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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67화 (68/222)

67. 식구

잭이 물었다.

“사실, 요즘 우리 조직이 많이 위태위태한 편이야. 지금 코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나?”

“…… 기초적인 것 정도는.”

“그럼 얘기가 빠르지.”

의자에 몸을 파묻은 잭이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코헨은 여섯 가문이 서로 상의하며 통치했었는데, 한 가문이 방출되고, 무너진 균형 속에서 아만 가문이 다른 가문들을 눌러 버리고 권력을 쥐었지. 여기까지는 아나?”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할 게 줄어 다행이라는 듯, 씨익 웃은 잭이 이어 설명했다.

“다른 네 가문은 비록 밀려났어도 원래 가진 기반으로 각각 사업에 뛰어들었지.”

“왜 아만에서는 그걸 내버려 둔 거지? 나였다면 후환을 안 남겼을 것 같은데.”

“좋은 질문이군. 그건 제국이 언제나 코헨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야. 기회만 생기면 제국의 황태자 놈이 친히 병사를 끌고 우리를 집어삼키러 올걸?”

이안은 코르디스에서 만났던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왠지 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제국이 그렇게 안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득보다 실이 크기 때문이지. 하지만 만약 아만이 다른 가문을 완전히 축출하겠다고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될 거 같나?”

“…… 전력이 약해진 코헨을 제국이 집어삼키러 올 거다 이거지?”

“정답이야.”

요컨대, 제국이라는 외부의 거대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서로 미워도 손을 잡는다는 얘기였다.

그런 기묘한 상황 속에서 아만 가문, 뒷골목 조직들, 연금술사 공방, 상인 연합. 그 외 별 잡다한 세력들은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사특한 주술을 다루는 마녀라든지 하는 단체들도 도시에 자리 잡을 수 있었겠지.

“근데 어느 날 아만 그놈이 미쳤는지, 세력들을 하나둘 몰아내기 시작하더군.”

“마녀가 그중 하나였고?”

“그래. 제일 굵직한 세력이 바로 마녀들이었지. 개인적으로 그 기분 나쁜 년들이 사라져서 속은 후련하다만…….”

잭의 말이 길어질 거 같아 이안이 손을 내저었다.

“지루한 얘기는 거기까지 하고.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는 건데.”

“아만 가문에 맞서 군소 세력끼리 연합하기로 했다. 하지만 누가 세력을 이끌 지가 문제였지. 마일로는 자기 말에 따르라고 했지만 나는 당연히 거절했고…….”

결국,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타협 대신, 마일로의 조직은 힘으로 제패하는 걸 택했다.

그리고 몇 번의 분쟁 끝에 둘 사이의 균형은 깨지고 말았다.

무게추는 마일로에게 기울었고, 잭의 조직은 야금야금 잡아 먹히고 있었다.

설명을 듣던 이안이 물었다.

“승패가 정해졌으면, 그냥 항복하는 게 낫지 않아? 그편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항복하면 마일로 그놈은 제일 먼저 내 목을 자를 거야. 아니, 거기까지는 괜찮아. 내 아래 있는 저놈들. 식구들은 기껏해야 칼받이로 쓰이겠지.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어.”

잭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자기 부하들을 생각하는 저 모습은 진심일까, 아니면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연기일까.

어쨌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얘기였다.

“마일로와의 분쟁에서 내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거네?”

“그래. 눈치가 빨라서 좋군. 한동안 우리 조직에서 지내다가 꼭 필요할 때 세 번. 아니. 딱 두 번만 도와줘. 그럼 감옥이고 뭐고, 원하는 대로 해주지.”

“두 번이라.”

조직 간의 항쟁은 게임에서도 겪는 이벤트다.

원래는 마일로나 잭, 둘 중 하나를 선택해 항쟁에서 승리하는 게 목표다.

마일로를 선택했을 때와 잭을 선택했을 때의 장단점이 다르지만, 보상은 같았다.

조직에서의 높은 위치. 그리고 거기서 더 시나리오를 진행하면 두목을 배신하고 조직의 수장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이안은 다양한 루트를 타 봤지만 지금 상황에 가장 좋은 건 하나였다.

‘감옥에 잠입하기에는 역시 잭 쪽을 선택하는 게 가장 좋았지.’

지금 이안의 목적은 조직 따위가 아니었다.

오로지 성검의 조각뿐.

그 외의 지나가는 일들에 대해서는 사실 그리 관심이 없었다.

‘잭 쪽을 돕는 거로 이미 결정은 났고. 원래 같으면 조직 아래에서 개처럼 굴러야 하지만…….’

그게 단 두 번 도와주는 거로 바뀌었다.

물론, 횟수가 있으니만큼 잭은 꼭 필요할 때만 부탁해올 터다.

그래도 좋다.

이 정도면 충분히 득을 본 셈이다.

“좋아. 요구를 들어주지.”

“그럼 계약 성립이군. 모두 들어와라!”

잭의 외침에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고. 퇴실했던 사내들이 다시 질서 정연하게 들어왔고.

말단으로 보이는 이들이 들어와 엉망이 된 회의실을 청소했다.

잭이 이안을 소개했다.

“한동안 한 식구로 지내게 될 이안이다. 나 다음가는 서열이라 생각하고 깍듯하게 모셔.”

“알겠습니다! 형님!”

사내들이 마치 자로 잰 듯,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잭이 이안에게 물었다.

“출신이 어디야.”

“…… 출신은 왜.”

“코헨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거 아냐.”

영문을 알 수 없어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지냈던 마을의 이름을 댔다.

“…… 노른에서 왔는데.”

“노른? 웨스트 리버 근처에 있는?”

“맞아.”

“멀리서도 오셨군. 어디 보자…… 야 너.”

“네? 저요?”

잭이 말단 하나를 지목하자, 순해 보이는 청년이 답했다.

“그래 너 인마.”

“왜, 왜 그러십니까.”

“너네 사촌이 노른 사람이랑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어?”

“기억해주시고 계셨군요!”

잭의 세심함에 청년이 감동한 듯, 눈물을 글썽였다.

“얘기 들었지? 여기 이 친구가 노른에서 왔다는데, 그러면 너랑은 사실상 동향 선후배라 볼 수 있는 거 아냐?”

“아니.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의 부정에도 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 네가 모셔라. 붙어 다니면서 불편함 없게 하고. 알겠냐?”

“네 형님! 맡겨만 주십쇼!”

“나는 딱히 필요 없는데…….”

거부하려는 이안에게 잭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옆에 데리고 다녀. 귀찮게는 안 할 테니. 필요할 때 심부름할 놈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야 뭐…….”

“어쨌든. 다른 깊은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하고. 기왕 한 배를 탄 거, 어디 한번 잘해보자고.”

잭은 이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제 딴에는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 때문에 흉악할 뿐이었지만.

***

쿠구구구!

광활한 사막의 한복판. 지렁이처럼 생긴 거대한 괴수 한 마리가 땅을 뚫고 나왔다.

“캬아아아!”

데스웜은 흉측한 아가리를 쩍 벌리며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데스웜의 몸통에는 칼이 박혀 있었고, 그 칼에는 이안이 매달려 있었다.

고통을 못 이긴 데스웜이 대가리를 지면에 힘껏 박아댔다.

쿵! 쿵! 쿵!

충격으로 인해 모래가 푹푹 파여나갔지만, 끝끝내 이안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이안은 검 손잡이를 꽉 붙잡은 채. 놈의 체력이 빠질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그러다 마침내 데스웜의 움직임이 둔해졌을 때.

이안은 놈의 몸통에 발을 딛고 올라 서 정신을 집중했다.

‘이 녀석의 약점…….’

벌써 100마리째 괴수다.

다종다양한 괴수와 싸운 경험이 축적되었는지. 이안은 이제 처음 보는 괴수라도 어디가 약점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데스웜의 약점은…… 몸통을 반으로 가르면 죽는다!’

샤악!

이안이 내려친 성검이 데스윙의 가죽을 얕게 베고 지나갔다.

“캬아아!”

공격을 감지한 데스웜이 다시 몸부림치려 했다.

하지만 이안이 한발 빨랐다.

샤악! 스윽!

이안은 같은 자세 그대로. 똑같은 부분을 연달아 베어 나겠다.

절대 뚫리지 않을 것만 같던 단단한 가죽이 서서히 벌어지더니 이내 푸른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 게임의 데스웜한테 독은 없었지.’

이안은 끈적하고 푸른 피를 얼굴에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칼을 멈추지 않았다.

피가 눈에 튀어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원하는 곳을 자르는 건 이제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뒤늦게 데스웜이 머리를 돌려 이안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몸통은 이미 절반이나 잘려, 가까스로 붙어 있을 뿐이었다.

쿠구구구

참다못한 데스웜이나 땅굴을 파고들어가 버렸다.

이안은 구태여 데스웜을 쫓지 않았다.

‘저 정도면 뭐…… 안 쫓아가도 출혈 때문에 죽겠죠.’

이안은 밑바닥에 지친 몸을 뉘었다.

따끈하게 달궈진 모래가 적당하게 기분 좋았다.

‘마지막 괴수라 그런지 더 힘들었네요. 당최 땅굴에서 나오질 않았으니…….’

[비록 괴수라 해도, 수백 년간 이런 곳에 잡혀 있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겠죠. 좋은 일을 한 거예요.]

이로써 코덱스에 갇혀 있던 백 종류 괴수의 영혼은 모두 해방한 셈이다.

이안은 데스웜이 죽기를 기다리며. 호크를 소환했다.

“핍.”

빛나는 병아리가 이안에게 달라붙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소환했건만, 어지간히도 반가운 눈치였다.

이안은 손 위에 호크를 올렸다.

이렇게 짬이 날 때마다 정령술 수련에 매진하곤 했다.

“교감을 나눠서 감각을 공유하라니…… 감조차 안 잡히네요.”

“핍.”

[이미 정령 쪽은 마음을 활짝 연 것 같지만요.]

“제 마음의 문제라는 건가요?”

[요령의 문제일 수도 있고요.]

이안은 눈을 감았다.

손 위의 호크가 발산하는 따스함을 느끼며, 요즘 들어 매일 하는 수련을 했다.

‘감각 공유…… 감각 공유…… 정령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어도, 감긴 눈꺼풀에 사방은 깜깜할 뿐이다.

애초에 쉬울 리가 없는 작업이었다.

나 말고 다른 이의 귀로 듣고, 다른 이의 눈으로 본다는 그 감각을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저 이네스가 가능하다고 하니 잠자코 믿고 따를 뿐.

그렇게 한참을 시간을 보내고 나니, 저 멀리에 흐릿한 형체의 무언가가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이제야 죽었나 보네. 이 지긋지긋한 과제도 끝이다.’

촤르르륵.

바닥의 한 가운데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사막의 모든 모래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공간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안은 호크의 소환을 해제하고. 모래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한동안 이네스와의 수련도 마다하고 코덱스의 과제를 수행했던 만큼, 앓던 이를 뽑은 것 마냥 기분이 후련했다.

그렇게 이안이 소용돌이 속으로 점점 빨려 가던 그때.

하늘에서 흐릿한 형체들이 줄을 지어 아래로 내려왔다.

자세히 보니 익숙한 모습들이다.

이안은 그중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너네 이미 사라진 거 아니었어?”

잠깐이나마 이안과 악마에 관한 대화를 나눴던 뼈다귀 마법사. 리치가 낄낄거렸다.

“이 코덱스. 모든 영혼이 해방되기 전까지는 붙잡아두도록 설계되었더군. 아주 악의적인 놈이야! 어쨌든 이제야 해방이군. 고맙게 됐다!”

그렇게 외친 리치의 영혼은 어느새 저 앞으로 사라져 있었고. 놈이 남긴 목소리만이 아련하게 잔류할 뿐이었다.

그렇게 괴수들의 영혼이 하나 둘. 마치 이안에게 감사 표시라도 하듯, 이안의 몸을 스쳐 지나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혼이 피부에 스칠 때마다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전신의 털끝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

그러다 모든 영혼이 사라지고. 마침내 이안의 차례가 되었다.

이안의 몸은 의식과 함께 회오리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

잠에서 깼다.

이안은 손을 뒤집어 멍하니 쳐다보았다.

‘뭔가 다르다.’

게임에서 코덱스의 과제를 모두 수행할 시 얻을 수 있는 건 ‘괴수의 본능’.

상대하는 적의 레벨을 볼 수 있게 되고, 치명적인 일격을 확률적으로 회피할 수 있게 되는 나름 괜찮은 효과다.

지금은 어떠한가.

이안은 몸속에 평소에 느끼던 감각과는 다른 것이 들어찼다는 걸 감지했다.

뭐라 해야 할까.

‘동물적인 감각? 아니, 짐승 특유의 날카로운 생존 본능이라 해야 하나?’

정확히 언어로 풀어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형님. 일어나셨나요?”

이안의 시중을 맡기로 한 청년의 목소리였다. 청년은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역시 일어나셨네요. 형님.”

“누가 네 형님이야.”

“에이. 잠깐이라도 형님은 형님이죠. 식사하시겠어요?”

마른세수를 한 이안이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변을 깨달았다.

‘느껴진다.’

청년이 이안보다 한참이나 약하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사냥감을 가늠하는 포식자의 감각이라 해야 할까.

원래도 그 자세나 행동거지로 얼추 유추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꽤나 선명하게 보였다.

‘상대의 레벨을 보는 능력이 이런 식으로 구현되는 건가.’

그렇다면 치명적인 일격을 피하게 되는 효과는 어떻게 구현되는 걸까.

자그마한 의문을 느끼며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밥부터 먹자.”

“예, 형님!”

“여기로 좀 갖다 줘.”

“아, 그.”

청년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식사는 다 같이 하는 게 저희 규칙이라서요…….”

“…… 나만 좀 예외로 해주면 안 돼?”

“네…….”

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움찔움찔하는 청년. 하지만 절대 예외는 없다는 듯, 물러서는 일은 없었다.

그 미묘한 기백에서 이안은 앞으로 이곳에서의 생활이 생각만큼 편하지 않으리라고. 강하게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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