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계약을 하러 왔다
뒷골목에서 몇 달간 굴러본 이안은 이 바닥의 생태에 대해서 잘 알았다.
이들을 상대할 때는 딱 하나만 명심하면 된다.
‘얕보이면 잡아 먹힌다.’
이들은 강자한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한테는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다.
그렇기에 조금 거칠더라도 초장부터 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
“넌 뭐야 이 새끼야?”
의자에 앉아 있던 덩치가 그 흉악한 얼굴을 찌푸렸다.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자연스레 다가가 양손으로 놈의 멱살을 쥐었다.
“어어?”
덩치의 몸이 허공에 떠 올랐다.
생각보다도 강한 이안의 힘에 크게 놀란 듯했다.
이안은 버둥거리는 덩치를 집어서 문을 향해 힘껏 던졌다.
“으아아악!”
쾅!
덩치와 부딪힌 문이 맥없이 부서졌다.
부서진 틈으로 기다란 직사각형 탁자에 회색 옷을 입은 사내들이 분위기를 잡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철퍽.
“으으으…….”
탁자 위에 멋들어지게 엎어진 덩치가 신음을 흘렸다.
사내들의 시선이 잠시 덩치한테 머물렀다가 이내 이안에게 향했다.
“…….”
침묵.
누구 하나 일어서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건 이들이 잘 훈련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상황 파악이 안 돼 어이없어할 뿐인 건가.
이안은 박살 난 문을 당당히 통과해 방에 발을 들였다.
‘이제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네.’
상석에 앉아 있는 저 대머리 사내의 얼굴 정도는 게임에서도 봐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하들의 얼굴도 낯이 익었다.
오전에 마일로가 횡포를 부리자 뒤늦게 달려왔던 놈들이었다.
이곳의 보스로 보이는 사내. 대머리 잭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건 또 누구 손님이야. 쟤 아는 사람 있어?”
잭이 둘러보자 부하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생겼으면 잊을 리가 없는데, 처음 봤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
이안은 한번 보면 잊기 힘든 외모였다.
부하들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처음 본 거겠지.
잭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처음 본 놈이 다짜고짜 이렇게 찾아왔다는 거야? 문을 박살 내면서? 너희들이 뭐 잘못한 거 아니야? 사기를 쳤다거나?”
“진짜 아닙니다.”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의외로 다짜고짜 덤벼들지 않고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하긴. 커다란 덩치가 하늘을 날았는데 무작정 싸우기보단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싶을 터다.
그제야 대머리 사내가 이안을 노려보았다.
“너 뭐야. 뭔데 혼자 쳐들어오는 거야. 뭐 잘못 먹었어?”
“대머리 잭. 너랑 거래하러 왔다.”
“…… 대머리.”
잭이 얼굴을 찌푸렸다.
멸칭을 들으니 열이 오른 듯했다. 잭이 중얼거렸다.
“아. 그래. 대충 돌아가는 꼬라지를 알겠군. 이 정도로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놈들은 참 오랜만인데…….”
잭이 부하들에게 턱짓했다.
“나랑 거래하려고 찾아온 거면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거겠지. 어디 구경 좀 해볼까.”
부하들 중 절반가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좁은 방 안.
사내들은 두 명씩 차례로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흐아압!”
곤봉과 톤파가 각각 이안의 머리와 무릎을 노렸다.
제법 괜찮은 움직임이었지만…….
‘오전에 봤던 마일로 부하들보다는 수준이 떨어진다.’
굳이 검을 뽑지 않았다. 사람이 가득 찬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검의 이점을 살리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이안은 어디까지나 이곳에 거래를 하러 온 거다.
적절한 무력을 보여 거래에서 우위에 서는 건 좋지만. 잘못해서 선을 넘어 버리면 원수가 될 뿐이다.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안은 자세를 낮추고 앞서 오던 놈의 발목을 걷어찼다.
“억!”
생각보다 빠른 일격에 사내가 고꾸라지고, 뒤따라오던 놈까지 덩달아 균형을 잃었다.
퍽!
그대로 일어나며 상대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은 이안이 스텝을 밟아 뒤로 거리를 벌렸다.
둘을 쓰러트리는데 걸린 시간은 단 한 호흡.
잭이 뜨끈한 차를 마시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법 실력이 있네. 1단계 도핑해.”
잭의 지시에 사내들은 품에서 붉은 약병을 꺼내 마셨다.
목울대가 꿀렁이고 약을 삼키자,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뿌득.
약을 마신 사내의 근육이 부풀었다.
혈관 속 피가 빠르게 도는지 피부와 눈이 붉게 변하고, 이안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게 코헨이 짜증 나는 이유지.’
코헨의 사내들은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연금술로 만들어낸 ‘도핑제’가 그중 하나였다.
“하아아!”
약을 마신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너클과 단검.
이안은 뒤로 물러서는 대신 역으로 거리를 좁혀, 선두의 턱에 주먹을 박아 넣으려 했다.
하지만…….
팡!
막혔다. 내질렀던 주먹이 사내의 손에 가로막혔다.
“이야…….”
이안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다니. 힘도 힘이지만 사내의 반사 신경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감탄할 시간은 없었다.
이안이 멈칫하는 사이. 단검이 직선을 그리며 이안의 급소를 노렸다.
자세히 보니 날 끝이 보라색이다.
스치기만 해도 위험했다.
“호크!”
이안의 외침에 환한 섬광이 퍼졌다.
단검을 내지르던 사내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그 틈을 이용해 팔을 잡아채 그대로 꺾어 단검을 빼앗았다.
우득.
“끄…… 빨리 쳐!”
약이 고통도 줄여주는 걸까.
팔이 꺾인 사내는 그럼에도 다른 쪽 팔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이안을 붙잡으려 했다.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면, 뒤에 있는 동료들이 마무리해줄 거라는 믿음이 엿보였다.
이부분에서는 이안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칼날 형제들과는 다르다.’
이안은 노예처럼 부렸던 조직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동료애 혹은 희생정신.
단순히 뒷골목 왈패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이들에게 있었다.
‘생각보다도 더 어려울 수 있겠어.’
어려워도 해낼 수밖에.
이안은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사내를 역으로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퍽!
너클 낀 주먹이 도리어 동료의 등을 강타했다.
당황하는 사내의 얼굴을 빼앗은 단검의 손잡이로 내리쳤다.
순식간에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만 넷.
처음보는 정령의 존재에 상황은 잠시 소강 사태에 접어들었다.
“핍!”
“뭐, 뭐야.”
“병아리……?”
잭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역시 정령을 눈앞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위축되지 않는지, 다시 턱 끝으로 이안을 가리켰다.
다음 순서의 사내들이 물약을 들이마시고, 다시 이안에게 걸어갔다.
그러다가 다시 깨지고, 그다음 사내들이 일어나고의 반복.
하지만 부하들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드는 것과 달리.
대머리 잭은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의 최측근이자 조직의 이인자. 헨리가 말했다.
“대, 대단한 실력입니다. 저 움직임은 저희처럼 마구잡이로 배운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스승에게서 체계적으로 배운 겁니다.”
“나도 눈깔 있어 새끼야. 귀족일까?”
“글쎄요…… 그런 것 치고는 생긴것도 그렇고, 너무 저희들의 싸움 방식에 익숙한 느낌인 거 같은데요.”
실로 그러했다.
잭의 부하들은 침을 뱉거나, 피를 눈에 흩뿌리거나, 고간을 노린다거나 눈을 찌르거나.
그야말로 이기기 위해서 어떤 더럽고 치사한 수라도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 모든 공격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가볍게 대처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안이 아직 성검을 얻지 못했을 때.
이안이 살아남을 때 사용한 게 바로 저런 더럽고 비열하지만, 효과적인 수들이었으니까.
싸우는 바를 유심히 관찰하던 헨리가 눈을 크게 떴다.
“아. 기억났습니다.”
“뭐가.”
“어쩐지 묘하게 낯이 익다 했더니…… 그 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일로 놈들을 상대로 용병 단둘이 싸우고 있었다고. 그중 얼굴을 가린 게 저쪽인 것 같습니다.”
“마일로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그놈?”
“예 맞습니다.”
“흐음.”
잭은 마치 상품의 가치를 파악하려는 상인처럼 이안의 움직임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그 사이에도 부하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단 하나도 이안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헨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제가 나설까요?”
“이길 자신은 있고?”
“2단계…… 아니. 3단계 도핑이라면 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아서라. 약 먹고 병신 될 일 있냐? 그리고 저놈 저거, 실력 전부 드러낸 것도 아니야.”
“예?”
잭은 이안의 허리춤에 걸린 검집을 가리켰다.
그다음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부하들을 가리켰다.
“다 기절만 했을 뿐. 한 명도 안 죽었다. 나와 협상할 여지를 남겨두는 거지.”
“…… 그런!”
“아무래도 우리 생각보다 더 거물이 온 것 같다. 그만!”
잭이 한쪽 손을 들고 외치자 무기를 꺼내려던 사내들이 뒤로 물러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잭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가 꿈틀거렸다.
“쌈질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 이 정도 사내라면 얘기 정도는 들어봐야겠지.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라.”
“하지만 형님……!”
부하들이 반발했지만, 잭의 굳은 눈빛을 보고 이내 질서 정연하게 퇴장했다.
북적북적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휑해졌다.
너른 탁상에 이안과 잭 단둘이 대각선으로 마주 앉았다.
“한잔하겠어?”
“술도 아니고 차라니. 안 어울리네.”
“코헨의 사내들은 모두 차를 즐겨 마시지. 피 속에 있는 약 기운을 조금이나마 내보내 주거든.”
이안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여다보다, 이내 한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이 안에 뭘 탔을 줄 알고.’
코헨에서는 모든 걸 의심해야 한다.
이안의 반응에 잭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중한 친구군. 이름이?”
“이안.”
“그래 이안. 일단 앞서서 꺽다리 녀석을 막아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자칫하면 눈 뜨고 큰 손해를 볼 뻔했지. 카일 상단이 납품하는 레이브 공방은 우리 조직과 꽤나 친한 사이거든.”
이안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실 잭을 도와주려 했다기보다는 마일로를 저지하려고 했던 행동이지만, 구태여 그걸 말할 필요는 없겠지.
차를 홀짝인 잭인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래서. 나와 대체 무슨 거래를 하고 싶길래 이렇게 요란하게 쳐들어왔는지 모르겠군.”
“…….”
이안은 뜸을 들였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원래 게임에서는 감옥의 브로커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1차 과제고. 브로커인 잭의 신뢰를 얻는 게 2차 과제였다.
그 신뢰를 얻는 방법도 쉽지 않다.
조직에 임시로 속해, 수많은 의뢰를 해결하고 개처럼 일하고 나서야 겨우겨우 코헨의 지하 감옥으로 통할 수 있다.
‘근데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지식이 있고 힘이 있는 지금이라면 그 과정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단어를 고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 아래에 있는 감옥에 나를 좀 들여줬으면 좋겠는데.”
잭이 잠시 굳어있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감옥에 가고 싶으면 살인을 하든 도둑질을 하든 해서 잡혀가면 될 거 아니야.”
“다 알고 온 거니까 시치미는 떼지마. 원하는 감옥에, 원하는 물건을 가지고 들어가야 해.”
잭이 입을 다물었다.
예상외의 요구에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 듯했다.
이안은 느긋이 기다려주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뒤. 잭이 침묵을 깼다.
“우선 다른 것보다 그 지옥 같은 곳에 두 발로 걸어 들어가려는 이유를 알고 싶군.”
“찾아야 할 게 있어.”
“…… 가족이라도 수감 되어 있는 건가?”
잭은 이안이 찾으려는 게 사람이라 오해하는 듯했다.
성검에는 이네스의 영혼도 묶여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닐지 몰랐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찾아서. 그다음은 어떻게 할 거야.”
“그것까지는 그쪽이 알 필요 없잖아.”
“…… 코헨의 지하 감옥에서 탈옥하는 건 불가능해. 근 몇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지. 시체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면 말이야.”
잭의 으름장에 이안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거기까지는 알 필요 없다니까.”
“그래. 그렇단 말이지…….”
고심하던 잭이 결단을 내렸다.
“가족을 위해서 스스로 지옥에 걸어 들어간다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
“단. 나도 맨입으로 해줄 수는 없어. 감옥의 간수들은 시장의 가장 충직한 개들이야. 웬만한 대가로는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게다가 지금 같은 시기에, 시장 놈의 눈에 띄는 건 나로서도 부담스러워.”
잭이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직 핵심은 나오지 않았다.
이안이 툭 내뱉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잭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일을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