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69화 (70/222)

69. 과거의 영웅들

팡!

잭의 몸이 바닥에 부딪혔다.

낙법을 취했지만, 미처 흘리지 못한 충격에 짜르르 몸이 떨렸다.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한 번 더?”

“끄응. 괴물 같은 새끼.”

처음에 잭은 막상막하의 싸움이 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둘의 실력 차이는 생각보다도 더 컸다.

‘도핑 안 하면 어림도 없겠어.’

무엇보다 이안은 검사였다.

격투기나 레슬링 기술도 훌륭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술을 보조하기 위함이었다.

잭은 이런 이안이 검을 뽑았을 때 어떻게 될지, 새삼 두려워졌다.

‘역시, 제대로 잡았어.’

잭은 이안의 손을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나도 더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몸이 말을 안 듣는군. 혹시 내 문제점에 대해서 좀 알려줄 수 있겠어?”

답지 않게 정중한 부탁에 이안은 잠시 기억을 되새겼다.

대련 중 보였던 잭의 움직임을 생각하니, 금방 답이 나왔다.

“보통 좁은 공간에서 싸우지 않아?”

“…… 맞아. 대로변에서 칼을 휘두를 수 없으니, 보통 뒷골목이나 건물 안에서 싸움하거든.”

“그래서 그런가. 싸움 중에 거리를 재기 위해 스텝을 밟는 게 너무 어설퍼. 어차피 붙어서 싸운다고 해도, 미세하게라도 끊임없이 움직여야지.”

“그렇군.”

잭은 이견 없이 수긍했다.

이안의 분석은 상당히 정확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배에 칼 맞은 적 있어?”

“…… 어떻게 안거지?”

잭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가끔 배 쪽을 지키려고 부자연스럽게 몸을 구부리더라고. 그래서 뭔가 트라우마라도 있나 했지.”

고통스럽고 강렬한 기억은 때로는 무의식에 남아, 나쁜 버릇이 되어 버리고 한다.

잭은 정곡을 찔린 얼굴로 상의를 들어 올렸다.

커다란 흉터가 배꼽 바로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예전에 칼에 찔려 뒤질뻔한 적이 있지. 사흘 동안 사경을 헤맸으니…… 나도 이런 버릇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버릇을 들키면 결정적인 순간에 당할 수 있어. 마일로가 이미 알고 있었다면, 다음에 싸울 때는 꼼짝없이 당했을 거야.”

그렇게 말한 이안은 평소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혹시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버릇이 있지 않을까?

만약 있었다면 이네스가 지적해줬겠지만 이렇게 관조하는 것만으로도 분명 의미는 있었다.

잭은 그런 이안을 놀란 듯이 쳐다보았다.

‘겨우 몇 번 겨뤄본 거로 내 버릇까지 알아채다니…….’

자존심을 내려두고서라도 가르침을 청한 게 옳은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잭이 부하들을 쳐다봤다.

“이제 나는 그만하고, 저놈들을 좀 봐줬으면 좋겠군. 좀 쉬었다 하겠어?”

“아니. 바로 해도 돼.”

“좋아. 그럼 순서대로 나와라!”

“넵!”

줄 서 있던 사내들이 기대감이 잔뜩 서린 얼굴로 하나씩 이안과 손을 겨루었다.

사내들은 무기를 사용하고, 이안은 맨손이었지만 그 점에 자존심 상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조직에서 가장 강한 잭을 가뿐히 쓰러트렸으니까.

이안은 한 명 한 명 고칠 점을 알려주었다.

“덩치 크고 힘센 건 좋은데 사각에서 오는 공격에 대해 너무 대책 없어. 뒷빵 맞으면 답 없다고. 알겠어?”

“알겠습니다!”

“너는 용감한 건 좋은데, 너무 한방에 많은 걸 얻으려고 해. 도박에서도 그렇게 한 번에 크게 따려는 놈은 어떻게 되지?”

“…… 얼마 못 가 뒤집니다.”

“잘 아네.”

이안은 기본적으로 사내들의 눈높이에서 맞춰 쉽게 설명을 해주려 했다.

뒷골목에서 살았던 기억들이 도움이 되어주었다.

결과적으로 가르침은 좋은 반응으로 끝이 났다.

이안을 쳐다보는 사내들의 눈에는 동경에 더해, 존경이라는 감정도 담겨 있었다.

‘하여간 단순한 놈들.’

그렇게 모두 손을 봐주고 마지막 순서로 오는 펠.

펠이 다가오자 사내들이 눈을 부라렸다.

“야. 여기가 어디라고 앞에 서? 겁쟁이 놈이.”

“쯧. 건방지게 말이야.”

따가운 반응에 펠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걸음만은 멈추지 않았다.

“저,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뭐. 상관없지만.”

이안도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펠은 딱히 싸움과는 연이 없어 보였다.

단련을 열심히 한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일단은 봐주기로 했다.

“가, 갑니다. 하아아압!”

양손으로 단검을 쥔 펠이 어설프게 달려왔다.

이안은 가볍게 다리를 걸어 펠을 고꾸라트렸다.

“…… 공격할 때 눈을 감으면 어떡해.”

“헤, 헤헤. 뭔가 무서워서요. 다시 부탁드려도 될까요?”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다시 갑니다. 하아아압!”

또다시 단검을 쥐고 달려오던 펠은 똑같은 방식으로 바닥에 엎어졌다.

쿵.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는지 다시 일어나질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잭이 침음을 흘렸다.

“끙. 열심히는 하는 놈인데…….”

“재능은 없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부탁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지. 야! 저놈 저거 의무실로 데려가!”

짜증 가득한 얼굴의 선배들한테 질질 끌려가는 펠을 보며 이안은 생각했다.

‘저놈 저거 앞으로 조직 생활 쉽지 않겠네.’

펠이 일어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마가 빨갛게 부은 펠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헤헤.”

“…… 머리는 좀 괜찮아?”

“끄떡없습니다! 근데 저어…… 또 하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머뭇거리는 펠을 보며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뭔데.”

“오늘 제가 예배에 가는 날이라서요…….”

“나는 상관없으니까 갔다 와.”

“아뇨! 형님께 옆에서 시중들라고 명 받았는데 그럴 수는 없죠!”

“……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혹시 같이 예배당에 가주시면 안 될까요?”

간절한 눈빛.

이안이 탄식했다.

“미치겠네 진짜.”

***

게임이라면 몰라도, 이곳에서 예배당에 발을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사제들은 이안의 머리와 눈 색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이번에는 펠의 보증으로 들어왔지만…….

“하아아암.”

이안은 늘어지게 하품을 늘어놓았다.

어쩌다 보니 펠과 함께 교단의 예배에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저 앞에 신관 복을 입은 늙은 성직자가 지루한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안은 옆에 있는 펠을 쳐다보았다.

펠은 눈을 감은 채 무어라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앙심이 아주 깊은 모양이었다.

‘하긴. 당연한 건가.’

이 세계의 주민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종교를 믿었다.

얼마나 더 신실하고 신실하지 않냐가 차이 날 뿐.

이안은 펠의 옆쪽을 쳐다봤다.

나이든 노파와 쪼그마한 꼬맹이 둘이 펠과 마찬가지로 무어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듣기로는 펠의 조모와 어린 두 동생이라 했다.

주에 온 가족이 이렇게 다 같이 예배에 참여하는 게 일과라나 뭐라나.

‘지루하네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잖아요? 그래도 펠을 위해 직접 따라와 줬고요.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건가요?]

이안은 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직의 말단 잡일꾼.

실력이 없다고 비웃음당하는 위치.

그래도 어떻게든 꿋꿋이 살아남고 발전하려는 의지.

그 모습들에서 이안은 동질감을 느꼈다.

‘저도 저랬던 적이 있으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펠과 이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적어도 잭이 운영하는 조직은, 이안이 있었던 곳처럼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하지는 않았었다.

하루하루 생명의 위기를 느끼며 전전긍긍할 일도 없겠지.

그래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고 싶다.

이안도 누군가 그래 주길 바랐었으니까.

그런 기특한 마음도, 예배당에 발을 들이자마자 싹 사라져 버렸지만.

‘지루하고 따분한 얘기밖에 안 하니 원.’

[원래 예배당은 그런 말을 하라고 있는 곳이에요.]

‘…….이네스 님도 이곳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으시군요.’

주위의 따가운 눈초리를 무시하고 기지개를 켠 이안은 적당히 시간 때울 게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다 한쪽에 쌓여 있는 책 꾸러미를 발견했다.

교단의 성서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책이 하나 있었다.

‘영웅과 지옥의 하수인들’

어린이들을 위해 쓰인 책으로 놀라운 활약을 펼친 영웅들이나 무시무시한 위세를 떨친 악마의 종복들에 대해 쓰여 있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흥미 있던 건, 매 페이지에 화려한 삽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

‘교단에 참 돈이 많나 보네요. 이렇게 컬러로 책도 나오고.’

이안은 책장을 슥슥 넘겼다.

앞부분은 흉악하게 생긴 괴수들이 장식했다.

하나하나 끔찍한 생김새였는데, 그중에서는 이안이 아는 것들도 있었다.

‘화염의 악마. 절망의 나무. 배교자.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네.’

게임에도 등장하는 적들이고 하나같이 막강한 놈들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유저들이 그 어려움을 인정해 ‘사천왕’이라는 칭호까지 붙여주었을까.

하지만 그 사천왕 중에서도 그 궤를 달리하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흑기사.’

온몸을 칠흑빛 갑주로 감싼 기사의 삽화가 그려져 있다.

한 손에는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고, 투구 속에는 붉은 안광이 보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갑옷의 몸통 부분이 반으로 쩍 벌어져 사람들을 산채로 집어삼키는 삽화였다.

끔찍한 삽화의 아래에 주석이 달려 있었다.

-한 때 명예로웠던 기사였으나,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 하수인이 되었다. 흑기사에게 잡아 먹힌 사람은 그 영혼이 속박되어, 영원히 흑기사의 노예로 살아가야 한다.

‘게임에서도 손에 꼽게 강한 놈. 분명, 황태자가 다루던가?’

기억하기로는, 도시 하나를 홀로 파괴할 정도로 끔찍한 놈이었다.

이안은 서둘러 책장을 넘겼다.

이번에는 영웅들의 차례.

아마도 연도순으로 나열한 듯.

먼 과거의 영웅의 삽화와 설명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었다.

한참을 넘긴 후에야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대마법사, 로잘리아 피에람.’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화염 마법사.

새빨간 장발을 늘어트린 우아한 여성이 주위에 불꽃을 흩뿌리는 삽화.

여인의 모습은 놀랄 만큼 플로라와 닮아 있었다.

이안은 감탄했다.

‘와. 진짜로 이네스 님 말마따나 거의 똑같이 생겼네요.’

[…….그러게요. 그리운 얼굴이네요.]

이안은 다음 장으로 넘겼다.

숲의 종족으로 보이는 남성이 거대한 지팡이와 도끼를 휘두르는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대전사 아타바.’

-위대한 숲의 종족의 일원으로 어머니 나무의 선택을 받은 대전사.

이네스가 옅게 미소 지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우직한 사람이었죠.]

‘그랬었나요?’

이안은 다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번엔 경건해 보이는 얼굴로 기도를 올리는 은발의 청년이었다.

‘성자, 에릭 그린.’

-죽은 이마저도 살려내는 신의 대행자.

이네스가 첨언했다.

[다른 누구보다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었어요. 빈자의 고통에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요.]

‘훌륭한 사람이었네요.’

[그 정도의 인격자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있는 악마를 토벌하러 가겠어요. 죽은 사람을 살려냈다는 건 과장이지만요.]

둘은 이네스의 과거에 대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 이네스가 얘기하기를 꺼려하던 주제이니만큼, 신선한 느낌이었다.

이안이 다음 장을 넘겼다.

이네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가 대검을 땅에 짚은 채 화려한 옥좌에 앉아 있었다.

황금 색깔로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와 눈동자는 이네스의 그것과 똑같았다.

그 화사한 외모는 삽화로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대제. 프리츠 그레이스 클로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이자 가장 명예로운 기사.

[그리고 제 오빠 되는 사람이에요. 황제가 되어 대제라는 칭호까지 얻었으니, 출세했네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머금는 이네스였지만, 이안은 더 말을 얹지 않았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안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빠, 빨리 넘어가죠. 이네스 님에 대한 이야기도 보고 싶어요. 어차피 이 사람들이랑 나중에 마주칠 것도 아니고, 더 알아서 뭐 하겠어요.’

횡설수설하며 이안이 막 페이지를 넘기려던 그때.

옆에서 펠이 이안을 불렀다.

“형님. 형님! 예배 끝났어요. 이제부터는 지루하지 않을 거예요.”

“…… 그러냐?”

이안은 어쩔 수 없이 책을 덮었다.

신도들이 저마다 자신이 이번 주에 들은 ‘소문’을 사제한테 고하고 있었다.

그 모든 시시콜콜한 일들에 대해 사제는 귀를 열고 경청했다.

다소 생소한 광경.

이네스가 설명했다.

[교단은 그 누구보다 소문에 민감해요. 악의적인 소문 하나가 몸집을 불리다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거든요. 신도들에게서 소문을 수집해 적절히 대응하고 있어요.]

놀랍게도 이곳에서 교단은 정보 상인의 역할도 겸한다 했다.

교단의 주 수입원 중 하나라고.

하나하나 얘기를 들어주던 사제가 말했다.

“이번에는 역시, 코르디스에 소환된 악마와 목숨을 바쳐 악마를 토벌한 영웅의 이야기가 화제군요.”

펠이 이안에게 아는 척했다.

“아. 저도 저 소문 들었어요. 어떤 영웅이 황녀님과 귀족들과 함께 악마에 맞서다, 장렬히 산화했대요. 정말 대단하죠?”

“대단…… 하기는 하네.”

“왜인지 생김새도 가문도 안 밝혀지지만, 이름은 이안이래요! 형님이랑 이름이 같네요. 헤헤. 흔한 이름이긴 하죠?”

“…… 그러게. 흔한 이름이긴 하지.”

말은 그렇게 해도, 이안은 속으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벌써 소문이 여기까지 퍼진 것도 예상외였지만, 그 안에 이안의 이름이 포함되어있는 것도 의외였다.

평민 출신에 외향도 불길한 이안이다. 게다가 이제는 죽어 버렸으니, 아예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과는 조금 다르게 퍼질지언정, 소문에는 이안의 이름이 당당히 박혀 있었다.

‘레아나 플로라가 힘을 써준 건가? 아니면 나를 황태자의 측근이라 생각하고 어쩔 수 없이 한 걸 수도 있고.’

어쨌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다.

이 소문이 과연 어떤 식으로 이안에게 되돌아올지는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이안을 위해 힘써준 사람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펠이 순수한 소년처럼 흥분했다.

“대체 누구일까요? 분명 엄청나게 멋있는 사람이겠죠? 어떤 사람인지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지금은 이제 세상에 안 계시지만요.”

‘사실 나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눌러 담았다.

대신 확신을 담아 말해주었다.

“응. 분명 엄청 멋있고 대단하고 잘생긴 사람일 거야.”

그렇게 말하는 이안에게 이네스의 차가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

예배가 끝난 뒤에는 펠의 업무에 따라가 주어야 했다.

조직의 말단답게, 그는 여러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분홍색 약이 든 물약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이안이 무슨 약인지 묻자, 펠이 맑게 웃으며 답했다.

“좀 더 건강한 약이에요. 의존성도 낮추고, 부작용도 많이 줄였죠.”

대놓고 약을 나눠주고 다닌다니.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안은 조용히 펠을 따라다녔다.

펠은 뒷골목에 널브러진 부랑자들, 허름한 집의 가난한 주민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들이 모이는 주점을 돌며 사람들에게 약을 나눠주었다.

주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이겨가는 이들이었다.

“삶이 고되면 자연히 유혹에도 약해져요. 마일로의 값싸고 중독성 강한 약물은 그런 사람들을 홀리죠. 처음에는 약을 사기 위해 조금씩 돈을 내다가, 점점 중독성이 심해져서 나중에는 완전히 노예가 되어버리는 거죠.”

“이 약은 그런 사람들을 구해주는 거고?”

“예! 다짜고짜 끊으라고 하면 누가 끊겠어요! 천천히 줄여나가는 거죠.”

펠은 웃는 얼굴로 어느 한 노파에게 약을 전해주었다.

눈빛이 흐릿한 게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는데, 펠을 보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손을 맞잡고 노파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펠이 다시 돌아왔다.

“1주일만 지나도 약의 부작용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예배만 끝나면 도시를 다 돌아야 해요. 제가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죠.”

“......고생이 많네.”

“뭘요. 이게 제 일인데요. 나름 보람이나 책임도 느끼고요.”

자부심 넘치는 펠의 얼굴을 보며 이안은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어벙한 청년에서, 심성이 고운 어벙한 청년으로.

그렇게 펠을 따라다니다 보니, 그날 하루가 꼬박 지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리 아까운 시간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

일주일이 흘렀다.

이안도 어느새 조직에서의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매일 같이 단련을 거듭하고 있지만, 아직 특별한 진전은 없었다.

‘펠 녀석은 예배당에 갔던가?’

같이 가주려고 했지만 펠이 그러면 너무 미안 하다고 혼자 가버렸다.

저번에 하룻동안 끌고 다닌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요 근래 좀 조용하네.’

마일로 쪽은 여전히 잠잠했다.

잭은 기회라며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이안은 지금의 평화가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처럼 느껴져 어딘가 불길한 기분이었다.

‘이 기분도 동물적인 감각을 얻은 여파인가?’

이안이 머릿속의 상념을 지워내고 다시 검을 휘두르려던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잭의 부하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가쁜 숨을 내쉰 사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첫 번째 부탁을 할 때가 왔다고 형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얘기를 듣자마자 이안은 주저 없이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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