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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73화 (74/222)

73. 불 속에 뛰어드는

이안이 앞으로 나서자 분위기가 요동쳤다.

최근 함께 생활을 같이 했던 잭의 부하들은 물론, 마일로의 부하들도 하나 같이 이안을 알아봤다.

“.......검은 머리 놈이다.”

“저번에 혼자서 다섯을 상대하던 그놈?”

“대단한 고수긴 한데……. 혼자서 뭘 하려는 거지?”

“의리 지키려고 목숨이나 버리러 오는 거지.”

비웃음이 날아들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안은 너무 무모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절대적인 숫자가 차이 나면 매우 불리한 법이다.

특히 그들은 마일로를 굳게 신뢰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순서가 이안의 체력만 빼놔도, 절대 마일로를 이길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그 모든 반응들에 대해 이안은 무시로 일관하며 몸을 풀 뿐이었다.

한 번의 격전 이후. 긴장을 풀고 있던 에덴이 마일로에게 말했다.

“두목.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자신 있어?”

“저번 싸움에서 제 동생을 죽인 놈입니다. 산채로 찢어버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가봐.”

에덴이 비장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이안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폴이다.”

“뭐?”

“네가 죽인 내 동생의 이름. 폴이라고.”

이안은 저번의 전투를 기억했다.

분명, 그때 몇 명 정도의 목을 베었었다.

그게 하필 이 사내의 가족이었던 모양.

모르는 세에 이안은 이미 이들의 싸움에 깊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유감이네.”

“내가 대신 복수를 해야겠다.”

“할 수 있으면 한번 해…….”

탕!

이안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바닥을 강하게 박찬 에덴이 이안에게 그 커다란 주먹을 뻗었다.

아직 이안이 검을 뽑기 전에 끝장을 볼 속셈이었다.

‘성질도 급해라.’

이안은 오른팔을 뻗었다.

팔과 팔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대로 팔을 회전해 충격을 흘려내고, 에덴의 팔을 자신의 팔로 휘감아 버렸다.

예상을 웃도는 깔끔한 방어에 에덴이 경악했다.

“무, 무슨.”

“셋이나 상대해야 하니, 바로 끝내자.”

어느새 파고든 이안의 발이 에덴의 왼발을 걷어찼다.

넘어가려는 균형을 에덴이 가까스로 바로 잡았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열에 아홉은 여기서 바닥에 쓰러졌을 테니까.

하지만, 에덴이 흔들린 그 찰나는 이안이 검을 뽑고. 휘두르고. 다시 되돌리고도 남을 만큼 너무나 넉넉한 시간이었다.

샤악! 철퍽

“어?”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자연스레 에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거기에 떨어진 건 두 팔.

그 팔이 자신의 것이라고 알아챈 건 한 호흡 뒤였다.

“끄아악!”

뒤늦은 피 분수가 터졌다.

이안은 성검을 한번 휘둘러 피를 후두둑 털어냈다.

“일단 똑같이 복수는 해줬고. 바로 다음 나오지?”

이안이 그리 말하자, 그제야 지켜보던 이들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지했다.

“수, 순식간에 끝냈잖아.”

“게다가 토마스 때처럼 양팔을 가져갔어……!”

“어, 어쨌든 우리가 이긴 거지?”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서 이안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챈 이는 없었다.

그저 강자라 여겼던 에덴을 순식간에 해치워 감탄할 뿐이다.

하지만 마일로만은 달랐다.

오직 그만이 이안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원래 신체 능력 자체가 우리가 도핑한 거랑 비슷해. 저번에도 잘 싸운다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때는 싸우는 시늉만 한 거였군. 아니, 그것보다 저 기술을 상대하려면……. 아.’

마일로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마음속에 잠시 스쳐 지나간 건 오랜 기간 잊고 살았던 감정이었다.

두려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제는 무뎌졌다고 생각한 이후, 절대 다시 느끼지 못하리라 여겼던 그 감정이다.

하지만 마일로는 긴장을 하긴 커녕, 오히려 더 흥분했다.

“좋아좋아좋아좋아. 어쩐지 일이 너무 쉽다고 했지. 저런 괴물을 어떻게 꼬셨는지. 그 대머리 새끼.”

“두목. 어떻게 할까요?”

조직의 이인자이자 오랜기간 마일로를 보필해온 중년 사내. 데인의 물음에, 마일로가 짧게 대답했다.

“가. 어차피 못 이기니까 조금이라도 상처 입혀봐.”

“알겠습니다. 그동안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래그래. 지옥에서 다시 보자고.”

비장한 데인과 달리 마일로의 태도는 지극히 가벼웠다.

데인이 한 손에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의외의 무장에 이안이 물었다.

“너희들 중에서 검을 쓰는 건 처음인데. 특이하네.”

“원래는 단검을 쓰는 데, 아무래도 너는 눈썰미가 좋은 것 같아서 말이야……. 두목께 해가 되는 건 지양해야겠지.”

데인은 이안이 상대의 싸움 기술을 보고, 순식간에 읽어낸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무위를 보여주면, 마일로의 기술까지 들통날 수 있다 여겼다.

대단한 충심이 아닐 수 없다.

목숨이 걸린 싸움에서 가장 익숙한 무기를 포기하다니.

그 모습이 기사인 이네스에게 퍽 감동을 주었던 모양이다.

드물게도 이네스가 말했다.

[자칭 기사들 중에서도 저 정도의 충심을 가진 자는 찾기 힘들어요. 부디 고통 없이 깔끔하게 끝내주세요.]

사실, 승부는 볼 것도 없었다.

당장 검을 쥐고 있는 자세만 봐도 서로 간의 실력 차이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왠지 모를 불안한 감각을 느꼈다.

‘어쨌든 빨리 끝내야겠어요.’

어찌 됐든.

되도록 시간을 끌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네스와 의견이 일치했다.

데인이 결연한 눈빛으로 검을 들었다.

“그럼 가지. 하아압!”

우렁찬 기합에 비해 미묘한 스텝.

형편없는 속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정직한 궤적.

하지만 이안은 긴장했다.

혹시나 숨겨두었을 한 수를 생각하며 검을 내뻗었다.

챙!

검과 검이 맞부딪혔다.

이쯤에서 이안의 검이 반동으로 튕겨나올 터.

하지만 성검이 계속해서 뻗어 나갔다.

자세히 보니 데인이 든 검에 미세한 균열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채캉!

데인의 검이 산산이 조각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이안은 그 조각 하나 하나가 푸른 색으로 빛나는 걸 보았다.

독이었다.

애초에 부러트릴 목적으로 가져온 검이었다.

방어해야 한다.

하지만 이안의 검은 데인의 급소 깊숙이 찔려 있었다.

데인이 웃고 있다.

저승길 동무가 있다는 게 기쁜 듯 했다.

이안은 미련 없이 검을 놓았다.

다행히 긴장하고 있던 터라 대응할 시간이 있었다.

‘하여튼 이 놈의 도시는 마음에 안 들어.’

이안은 가슴을 매만졌다.

손에 걸리는 붉은색 브로치.

그리고 일순.

뜨거운 열기가 주위를 집어삼켰다.

***

정적이 내려앉았다.

열기와 빛이 사라지고 남은 건 이안 혼자였다.

부서지던 검도. 데인도. 재 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마, 마법사.”

누군가 그리 말했다.

저 정도의 불꽃. 저 정도의 화력을 뿜어내다니.

소문으로만 듣던 마법사가 아니면 대체 누가 가능하겠나.

하지만 여섯 가문 출신인 마일로는 마법사를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었다.

저 정도의 화력을 아무나 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까 몸 어딘가를 어루만졌어. 아마도……. 아티팩트.’

정확하게 간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안에 대한 경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런 아티팩트를 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실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이니.

차가운 정적 속에서 이안이 말했다.

“자. 이제 마지막. 올라와야지.”

시선이 마일로에게 집중되었다.

그렇다.

어느새 대결은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빗어넘긴 마일로가 일어났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으레 이런 싸움에는 기세라는 게 있다.

순식간에 두 명을 처리해낸 이안은 확실히 기세가 올라 있었다.

잭의 부하들은 화색을 띠었고, 반대로 마일로의 부하들은 처음으로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좋지 않다.

이건 정말로 좋지 않다.

그렇게 입으로 작게 중얼거린 마일로였지만 그 표정만은 차가웠다.

뚜둑.

마일로가 어깨를 풀었다.

양손에는 ‘날카로움’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 것 같은 단검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단검의 날이 흉흉한 붉은 빛으로 빛났다.

이안은 저 단검의 정체를 안다.

‘마일로의 활공하는 단검. 드디어 꺼냈구나.’

저 단검은 마일로의 가문에 내려오는 아티팩트다.

그리고 잭에서의 싸움에서도 꺼내지 않은 저걸 꺼냈다는 건, 마일로가 모든 걸 걸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위야.’

본능적인 감각을 느끼며 이안은 자세를 잡았다.

뚝.

손을 마저 푼 마일로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마치 서로의 마음을 꿰뚫어보듯.

눈을 마주치며 이어지는 탐색전.

순간.

마일로의 몸이 흐릿해졌다.

후욱.

이안이 허공에 검을 흩뿌리듯이 휘둘러 공간을 점했다.

순간적으로 파고들려는 마일로가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이안은 생각했다.

‘코헨의 사내들의 단검술은 비슷한 느낌이 강해. 마일로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 유사성까지는 어찌할 수 없어.’

이안에게 검술은 하나의 생물처럼 느껴졌다.

물속의 생물과 지상의 동물은 똑같이 살아남는다는 목적을 공유하지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상당히 다른 형태로 진화한다.

검술도 마찬가지다.

검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목적 자체는 동일.

하지만 그 환경에 따라 검술은 실로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했다.

그 점을 잘만 관찰하면 상대의 검을 더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주로 뒷골목에서 싸우니 거리를 좁혀 싸우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약을 마시고 싸우는 게 기본이라 모든 동작이 급소를 노리고, 그 두 점 때문에 베기보다는 찌르기 위주의 동작이 대부분이야.’

장점과 단점.

이미 숱하게 상대하고 관찰하면서 그 약점까지 모두 파악해냈다.

물고기는 그물로. 하늘을 나는 새는 새총으로 상대하듯.

마일로 또한 적절하게 상대하면 될 뿐이다.

‘초원의 검술은 별로야. 일단 브레이브하트 가문의 24 검은 조금 응용하고, 이네스님의 검으로…….’

순식간에 계산이 섰다.

이안의 발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검끝을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안쪽으로 파고들려는 마일로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기 간의 길이 차이가 만들어낸 상성이다.

마일로가 활로를 어떻게든 뚫어보려 하지만, 애초에 실력에서는 이안이 몇 수는 위다.

당연하게도.

둘 간의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마일로도 깨달았다.

이대로는 답이 없다는 걸.

이안은 차분히 기다렸다.

이대로 마일로가 포기할 리 없으니까.

‘자. 빨리 활공하는 단검 써. 그게 네 마지막 패턴이잖아.’

이미 모든 걸 꿰고 있는 만큼 위험도, 변수도 없다.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일로가 다짜고짜 자기 품을 뒤지기 전까지.

퐁.

코르크 마개를 빼내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검은색.

처음 보는 색깔이다.

저런 게 게임에서 있던가?

그 의문을 눈치챈 마일로가 씨익 웃었다.

“이게 바로 가장 처음에 만들어진 도핑약. 도시가 악마를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이유. 부작용을 잡느라 효과가 낮아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약. 통칭 ‘악마의 피’다. ”

꿀꺽.

마일로가 끈적한 액체를 들이켰다. 목울대를 타고 약이 마일로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싸늘한 감각이 이안의 피부를 타고 흘렀다.

쐐액!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눈앞에 단검이 다가와 있었다.

그나마 신체에 전해지는 싸늘한 감각에 가까스로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피슉!

마일로의 단검이 어깨를 스쳐지나갔다. 깔끔하게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튀었다.

화끈한 통증이 뒤늦게 찾아왔다.

[이안!]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인지하지조차 못했다.

아니. 애초에 저게 현실적으로 말이나 되는 속도인가?

어느새 이안의 뒤쪽에 서 있는 마일로가 웃었다.

“앞으로 한 시간 뒤에 난 죽어. 내 모든 수명을 갈아 넣은 셈이지. 그러니 부탁하는데……. 너무 쉽게는 죽지 말라고. 그러면 너무 허무하잖아.”

원하는 걸 모든 걸 내버린다. 그게 설령 목숨이라도.

코헨의 사내들은 마치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다.

그리고 마일로 역시 코헨의 사내였다.

마일로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발재간이 가볍다.

마치 무게가 아예 없는 사람 같다.

이안은 집중했다.

예상 못 한 속도다.

언제 튀어 올지 모르기에 긴장해야 했다.

돌연. 이네스가 외쳤다.

[옵니다!]

가슴 쪽이 쎄하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검을 세웠다.

촤악!

늦었다.

가슴에 긴 자상이 생겼다.

뜨거운 피가 흘렀다.

다행히 치명상은 피했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이번에도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마일로가 지나간 자리 뒤로 뒤늦게 바람이 불어 이안의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무슨…….’

상황을 파악할 틈조차 없었다.

다시 바람이 피부에 느껴졌다.

뒤늦게 몸을 틀어 급소는 피했지만, 이번에는 종아리에 상처가 벌어졌다.

촤악! 푹! 촥!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상처가 하나씩 늘어났다.

인지의 영역을 넘어선 마일로의 속도는 대처가 불가능했다.

마치 정지된 세계에서 마일로 혼자만이 움직이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드물게도 다급해진 이네스가 빠르게 조언했다.

평소였다면 이안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을 그녀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여유가 허용되지 않았다.

[이안! 심적으로 몰려서 생각을 못하고 있잖아요!]

“끄읍! 하지만 속도가.......!”

[맞아요. 저자의 속도는 초인의 그것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아요. 당연히 신체가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죠.]

그 사이에도 마일로는 멈추지 않았다.

촤악!

옆구리쯤의 살이 패어 나갔다. 아니, 옆구리가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은 상처를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그때까지 못 버텨요!”

[잘 봐요. 마일로는 분명 빠르지만, 자기 몸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어요. 신체의 힘에 본인의 역량이 못 따라오고 있는 거죠.]

갑작스럽게 엄청난 힘을 얻으면, 그걸 제대로 제어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지금까지 이안이 살아 있는 이유가 그 증거.

이안의 본능적인 움직임이 급소를 지키는 것도 맞았지만, 마일로가 제대로 찌르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이네스가 말을 쏟아냈다.

[아직 패배하지 않았어요 이안. 침착해요. 이안은 지금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그건 아무렇게나 움직인다는 거죠.]

“하지만…….”

어떤 순간에라도 생각을 멈추지 말라고. 먼저 생각을 그만두는 쪽이 진다고.

이네스가 예전에 해주었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네스님이 맞아요.’

[반응하고 움직이면 늦어요. 그러니 지금 마일로의 움직임을 보고 상상해요. 마일로가 어떤 자세로. 어떤 궤적으로 움직일지 상상하고, 미리 움직여요.]

‘말이 쉽지……. 지금 마일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고요.’

이안은 불평하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파악! 상처 하나가 더 생겼다.

뜨거운 피가 다리를 타고 흘렀다.

피를 너무 흘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 아찔한 기분이. 도리어 어떤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다.

‘더럽게 빠르지만. 그래도 잘 생각하면……. 그 움직임을 추측할 단서는 있어.’

이안은 몸에 새겨진 상처를 살폈다. 그 상처가 난 깊이나 각도를 유심히 살폈다.

또한 마일로가 잠깐 멈춰서는 위치를 머리에 떠올렸다.

머리에 부는 바람도 훌륭한 단서다. 각도와 거리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코헨의 사내들이 쓰는 단검술. 단검술에 대한 관찰과 고찰은 이미 충분히 해왔다.

이제 그 모든 정보를 종합해 마일로의 궤적을 예측하기만 하면 된다.

‘말은 쉬운데…….’

대부분의 검사에게는 꿈에서도 닿을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젓는 이들이 다수일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평범한 검사와 다르다.

초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천재의 재능을 물려받은 이안은 다르다.

애초에 가능하니까 이네스도 조언했을 터.

이안은 반드시 해야 한다 생각하고 집중했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릿속의 무언가가 뚝하는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암전했고, 그 새까만 공간에 있는 건 오직 이안과 마일로였다.

이 기묘한 감각에 이안이 두 눈을 부릅떴다.

“.......!”

그가 미처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역수로 쌍 단검을 쥔 마일로의 흐릿한 실루엣이 느리게 달려와 그대로 이안을 베고 지나갔다.

실제는 아니었다.

그저 허상이었고, 이안의 상상이 만들어낸 미래의 마일로였다.

당황한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다시 집중력이 풀리면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 어.......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봐요. 하면 되잖아요.]

‘원래 이렇게 쉽게 되는 건가요?’

[당연하죠. 누구 제자인데요.]

그때쯤.

마일로가 멈춰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의 상태는 척 봐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쉽게 죽지 말라고 했더니 더럽게 잘 버티네. 이제 끝내자.”

마일로의 신형이 흐려졌다.

이안은 이제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안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빠르게 달려오는 상상의 마일로가 다시 눈에 아른거렸다.

이안은 검을 양손으로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투수의 공에 배트를 가져다 대는 것처럼, 그저 가져다 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곳에 마일로가 알아서 부딪혀 왔다.

캉!

“무슨……!”

지금이었다.

마일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은 이때.

검과 검이 부딪혀 속도가 늦춰진 이때.

초인의 영역에서 움직이던 그가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온 이때가 마지막 기회다.

이안이 외쳤다.

“호크으으으!”

팟!

이안의 손위에서 시작된 섬광이 주위에 퍼져나갔다.

급해서 제어할 틈도 없었다.

그저 최대 출력으로 모든 걸 쥐어짰다.

빛이 퍼졌다.

아무리 초인이라도 빛보다 빠를 수는 없다.

강한 빛이 눈동자를 때리고.

이안. 마일로. 둘 다 시야를 잃었다.

‘죽여야 해!’

마지막 기회다.

마일로가 시야를 되찾기 전. 지금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 이안도 마찬가지로 시야를 잃었는데.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서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내가 저 놈보다 빨리 회복해야 해. 어떻게든 앞만 볼 수 있다면……!’

보고 싶다. 아니. 봐야만 한다.

목숨이 걸렸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다.

그리고 그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걸까?

시야가 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래 보던 세상과 다르다.

무지개색으로 찬란하고 화려한 색감들.

이건 인간의 시야가 아니다.

이건…….

“핍!”

“이런 씨, 믿고 있었다고!”

손 위에 자그마한 호크를 얹고. 이안은 달렸다.

저기 마일로가 비틀거리며 갈피를 못 잡는 게 보였다.

당황해서 스스로의 몸도 제대로 제어가 안되는 듯 했다.

이안은 입을 꽉 깨물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 검을 내질렀다.

푸욱!

성검이 마일로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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