도는 생각보다도 빨랐다.

혹여라도 어둠이 들어갈라. 입조차 굳게 다문 결사대가 맹렬하게 악마의 본체를 향했다.

사방이 깜깜한 이곳에서도 유독 더 어두운.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어둠의 거인이 천천히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죽어라 악마야!”

누가 먼저랄 세도 없이 무기를 들고 달려나갔다.

이곳까지 생각보다 순탄하게 왔다는 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어쩌면 악마의 수준이 생각보다 더 낮은 걸 수도 있다. 아니면 이곳의 모두가 생각보다도 더 강한 걸 수도 있고.

어쨌든 이 끔찍한 싸움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싶다.

레아도 고양감과 함께 달려나가려던 그때.

돌연. 앞서나가던 결사대원들의 발아래에 그림자가 짙어졌다.

그리고 결사대원들의 발이 그림자 속으로 푹 빠졌다.

“뭣……?”

놀랐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림자 속에 빠진 결사대원들의 발은 그대로…….

서걱.

너무나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끄아악!”

전열을 맡은 결사대원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마치 타이밍을 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림자 속에서 솟아나는 악마의 권속들.

눈을 새빨갛게 빛내는, 한때는 같은 학생이었던 자들이 무기를 꼬나쥐고 달려들었다.

전위를 대부분 잃어버린 후위들도 자연스레 위기에 처한다.

레아가 외쳤다.

“당황하지 말고, 일단 모여요!”

단 한 수.

단 한 수만에 악마는 전세를 뒤집어 버렸다.

악마는 인간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훤히 꿰뚫어 보았다.

초조한 마음은 시야를 협소하게하고, 자신감은 자만과 다름없다.

방심이라는 칼날이 결사대의 심장을 찌른 셈이다.

게다가 굳이 발목만 자른 것도 효과적이었다.

위기에 빠진 동료를 구하기 위해 피해가 더 커졌기 때문.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레아의 외침에 남은 결사대원들이 몰려들었다.

부상자는…… 지금은 포기해야 했다.

“일단 뭉쳐야 합니다! 그리고 계획대로 악마를 죽여야 합니다!”

전력이 급격하게 줄었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다.

뚫어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외치는 레아도 자신이 없었다.

발목이 잘려 신음을 흐리는 선배가. 마법을 맞고 피를 쏟아내는 교수가. 대신 공격을 맞아주다 중상을 입은 동기가 눈에 밟혔다.

도무지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공세에 맹렬하게 저항하던 플로라의 불꽃도 점점 사그라 들고.

레아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 둘 늘어가며.

악마의 본체가 그 거대한 몸을 움직여 마무리를 준비하고.

사제가 마지막으로 신의 이름을 읊조리던 그때.

한 줄기 섬광이 어둠을 가르고 악마의 본체에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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