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64화 (65/222)

64. 자유의 도시(2)

길고양이를 걷어찬 사내가 오기 바로 조금 전.

이안은 나바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마녀들의 어머니가 사라진 곳으로 갈 거라고?”

“해야 할 복수가 있다. 은혜는 그 후에 갚겠다. 미안하다.”

“아니. 딱히 미안할 건 없고…….”

이안이 손사래를 치자, 나바혼의 심경이 바뀌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역시 은혜를 먼저 갚겠다. 복수보다 은혜를 우선시하는 게 우리 부족의 전통이다.”

“아니 은혜랄 것까지야..... 뭐 어떻게 갚을 건데.”

“모른다.”

나바혼은 즉답했다.

“그래서 너를 따라다니겠다. 그러다 보면 내가 도울 일도 생기겠지.”

“아니…….”

이안이 난색을 표했다.

나바혼과 함께 다닌다니.

분명 전투에 있어서는 큰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나바혼은 너무 눈에 띄었다.

같이 다니면 은밀한 행동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안은 필사적으로 나바혼을 구슬렸다.

여기서 설득하지 않으면, 도무지 그 고집을 꺾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복수를 우선해야 하지 않겠어? 나한테 은혜는 어…… 나중에 갚으면 되잖아.”

“나중?”

“그래 인마. 아니면 좀 물질적인 방식으로 갚아도 되는데. 어. 생각해보니 그게 좋겠다.”

이안은 손가락을 구부려 동전 모양으로 만들었다.

적당한 돈이라면 충분한 보답이 될 터.

나바혼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이해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잘 알았다.”

“그치? 그럼…….”

“내가 지닌 것들 중 가장 가치 있는 걸 원하는 거군.”

아무래도 나바혼은 잘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보다 못한 니라가 끼어들었다.

“저기 나바혼. 이안 경은 그냥 돈을 원하시는…….”

“무슨 소리!”

“윽!”

나바혼의 고함에 니라가 귀를 막았다. 드물게도 화난 표정의 나바혼이 말했다.

“이 정도 사내가 내 은혜에 대한 대가로 겨우 돈 따위를 원했다고? 그건 내 은인을 모욕하는 거고, 나를 모욕하는 거다! 둘 다 참을 수 없는 일이지!”

“죄, 죄송합니다아.”

니라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묘한 얼굴로 서 있던 이안에게 나바혼이 동의를 구했다.

“내 말이 맞지 않나?”

“…… 물론이지. 날 뭘로 보고. 난 그런 속물적인 사람이 아니야.”

나바혼은 품을 뒤져서 연두색 나뭇잎을 건네주었다.

묘하게 기분 좋은 향이 나는 잎이였다.

“이게 뭐야. 차 끓여 먹을 때 쓰는 건가?”

“우리 부족의 어머니 나무에서 따온 잎이다.”

“…… 어쩐지 색깔이 우아하더라니.”

나바혼은 굳은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내게 가장 가치 있는 물건이다. 미안하다. 나머지 은혜는 나중에 갚겠다.”

“아니,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면…….”

“너희들에게는 별다른 효용이 없더라도 나중에 분명 가치 있는 일에 쓰일 수 있을 거다.”

너희란 건 숲의 종족이 아닌 인간을 지칭하는 듯했다.

여기서 더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이안은 감사히 받아들였다.

“난 이 정도로 충분하지만…… 잘 써볼게.”

그 뒤로 셋은 서로의 이후 여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나바혼은 마녀를 찾아 동쪽으로 떠날 것이고. 니라는 그런 나바혼에게 한참을 졸라, 겨우 동행하는 걸 허락받았다.

그때.

“먀오오옹!”

어디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검은색으로 복장을 통일한 무리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야. 제대로 물건이 왔네?”

“하, 함부로 다가오시면 안 됩…… 컥!”

사내가 단검을 번개처럼 뽑아 손잡이로 상인의 명치를 찔렀다.

말리려던 상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사내를 알아본 몇몇 상인들이 외쳤다.

“꺽다리 마일로!”

“뭐야. 방금 그거 누가 말했어.”

마일로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상인들을 잔뜩 째려보았다.

그 모습에서 이안은 익숙함을 느꼈다.

‘게임에서나 똑같구나.’

꺽다리 마일로.

코헨 스토리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일단 코헨에 오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놈이다.

게다가 조우시에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싸우게 된다.

그도 그럴게, 마일로는 성격이 매우 더러웠으니까.

마일로가 짐 마차들 사이를 걷다가, 만만해 보이는 상인에게 말했다.

“용케 늪을 지나 여기까지 오셨구만. 잭의 따까리 놈들도 할 땐 한다 이건가. 야. 니들 대가리 어딨어.”

“카, 카일 님은 통행세 문제 때문에 자리에…….”

“그래? 뭐, 상관없으려나?”

마차를 둘러보다, 이내 귀찮아졌는지. 마차중 하나에 털썩 걸터앉은 마일로가 말했다.

“여기 있는 것 중에서 팔 수 있는 건 다 우리한테 팔아. 값은 적당히 쳐줄 테니까.”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여기 있는 물건들은 이미 레이브 공방과 계약된 물건이오!”

상인들의 반발에 마일로는 귀를 후비며 으르렁댔다.

“쯧. 누굴 멍청이로 아나. 계약한 물건 외에도 여분 꿍쳐놨을 거 아냐.”

마일로의 지시에 맞춰 그 수하들이 상인들을 둘러쌌다.

용병들은 그 모습을 보며 눈치만 살필 뿐, 나설 생각을 하는 이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호위 임무는 코헨에 도착하기까지다.

이미 코헨에 도착했고. 임무는 끝났는데 굳이 목숨 걸고 싸울 필요가 어딨겠는가.

그 점을 잘 아는지 마일로는 껄렁거리며 말했다.

“거 용병 형씨들은 옆으로 물러나. 괜히 다칠라.”

용병들은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 모습에 상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니. 도시에서 대놓고 저러는데 경비병은 어디 간 거야.”

“자네는 코헨에서 경비병을 찾나? 이곳에서는 흔한 일이야.”

“그럼 매번 이런 일을 겪는 겁니까?”

“보통은 여러 조직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괜찮은데…… 다른 조직은 뭐 하는 거야?”

상인들이 웅성대는 사이, 마일로의 부하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자자. 서로 좋게좋게 가자고. 대화로 해결하는 게 좋잖아. 어디보자…… 음?”

기세 좋게 다가오던 마일로가 멈칫했다.

용병들 중에서도 아직 피하지 않은 둘이 있었다.

게다가 생긴 것도 독특했다.

마일로는 떨떠름하게 이안과 나바혼을 쳐다보았다.

“뭐야 이건. 나무 인간?”

“두목. 숲의 종족이라고 합니다. 아마 유명한 용병인 나바혼일 겁니다.”

안경 낀 부하의 말에 나바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뭐. 싸우지 말라는 거야?”

“아무래도 금패 용병이니…….”

“하. 나 참 어이가 없네.”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빗어넘긴 마일로가 말했다.

“어이 나무 인간. 거기서 비켜!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난 내 일을 할 뿐이다.”

“어차피 코헨까지 호위하는 거일거 아니야. 왜 사서 고생해?”

“신의에 어긋난다.”

“하! 요즘 시대에 신의는 얼어죽을…….”

나바혼과는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는지, 마일로는 단검의 끝을 이번에는 이안에게 향했다.

“넌 왜 안 비키는데. 빨리 비켜.”

“내가 왜.”

퉁명스런 대답에 마일로의 얼굴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 이것들이 근데 보자 보자하니까 미쳤나?”

그는 썩 인내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마일로가 턱 끝으로 이안과 나바혼을 가리켰다.

“치워.”

“예, 두목.”

건장한 사내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들고 있는 무기는 각각 달랐다.

단검, 몽둥이, 한손검, 메이스.

언뜻 봐서는 무질서하고 통일감도 없다.

하지만 이안은 그들의 걸음걸이에서. 호흡을 분배하는 방식에서. 그리고 무기를 쥐는 법에서 잘 훈련된 전사의 면모를 보았다.

이네스도 감탄을 흘릴 정도.

[빈틈투성이 것처럼 보이지만, 발을 디디는 것만 봐도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에요. 분명 전투 경험이 풍부할 거예요.]

‘스트릿 출신들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병이라 이거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놈들은 제대로 된 살인자들이다.

‘적당히 상대해보죠.’

처음 도시에 오자마자 한낮의 대로변에서 칼부림을 벌일 수는 없는 법.

이안이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자, 다가오던 사내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자기를 안 죽일 거라 생각 하는 건가?’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서 우스울 지경이군.’

선두에 선 사내가 나바혼에게 눈짓했다.

이안은 자기가 맡을 테니, 척 봐도 강해 보이는 나바혼에게 전력을 집중하라는 의미였다.

이견은 없었다.

사내들이 두 패로 갈라졌다.

여덟이 나바혼에게 붙었고. 남은 하나가 이안에게 왔다.

사내는 이안을 보며 여유롭게 단검을 던졌다 잡았다를 반복했다.

“코헨은 처음인가?”

뜬금없는 사내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인데. 왜. 뭐 도시 가이드라도 해주게?”

“그냥 충고를 하자면. 코헨에서는 언제나 전력을 다해야 오래 산다…… 고!”

휙.

사내가 갑작스럽게 단검을 저 위로 던졌다.

이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단검을 따라 위로 향했다.

그 사이.

소매에서 찌르기용 단검. 스틸레토를 꺼낸 사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최적의 경로로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는 스틸레토.

‘찔렀다!’

사내는 그렇게 확신했다.

역방향으로 꺾인 자신의 팔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득.

“어……? 으, 으아악!”

고통이 뒤늦게 찾아왔다.

양팔을 교차해 사내의 팔을 박살 낸 이안은 곧바로 멱살을 쥔 뒤. 바닥을 향해 메다꽂았다.

퉁!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사내의 움직임이 멎었다. 손끝만 가끔 경련할 뿐.

이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만 당분간. 아니 어쩌면 평생 몸 성히 걸어 다니기는 힘들 것이다.

“뭐. 어쨌든 충고는 고마워.”

아무리 실전으로 단련되었어도 타고난 신체 능력이 다르면 한계는 있는 법.

느긋하게 상황을 관전하던 마일로가 감탄을 흘렸다.

“오. 좀 하는데? 쟤는 누구야. 쟤도 유명한 용병이야?”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거, 도핑 안 하면 애들로는 상대도 안 되겠는데?”

“…… 도핑시킬까요?”

짝!

마일로가 부하의 뺨을 때렸다.

“병신아, 미쳤냐? 대낮부터 약을 빨자고? 다 같이 사이좋게 감옥에 끌려가자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얻어맞은 부하가 고개를 조아리고.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마일로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아내는 사이.

그 사이에도 마일로의 수하들은 팔다리가 하나씩 부러지고 있었다.

이안도 이안이지만, 나바혼의 괴력은 평범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었다.

“커억!”

“악!”

한번 기다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얻어맞은 사내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그렇게 싸우다 보니 다가오던 사내들을 모두 처리한 뒤였다.

한가롭게 서 있는 마일로의 뒤에는 아직 부하들이 많았지만.

마일로가 말했다.

“실력도 좋고 신의도 지키는 용병이라. 마음에 들어. 마침 너희들 같은 놈들이 필요한 참인데, 어때. 같이 일하나 안 할래? 돈은 넉넉히 줄게.”

갑작스러운 영입제안에 나바혼은 고민 없이 답했다.

“싫다.”

마일로는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이제야 오셨군.”

저벅저벅.

길의 반대편에서 이번에는 짙은 회색으로 옷 색깔을 통일한 사내들이 걸어왔다.

선두에 선 비쩍 마른 사내는 잔뜩 열이 올라 있었다.

“마일로! 이 치졸한 새끼! 이런 식으로 우리 영역을 침범하려 해?”

“에이, 오늘은 텄다. 쓱싹하고 가려고 했는데. 애들아 돌아가자.”

마일로가 돌아서자, 비쩍 마른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이 사달을 내놓고 가긴 어딜 가!”

“안가면. 여기서 뭐 싸우기라도 하게?”

고개만 돌려 서늘하게 말하는 마일로.

사내는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마일로가 이안과 나바혼에게 말했다.

“너희 둘은 기억해 둘게. 얼굴은 안 보여도, 대충 눈빛 보면 기억할 수 있어. 또 보자고.”

마일로는 왔던 길로 똑같이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웬 들개가 바닥에 있는 쓰레기를 핥아먹고 있었다.

“에이씨. 거리에 쥐약을 풀던지 해야지.”

“켕!”

들개를 힘껏 걷어찬 마일로는 뒷골목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사람들은 닭 쫓던 개 마냥 멍하니 그 뒷 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

“요컨대, 지금 코헨의 조직 구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건가?”

“아, 예. 그렇습니다.”

그날 저녁.

꼭 보답하고 싶다는 카일의 간청에 참석한 식사자리에서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원래 코헨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곳인가? 내가 듣기로 통치 가문들이 있는 거로 아는데?”

침으로 입술을 적신 카일이 설명했다.

“여섯 가문이 통치하던 것도 벌써 옛날 일이죠. 수십 년 전에 여섯 가문에서 제타 가문이 퇴출되고, 세력 싸움이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아만 가문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다른 명문가들은 그 세가 크게 줄었습니다. 뒷골목에서 명맥을 유지할 뿐이죠.”

코헨에는 여러 세력이 있다. 가장 위에 있는 건 통치 가문이자 도시의 시장을 배출한 아만 가문.

그 아래 있는 건 연금술사 공방에 뒷골목 조직. 얼마 전에 쫓겨났던 마녀들.

그 외의 여러 군소 단체들이 싸우고 연합을 맺으며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자기 뒤를 봐줄 수 있는 조직에 상납금을 바쳐야 코헨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가문간의 균형이 깨지고 난 이후로 수십 년이 지나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듯싶었는데…… 마녀들이 축출된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도시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듯하더군요. 대체 도시가 어찌 될는지.”

혼자서 주저리 말을 늘어놓던 카일이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이거, 너무 제 얘기만 한 게 아닌지…….”

“흥미로운 얘기였네. 나도 재밌게 들었어.”

“그러면, 혹시 경께서 왜 이 도시에 찾아오신 이유도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비밀 임무라도…….”

딱히 숨길 이유는 없었다.

이안은 검집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카일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이 도시 지하에 거대한 감옥이 있다는 걸 들었네.”

“아, 예. 도시의 명물 중 하나죠.”

“난 그 감옥에 관심이 있어.”

왜냐하면, 그 감옥의 구석에는 성검의 조각이 묻혀 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