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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63화 (64/222)

63. 자유의 도시

주먹보다 조금 커 보이는 가죽 자루. 언뜻 봐서는 평범하다.

하지만 자루의 겉 부분에 새겨진 붉은 자수가 왠지 낯이 익다.

이안은 자루의 입구를 조심히 열어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검다.’

부자연스러운 그림자 때문에 자루 안의 내용물을 볼 수가 없었다.

정령을 소환해 그 안에 빛을 비춰도 마찬가지.

이안은 자루를 반대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텅!

“……!”

자루 안에서 기다란 쇠막대기가 떨어져 나왔다.

주술에 사용되는 도구인지, 막대기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쇠막대기 따위가 아니다.

그 쇠막대기가 자루보다 명백히 크다는 점이다.

이안은 이 물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요술 주머니!’

무릇, RPG 게임의 가방. 그러니까 인벤토리에는 아이템을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나, 무게에 제한이 있기 마련이다.

크레이 사가에서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은 짐은 캐릭터의 속도를 떨어트리고, 쉽게 피로하게 만든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요술 주머니다.

‘암시장 같은 데서나 운 좋아야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여기 떨어져 있다니…….’

침을 꿀꺽 삼킨 이안은 적당한 물건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공간 주머니에도 격이 있는 법이다.

최상급의 아공간 주머니는 조금 과장해서 집 한 채도 집어넣을 수 있다.

‘일단 방금 쇠막대기 정도 크기의 물건은 넣을 수 있다는 거야. 좀 큰 물건을 찾아볼까.’

요술 주머니는 특수한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신축성이 뛰어났다.

주머니의 입구를 양손으로 잡고 최대한 잡아당기니, 챙겨온 코덱스를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났다.

가까스로 코덱스를 입구에 밀어 넣자, 주머니가 순식간에 낡은 책을 먹어치웠다.

‘좋아. 일단 코덱스 까지는 들어간다는 거고. 그다음은…….’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이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으로 향했다.

어쩌면 성검까지 집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시험해보자.’

이안은 쭈구려 앉아 검의 끝부분부터 요술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자그마한 요술 주머니는 자기보다 몇 배는 더 긴 성검을 거뜬하게 받아들였다.

성검의 손잡이 부분이 입구에서 조금 걸렸지만, 이리저리 뒤트니 결국 전부 안으로 들어갔다.

이안은 만족스레 요술 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이거, 꽤 괜찮은데요? 무게가 하나도 안 느껴져요.’

상시 몸에 지니고 다니던 물건들을 집어넣으니, 몸이 훨씬 홀가분해졌다.

이러면 체력을 더 아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안. 물건을 빼낼 때는 어떻게 할 건데요?]

‘그야…….’

이안은 주머니의 입구를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길할 정도로 짙은 어둠.

솔직히 저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물건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물건을 꺼낼 때마다 자루를 뒤집어 그 안에 있는 모든 걸 쏟아내야 한다는 건데…….

[꺼내야겠죠? 하다못해 검만이라도.]

‘넵.’

이안은 성검을 꺼내 다시 허리에 찼다.

바로바로 꺼내 써야 하는 무기는 역시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게 맞았다.

‘이 정도면 중하급 정도 등급의 주머니려나요? 그래도 뭐. 상상도 못 했던 소득이에요.’

원래는 구하고 싶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런 물건을 돈도 한 푼 안 내고 얻었으니, 운이 좋았다고밖에.

“경! 다 둘러봤어요?”

밖에서 들려오는 니라의 부름에 이안은 요술 주머니를 품속에 넣었다.

니라와 용병들은 이미 주위를 모두 둘러봤는지. 품에 이것저것 잡다하게 들고 있었다.

한 용병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 친구들. 별로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죄다 꺼림칙하고 쓸모없는 물건들뿐이고 정작 돈이나 값나가는 건 별로 없어요.”

그의 말마따나.

용병의 손에 들린 것들은 별 볼 일 없는 것들뿐이었다.

이안은 괜스레 찔린 마음에, 요술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헛기침했다.

“흠흠.”

그런 이안을 잠시 이상하게 쳐다본 니라가 말을 받았다.

“아마 도시에서 쫓겨날 때 재산을 다 못 챙겨 나온 거겠죠. 그리고 돈이 부족하니까, 이런 대규모 상단 행렬을 습격한 거 아닐까요?”

“하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디론 가로 사라졌던 나바혼이 다시 돌아왔다.

오른손에 들려 있던 마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바혼의 피부에 남은 불그스름한 핏자국이 마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니라는 밝은 어조로 물었다.

“나바혼 님! 원하던 건 다 들었나요?”

“대충은 알아냈다.”

“그거 다행이네요. 근데 저, 나바혼 님의 고향에 관해서도 관심이 있는데…….”

나바혼이 보기 드물게도 얼굴을 찌푸렸다.

니라가 한번 매달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경험으로 아는 듯했다.

“어서 돌아가지.”

그렇게 말한 나바혼은 앞장서서 상단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

휘오오오.

거센 눈보라가 불어닥치는 설산.

보이는 거라고는 눈과 암석뿐인 이곳에, 주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가 걸어 다니고 있었다.

“핍!”

환하게 빛을 내는 매…… 라기보다는 병아리.

울음소리며 빛이며 너무나도 눈에 띈다.

게다가 딱히 위험해 보이거나 자길 지킬 수단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포식자에게 이만한 먹잇감이 또 있을까?

“커어엉!”

소복이 쌓인 눈 속에 숨어 있던 검치호랑이가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굶주린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단 두 걸음 만에 당도한 검치호랑이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딱!

“컹?”

분명 제대로 아가리에 넣고 씹었다. 한데, 씹는 맛이 전혀 안 느껴졌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검치호랑이가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푹!

어디선가 뻗어온 검치호랑이의 심장에 이안의 검이 박혔다.

검치호랑이는 몇 번 발을 허우적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움직임을 멈췄다.

이내 그 시체도 입자가 되어 스르르 사라지고.

하얀 대지 위에는 핏자국만이 남았다.

눈 속에 숨어 있다 튀어나온 이안은 머리 위를 털어내며 말했다.

“확실히. 미끼로서의 역할은 훌륭하네요.”

“핍.”

빛나는 병아리가 어설프게 날개짓하며 이안의 손 위로 날아왔다.

그 속도는 원시적인 이전 형태보다는 빨랐지만 이네스가 보여줬던 정령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랐다.

이네스가 핀잔을 줬다.

[이렇게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를 미끼로 쓴다니. 가끔 이안에게는 인간의 마음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빛으로 이루어져서 이런 거로는 죽지도 않는 데요 뭘.”

이안은 적당한 나무 그늘로 가 몸을 뉘었다.

코덱스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경관은 짜증 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이번 검치호랑이가 벌써 89번째였다. 앞으로 11종류만이 남은 셈.

실력이 는 어느 순간부터 코덱스 안의 괴수들은 이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환상이라도 진짜에는 못 미치는 법이니.

그래도 이렇게 새로운 기술을 시험하기에는 이보다 더 유용한 곳도 없었다.

“야. 따뜻해져봐.”

“핍!”

이안이 명령을 내리자 병아리의 색깔이 태양을 연상케 하는 오렌지 빛깔로 바뀌었다.

은은한 온기가 이안의 손 위에서 퍼져 나왔다.

이안은 이 상태의 병아리를 ‘태양 모드’라 부르기로 했다.

‘음, 따뜻하긴 해. 근데 태양 모드는 너무 효율이 나빠.’

빠르게 피로가 찾아오는 게 느껴졌다. 아직 이안의 정령술 수준이 높지 않아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심했다.

“야. 이제 힘드니까 그만하고 원래대로 돌아가.”

“핍.”

손 위에 있는 병아리를 괜스레 툭툭 건드는 이안에게 이네스가 말했다.

[이제 형태가 변환했으니, 다음은 감각 공유를 목표하세요. 정령이 멀리서 보고 듣고 느낀 걸 저도 느끼는 거죠.]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일단 서로의 정신이 이어질 정도로 정령과 교감을 더 나눠야겠죠.]

교감이라.

결국, 정령과 친해져야 한다는 말 아닌가?

‘곤란하네…….’

사실 이안은 반려동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나 하나도 살기 바쁜데, 누굴 또 책임진단 말인가.

게다가 이안의 부모님은 치킨집을 하셨다.

그런데 눈앞의 이 병아리를 보자니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병아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얘랑 친해지라니, 역시 잘 모르겠네요.”

[일단 이름부터 지어줘야겠죠. 언제까지 야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부모가 이름을 지어주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에요. 앞으로 자식은 그 이름으로 평생을 불릴 테니까요.]

“부모라니…….”

낯 간지로운 느낌에 머리를 긁적이던 이안은 고민했다.

‘이름이라…… 호식이? 비비? 안 돼. 계속 그런 쪽으로밖에 생각이 안 나잖아.’

[그런 이름은 절대로 안 돼요.]

이네스의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한 부정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쪽으로는 영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머리고 싸매고 고민한 끝에. 이안은 겨우겨우 말을 뱉어냈다.

“너는 그냥 호크라 짓자. 마음에 들지?”

“핍!”

새끼 매니까 호크.

창의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이지만…… 어쨌든 당사자는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

코헨이 보인다.

선두에 선 상인이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도착이다아!”

마녀의 습격 이후로는 꽤나 평탄한 여정이었다.

이런 대규모 무리를 습격할 정도로 강한 괴수는 이 근방에 없었다.

카일이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후우. 드디어 납품할 수 있게 되었군요. 거래처가 존망의 위기라고 어찌나 죽는 소리를 하던지…….”

옆에서 마주 걷던 이안은 마차에 실린 자루들을 슬쩍 뒤집어 보았다.

“무슨 약초 같은 걸 납품하는 건가?”

“건들지 마십시오!”

카일의 호통에 이안이 멈칫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카일이 상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칫하면 독초에 중독될 수도 있습니다. 그, 연금술사들이 별별 재료를 다 다루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 알겠네. 조심하지.”

“어쨌든! 상행에 성공한 만큼 넉넉히 보상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자세한 얘기는 코헨으로 가서 얘기하겠습니다.”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말을 얹지 않아도, 이안의 활약에 대해 카일은 넉넉히 보상해줄 것 같았다.

상단이 도시로 들어섰다.

번화한 도시였다.

또한 더러운 도시였다.

대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기본이 다섯 층 이상이었고.

연금술로 유명한 도시하고 과시라도 하듯. 그 굴뚝에서는 형형색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척 봐도 건강에 좋을 것 같지는 않은 연기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지나다니는 행인들은 부자든 거지든 하나같이 입가에 헝겊이나 마스크를 두르고 있었다.

카일도 마스크를 쓰며 물었다.

“혹시 코헨에는 처음이십니까?”

“그렇네.”

“하하. 그럼 환영합니다. 이곳이 바로 연금술과 꿈, 감옥. 그리고 자유의 도시 아니겠습니까?”

코헨은 매년 제국에 막대한 상납금을 바치는 것으로 그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도시의 유력 가문들이 서로 의논하며 도시를 운영하는데, 자유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이곳에서는 다른 곳만큼 귀족들의 힘이 강하지 않았다.

‘감옥과 자유의 도시라…… 아이러니하네.’

이안은 흘끗 주위를 돌아보았다.

거미줄처럼 나 있는 뒷골목에는 험상궂은 사내들이 풀릴 눈으로 멍하게 앉아 있었고.

거지들의 숫자는 이제껏 가본 도시들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임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네.’

상단이 너른 공터에서 멈췄다.

마차들이 쉬어가는 쉼터 같은 곳이었다.

뭔가 처리해야 할 사항이 많은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카일이 굳이 이안에게 되돌아와 보고했다.

“통행세 문제 때문에 도시에 드나드는 상인은 반드시 이곳에서 검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

“굳이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되네.”

“배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빠르게 멀어져가는 카일의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짐 마차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

와구와구.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를 길고양이 한 마리가 얼굴을 파묻고 먹고 있었다.

빼빼 마르고 상처 입은 고양이였다.

아마 영역 다툼에 밀리고 밀려 거리를 배회하다, 오랜만의 횡재에 주린 배를 채우는 듯했다.

하지만…… 뻥!

길고양이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먀오오옹!”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앙상한 몸이 저 멀리 날아갔다.

고양이를 발로 차 버린 장본인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툴툴댔다.

“왤케 더러운 것들이 많아. 하여간 이놈의 도시는 뭐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머리를 한쪽으로 깔끔하게 넘긴, 다부진 체격에 유달리 다리가 긴 사내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검은색 옷을 입은 사내 십수명이 뒤따랐다.

“그래. 오랜만에 대규모 상단이 들어왔다고?”

사내의 질문에 뒤따르던 이가 얼른 대답했다.

“예. 들리는 얘기로는 늪의 마녀들을 처리하고 왔나 봅니다.”

“마녀? 하여간 그년들은 도움이 되는 게 없어요. 그래서. 어느 공방으로 납품되는 물건인데.”

“여러 상단이 섞여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카일 상단은 레이브 공방과 계약한 듯합니다.”

“그으래?”

사내가 씨익 웃었다.

“그럼 시비 좀 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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