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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70화 (71/222)

70. 항쟁

우중충한 날이다.

하늘에서는 드문드문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코헨은 의외로 제법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빗방울이 코헨 특유의 매캐한 구름을 뚫으면 형형색색의 빛깔을 띠는데, 아래에서 그 광경을 쳐다보노라면 마치 동화 속의 사탕 비를 연상케 해 제법 감상적이 된다.

물론, 건강에는 매우 안 좋지만.

툭.

마일로는 삶은 브로콜리를 포크로 푹 찔렀다.

그런 마일로를 그의 부하들이 원형으로 둘러싸고 서 있었다.

“오늘 야채도 신선하네. 요리도 나쁘지 않아.”

“그렇습니까.”

“근데…… 우리 주방장께서 실수를 한 모양이군.”

마일로는 그 기다란 손가락으로 채소 사이에 숨어 있는 머리카락 한 올을 집어 들었다.

너무 얇고 짧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다.

“퉤.”

챙그랑.

마일로는 식탁 위의 접시들을 모조리 바닥에 쏟아 버리고, 씹고 있던 음식들도 모조리 게워냈다.

마일로가 난리는 치는 동안에도 그 부하들은 익숙한 듯,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주방장부터 주방에서 일하는 허드렛일꾼까지 전부 다 처분해. 그리고 새로 뽑고.”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부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뒤에 자지러지는 비명이 저택을 울렸다.

마일로는 옷에 묻은 먼지를 깃털을 이용해 하나하나 털어내며 말했다.

“한 번 더러워진 건 아예 싹 밀어 버려야 해. 안 그러면 끝없이 더러워질 뿐이야. 마치 이 도시처럼.”

***

마일로의 습격은 신속하고 날카로웠다.

사람들이 예배당을 가는 일요일 이른 아침. 암묵적으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정해진 그때를 무자비하게 노렸다.

마일로가 금기 따위에 연연하는 사내가 아니라는 걸 의미하기도 했지만, 더는 주위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고.

“피해 상황은?”

잭이 다급하게 물었다.

“예배당을 가던 조직원들이 습격당하고, 저희와 계약한 공방들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놈들은 초전부터 끝내려는지, 2단계 도핑을 마쳤습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큽니다!”

“다른 조직에 연락은!”

“저희보다 심하면 심했지, 도와줄 상황은 아니랍니다!”

잭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2단계 도핑은 약효가 끝나면 근 1주일간 사람 구실을 못하게 할 정도로 그 부작용이 강하다.

그걸 망설임 없이 마시고 기습을 걸다니.

게다가 대낮에 길거리에서 대놓고 난동을 부리면 시장에게 공격할 좋은 명분이 될 뿐이다.

시민들의 지지도 떨어지고.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큼, 마일로도 이번에 사활을 건 셈이다.

“막아야 해! 이안, 이안은 어딨어!”

“나 여깄다.”

빠르게 뛰쳐나온 이안이 따라붙었다. 잭이 빠르게 말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

“그래.”

“놈들이 과감하게 나왔어. 요즘 아만 쪽에서 방관하는 걸 보고 강하게 나온 거지!”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다른 곳보다 레이브 공방. 레이브 공방만은 지켜내야 해. 거기가 우리 생명줄이야!”

코헨의 연금술사 공방 중에서도 순위를 다투는 곳이 바로 레이브 공방이다.

그만큼 잭에게는 중요한 곳이고, 그 사실은 마일로도 알고 있을 터.

그곳이 격전지가 되리라는 건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일단 내부 경비 인력이 있으니, 잠시는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어서 가자고!”

“이번에 싸워주는 거. 첫 번째 부탁이야.”

“알아!”

둘은 바람처럼 달려 목적지로 향했다.

이미 레이브 공방에서는 거진 공성전과 다를 바 없는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막아! 일단 막으라고!”

“끄아악!”

좁은 입구를 어떻게든 사수해 수성하는 공방 직원들과 밀고 들어가려는 마일로의 부하들의 줄다리기.

뒤쪽에서는 마일로가 여유로운 얼굴로 지휘를 내리는 것도 눈에 띄었다.

잭이 도착하자, 마일로가 고개를 돌렸다.

“이런. 우리 대머리가 웬일로 이렇게 빨리 왔대?”

“마일로 이 새끼. 너 미쳤어? 대로변에서 이 지랄을 떤다고?”

마일로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대꾸했다.

“네가 생각한 걸 내가 생각 안 했겠어? 당연히 계산이 끝나서 이러는 거지. 하여튼. 시작해라.”

마일로의 주위에 서 있던 부하들이 차를 한 잔씩 홀짝인 뒤.

품에서 유리병의 마개를 풀어 꿀꺽 들이마셨다.

잭이 경악했다.

“3단계……!”

힘을 비약적으로 늘리지만, 약효가 끝나면 열에 아홉은 사망에 이르게 되는 흉악한 약물.

그런 약을 마시라 시키는 마일로도. 그리고 그 명을 아무런 반발 없이 마시는 그 부하들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꾸득.

약을 마신 사내들의 근육이 눈에 띄게 부풀어 올랐다.

피가 몰려 새빨개지는 눈동자.

터질 듯 쿵쿵 뛰는 심장.

수명을 끌어다 써 순간의 강함을 취하는 그 모습과 풍기는 그 각오 앞에서는 누구라도 압도당할 것이다.

당장 잭만 해도, 부하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지 주저하고 있지 않나.

그런 잭의 어깨를 이안이 툭툭 친 뒤, 선두로 걸어나갔다.

“먼저 간다.”

동요하는 잭과 그 부하들을 뒤에 남겨두고, 이안은 홀로 걸어갔다.

앞서오는 적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찌릿찌릿하네.’

전신의 털이 곤두서 있다.

도핑을 마친 저 사내들이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라는 걸 괴수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그때.

퉁!

공격이 예고 없이 날아왔다.

‘뭐야.’

이안의 시간이 느닷없이 느려졌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바닥을 박찬 사내가 너클 낀 주먹을 뻗어 오는 게 눈에 보였다.

주먹은 어느새 이안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코덱스의 효과구나.’

치명적인 공격을 확률적으로 회피하게 되는 효과.

그게 이런 식으로 구현되는 건가.

이안은 가볍게 스텝을 밟아 옆으로 피했다.

쾅!

이안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가 깊숙이 패였다.

“허…….”

피할 줄은 예상 못 한 듯.

사내의 새빨갛게 충혈된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피하자마자 시간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안은 주저 없이 왼발을 축으로,사내의 턱을 힘껏 걷어찼다.

팡!

사내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갔다.

“후우. 큰일 나는 줄.”

방심했다.

약의 효과가 큰지, 저들의 속도가 예상보다도 더 빨랐다.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이안에게 이네스가 외쳤다.

[바로 옵니다!]

이안에게 턱을 얻어맞은 사내가 번뜩 일어섰다.

정상적이었다면 턱이 그대로 부서져도 안 이상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멀쩡하다.

이안이 혀를 찼다.

‘쯧. 이래서 내가 코헨을 안 좋아하는 건데.’

약을 마시면 단순히 빠르고 강해지는 걸 너머, 피부와 뼈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단단해진다.

게다가 뇌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감각 자체를 없애 버리니, 목을 베지 않으면 끝없이 달려드는 불사의 병사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놈들은 마일로의 정예들이겠지.’

적들은 이안이 적당한 상대가 아니란 걸 알아챈 듯.

검은 옷을 맞춰 입은 마일로의 부하들이 열을 지어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안의 뒤에서는 회색 옷을 입은 잭의 부하들이 마주 걸어왔다.

상태를 보니, 아군 역시 한계까지 도핑을 마친 듯했다.

어쩌면 이 항쟁의 모든 걸 결정지을 전투에서, 이안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코헨에서 검은 처음으로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데.”

아직 약을 복용하지 않은 잭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자신 있어?”

“글쎄. 그런 거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라. 근데, 조금 전까지는 저놈들 보면서 털이 곤두서 있었거든?”

사내들을 보며 느꼈던 짜릿짜릿한 감각.

동물적인 본능이 울리던 경고.

그런 느낌들은 놀랍게도 검을 뽑자마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이게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검을 들면 일단 내가 위라는 건가 봐.”

상대와 나의 차이를 가늠해주는 꽤 객관적인 근거가 있다면.

그때부터는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안은 앞으로 걸어나갔다.

실로 오랜만에 실력발휘를 할 시간이었다.

***

“저게 뭐야.”

마일로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웬 검은 머리 사내가 검을 들고 나서더니, 홀로 가뿐히 세 명씩을 상대하고 있었다.

지금 내보낸 부하들은 마일로와 긴 시간을 보낸 이들이다.

여러 사선을 헤쳐나왔고, 죽음을 극복하며 실력을 키워온 역전의 용사들이다.

그런 용사들이 수명을 대가로 힘을 키웠는데, 셋이서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머리 새끼가 어디서 저런 걸…… 가만. 저거 저번에 우리 일을 훼방놓던 놈이잖아. 내 제안 거절했던 그놈.”

“…… 아무래도 맞는 것 같습니다.”

스윽!

말하는 사이. 이안을 압박하다 못 참고 뛰어든 사내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사기가 차올라 있던 사내들도 그제야 깨달았다.

잘못 실수했다가는 아무리 그들이라도 한 번에 죽어 버릴 것이라는 걸.

마일로는 냉정하고 신속하게 판단을 내렸다.

“저놈은 죽일 생각보다는 붙잡아두고 있는 거에 초점을 맞춰. 지금처럼 3명이서 압박하고, 두 명은 예비로 대기하고. 아까워도 어쩔 수 없지.”

“알겠습니다!”

“그 사이에 대머리 녀석의 본대를 궤멸시켜. 공방도 뚫어내고.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중요한 건 시간과의 싸움이다.

마일로도 무리해서 병력을 이끌고 온 참이다.

단기간에 모든 걸 청소해내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갑작스러운 혈투에 일반 시민들이 비명 지르며 도망가는 게 눈에 보인다.

‘구경하고 있을 아만 그 새끼도 언제까지 놓아둘 수는 없겠지.’

마일로는 품속에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직접 참전할까?

아니, 너무 리스크가 큰 행위다.

부대껴 싸우다 보면 눈먼 칼에 맞아 재수 없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마일로가 죽으면 그걸로 조직은…… 한때 융성했던 그의 가문은 끝이었다.

“더 몰아붙여!”

다행히 전황은 여전히 마일로가 우세했다.

아니, 압도적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철저히 준비해, 완벽한 기습을 펼친 마일로는 전략은 유효했다.

잭과 그 연합의 세력은 단시간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승기는 이미 반쯤 넘어온 것과 다름없고, 완벽한 전략의 승리가 눈에 보였다.

하지만…… 가슴 속에 퍼지는 이 불안함은 뭘까.

마일로는 찡그린 얼굴로 레이븐 공방 쪽을 보았다.

여전히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고, 공방 놈들은 끈질기게도 버텨냈다.

‘하지만 시간문제겠지.’

이번에는 잭과의 싸움을 보았다.

명백히 마일로 쪽의 숫자가 더 많고 사기도 높았다.

금방이라도 전열이 무너지고, 적들은 꽁무니를 빼며 도망칠 것 같았다.

하지만 전열은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건 이 혼란스러운 전투 한복판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단 한 사람 때문일 터.

‘역시 저놈 때문인가.’

홀로 다섯 명을 붙잡고 싸우고 있는 이안이 눈에 보였다.

이안을 둘러싼 사내들이 소극적으로 견제를 날리지만, 이안은 차분한 얼굴로 맞대응할 뿐이다.

그제야 마일로는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 차분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무언가를 곰곰이 계산하고, 재보고, 마치 수학 문제의 정답을 찾으려는 학자 같은 저 눈빛이 거슬렸다.

불안감을 못 이기고 마일로가 더 지시를 내리려던 그때.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제 대충 알겠다.”

“뭐?”

이안이 성큼 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설마 거리의 이점을 포기하고, 파고들어 올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사내들이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몸의 반응만큼은 즉각적이었다.

곧바로 이안을 향해 세 방향에서 세 종류의 무기가 날아들었다.

이안은 그 모든 공격을 전부 예상이라도 한 듯.

보지도 않고 무기를 피하며, 공중에서 검을 한 바퀴를 크게 돌렸다.

부웅.

감이 좋은 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 명은 그렇지 못했다.

피 분수가 터져 나왔다.

도핑을 마친 사내의 피 색깔은 유난히 붉었다.

얼굴에 묻은 슥 닦아낸 이안이 포위망을 뚫고 적진의 한가운데에 파고들었다.

미리 거리를 벌리지 못하고 있던 탓에 전열이 무너지고.

전열이 무너지자 전황이 급격하게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난전.

그게 바로 이안이 의도한 대로였다.

“무, 무슨!”

마일로가 눈을 부릅떴다.

곰곰이 생각하던 눈빛이, 정말로 그들의 움직임을 세밀히 분석하던 거란 말인가?

게다가 그 짧은 시간에 파악을 마쳤고?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잠시 혼란에 빠져 있던 마일로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압도적이던 전황이 묘한 균형을 이루고 시간이 끌리기 시작했다.

완벽한 전략의 승리가 단 한 사람의 무력에 의해 어그러진 것이다.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은 마일로가 앞으로 나섰다.

고민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전부 끝이었다.

묘하게 떨고 있는 부하들을 거칠게 헤치며. 마일로가 앞으로 나아갔다.

부하들로 안 되면 직접 상대하는 수밖에.

비장한 마음을 품은 마일로가 막 이안에게 당도한 그때.

“멈춰라!”

대로에서 잘 무장한 병사들이 이곳을 향해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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