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이용하거나 이용당하거나
마일로의 시야가 되돌아왔다.
마일로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가슴에 칼날이 비죽 솟아 있었다.
“하, 나 참. 어이가 없군.”
꾸득.
단단하게 부풀었던 마일로의 근육이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약효가 다해가던 차에 치명상을 입고, 부작용까지 함께 찾아와 더는 신체가 버텨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일로는 이안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저 멀리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이쪽을 보고 있던 잭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일로는 주머니를 뒤졌다.
새하얀 손수건을 꺼냈다.
가슴에서 흐른 피에 적셔진 상의를 신경질적으로 닦았다.
“에이씨. 더러워졌네.”
그게 마일로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마일로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 눈을 감지 않았다.
마치 이 이후의 일도 자기가 지켜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 섬뜩했다.
이안은 조심히 가슴에 박힌 성검을 뽑아냈다.
그제야 마일로의 부하들이 다가와, 마일로의 시신을 조심히 옮겼다. 마일로의 부릅뜬 눈을 천천히 감겨주었다.
이안은 긴장했다.
마일로와의 싸움으로 몸 상태가 영 아니었다.
여기서 마일로의 부하들이 덤벼들면, 피곤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괜한 걱정에 불과했다.
남아 있는 마일로의 부하 중 가장 서열이 높아 보이는 사내가 이안을 보며 짧게 한마디 했다.
“우리는 그저 약속대로 할 뿐입니다.”
그리 말하곤 조용히 물러갔다.
구태여 그들을 붙잡는 이들은 없었다.
멍하니 서 있던 이안에게 잭이 부축을 받고 다가왔다.
갈라진 가슴을 급하게 꿰맨 흔적이 눈에 띄었다.
살아 있는 게 용한 상태였다.
잭이 힘겹게 말했다.
“가, 갚을 수 없는 빚을 져 버렸군.”
“몸은 좀 괜찮아? 당장 숨이 끊어져도 안 이상한 것 같은데.”
“겨우 이 정도로 죽었으면, 진즉에 목숨을 잃었을 거다.”
잭이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안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실 지금 다른 사람을 걱정해줄 상태가 아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지속되던 긴장과 집중 상태가 풀리자, 졸음과 피로가 급격히 몰려들었다.
‘뒷일은 대충 맡겨두면 되겠지.’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직전.
이안은 문득, 마일로와 그 부하들에 대해 떠올렸다.
놈의 부하들은 마일로의 죽으라는 말 한마디에 주저 없이 목숨을 던지곤 했다.
마일로 역시 마찬가지다. 필요하다면 거리낌 없이 목숨을 내던졌다.
그들은 그걸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다. 동료가 약의 효과에 취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딘가 뒤틀린 동료애. 혹은 전우애.
이안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남을 위해 확실한 죽음에 발을 들여놓다니. 이안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감탄스러운 마음 뒤에 숨겨진 어떤 아련함을 느꼈다.
이안은 떠올렸다.
자신에게도 한때 저토록 신뢰하고 또 좋아했던. 동료라는 게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
이안의 정신 속. 홀로 좁은 방안을 배회하던 이네스가 문쪽에 시선을 돌렸다.
이네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달칵.
“......!”
문이 열렸다.
이안이 죽은 듯이 기절해 있는 지금, 굳게 닫혀 있던 또 하나의 기억이 이네스의 침입을 허락했다.
‘…….’
이네스는 잠시 심호흡했다.
이안이 좀 더 마음을 허락해준 건 기쁜 일이지만, 굳게 닫혀 있던 이 기억은 분명 좋은 경험은 아닐 것이다.
저번. 도박 폐인처럼 살아가던 이안의 모습보다 오히려 더 어두운 기억일 터.
어떤 모습을 보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필요했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힌 이네스는 힘껏 문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와아…….”
신기한 공간이었다.
공기는 매캐했고, 저 멀리에 높다란 건물들이 하늘을 찌르며 서 있었다.
시선을 옮기니 기묘하게 생긴 쇠 전차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빠르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
대륙에서 가장 번화한 황도에서도 느낄 수 없었을 법한 혼란스러움이 이곳에 있었다.
‘그동안 이안의 창밖으로 봐 왔던 풍경이 사실 이런 곳이었나.’
굳어 있던 이네스는 감에 의지해 어떤 골목으로 들어갔다.
시장으로 보이는 곳이었는데, 옷가게가 거리에 쭉 늘어서 있었다.
생전 보지 못했던 생소한 디자인의 옷이 가득했다.
이네스는 거리에 가득한 행인들을 제치며 걸었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다 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한번 구경만 하고 가세요!”
이안이다.
저번에 봤던 이안의 모습이 20대 중후반의 폐인이었다면, 이 시기의 이안은 기껏해야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평소 보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앳되고, 눈에는 희망인지 꿈인지 모를 생기가 가득했다.
‘상인…… 그러고 보니 이안은 가끔 그런 쪽에 빠삭한 모습을 보였죠.’
이안의 호객 행위에 손님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이안의 모습을 보고 호감을 보였다. 적어도 이곳에서 이안의 외향은 단점이 아니었다.
그렇게 땀 흘려 일하길 한참. 손님의 뜸해졌을 시간에, 안쪽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던 사내가 이안을 불렀다.
“많이 팔았다. 이제 좀 쉬어라.”
“예 형.”
이안이 형이라 부른 사내는 담배를 입게 꼬나물고 있었다.
신체를 흘끗 보니 단련한 흔적과 더불어, 알 수 없는 문자들로 문신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인 사내가 말했다.
“후우. 네가 여기서 일한 지 벌써 3개월이던가?”
“3개월하고 2주예요.”
“시간 참 빠르네. 너 드래프트에서 지명 못 받고, 백수처럼 살고 있다는 얘기 들었을 때가 벌써 엊그저께 같은데.”
“하하. 그런가요?”
이안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사내는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아 들인 뒤, 내뱉었다.
그 연기에 이안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표정을 폈다.
사내가 말했다.
“형이 인마. 너 잘할 줄 알았다니까? 너는 어. 선수로 있을 때부터 싹수가 보였어.”
“하하…….”
“그래서 말인데. 요즘 장사도 잘 되고 하니, 형이 사업 확장을 할 생각인데. 어때. 나랑 같이 사장님 소리 듣고 싶지 않냐?”
이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이 가게가 비싼 월세를 감당할 정도로 그렇게 장사가 잘 되는지 의문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잡생각을 지워 버렸다.
이안의 표정을 본 사내가 흡족히 웃으며 말했다.
“가게도 좀 키우고, 어. 요즘 온라인 쇼핑몰이 핫하다니까 그쪽으로도 진출 좀 하고. 어때.”
“조, 좋죠.”
“좋지? 형이 생각해도 기가 막힌 아이디어라니까. 근데 그걸 하려면 자금이 좀 필요한데…….”
그때 당시를 회상하면, 이안은 참으로 순진하고 멍청했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는 너무 어렸고. 큰 실패와 실의에 빠져 기댈만한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으며. 그 사내는 한때나마 같은 팀에서 같은 꿈을 꾸며 동고동락하던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믿었다.
그리고 배신당했다.
사내가 잠적하고. 홀로 남은 휑한 가게에 사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는 약 올리는듯한 짤막한 문장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인생은 이용당하고 버려지거나 이용하고 버리거나 둘 중 하나. 언젠가 형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다.]
머리를 강타하는 배신감과 충격.
그때 느꼈던 분노는 도망친 사내와 자신에게로 향했다.
깊은 자기 혐오는 마음을 갉아먹었고 그렇게 이안은 폐인이 되었다.
“…….”
그 모습을 이네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리에 서서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이네스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이안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 건 분명 기뻐 마땅한 일이었지만, 가슴을 조이는 아픔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
“아오 두야.”
이안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별로 달갑지 않은 꿈을 꿨다.
마일로나 다른 이들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부럽다고 생각해 버린 게 원인인 것 같았다.
이안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물었다.
“이네스 님?”
이안이 기억하기로 그가 기절하면 이네스는 밤 내내 혼자였다.
그래서 평소에는 이안이 깨어나자마자 이네스가 신나서 아침 인사를 건네곤했다.
하지만 오늘은 묘하게 잠잠했다.
[아. 일어났나요? 몸은 좀 괜찮아요?]
뒤늦게 말하는 이네스의 말투가 어딘가 이상했다.
뭐라 해야 할까.
그 목소리에 담긴 건 동정이나 연민과 같은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자존심 강한 이안이 가장 싫어하는 류의 대우였다.
그게 설령 그토록 믿고 따르는 이네스라 해도 말이다.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말았다.
“뭐예요. 왜 그런 목소리에요. 또 뭐라도 봤어요?”
[아. 저는…….]
당황한 이네스가 말을 머뭇거렸다. 대충 상황이 짐작되었다.
이안이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네스 님이 제 과거의 어떤 부분을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지난 일이에요. 그걸 보고 측은하게 여기거나 그러지 마세요.”
이네스는 말을 잃었다.
이안의 이런 반응은 그의 마음이 강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방어기제일까.
이안은 어떤 때는 놀랄 만큼 유연하게 행동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뾰족하게 행동할 때도 있었다.
마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이네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기분 나쁘게 했다면 사과할게요.]
‘뭐. 다음부터 안 그러면 상관없어요. 그것보다 나와, 호크.’
이 화제는 이걸로 끝.
이안은 손 위에 빛나는 병아리를 올려다 놓았다.
“핍!”
“그래. 고생 많았다.”
마일로와의 전투의 마지막 순간. 이안은 호크의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정령에게 전해진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이안에게는 특히 생존만큼 강한 욕구는 없는 것 같으니까요.]
아슬아슬한 싸움이었다.
마일로가 수명을 깎아서 싸움에 임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검술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거나, 정령과의 감각 공유를 깨치지 않았다면 싸움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원래 게임에서 마일로는 그렇게 강해지지 않아. 기껏해야 단검을 날리면서 귀찮게 하는 정도지. 하지만 그건…….’
수명을 포기한 마일로의 힘은 순간적이지만, 초인의 영역에 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
‘애초에 게임에서는 두 조직이 이렇게 결투를 벌인다는 이벤트가 없었으니. 그런 변수가 만들어진 건가.’
역시,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변수를 만들어내는 건 위험을 동반했다.
그만큼 이번에 얻는 게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섬뜩했어.’
마일로의 위용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게다가 황태자나 그 부하들. 그리고 악마까지.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들이 그것보다 더 강하다 생각하니 절로 막막해졌다.
‘죽지 않으려면 여기서 더 강해져야 한다.’
이안은 새로이 강하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번 전투의 공은 명백히 호크에게 있다.
평소 묘하게 데면데면하던 이안도 이번만큼은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이안이 괜스레 살갑게 말했다.
“아이고. 고맙다.”
“핍!”
“상으로 뭐라도 주고 싶은데.”
그간 여러 값비싼 음식을 줘봤지만, 호크는 당최 아무것도 먹으려고 들지 않았다.
그나마 지붕 위에 올라가 햇볕을 쐬는 걸 좋아하는 정도.
이안은 괜스레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다 우연히 허리춤에 걸린 요술 주머니에 손이 걸렸다.
“아. 이런 것도 있었지.”
지금은 동전 꾸러미로 쓰고 있지만, 한동안 돈을 사용할 일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 감옥에 내려가려면 이 주머니 정도 외에는 못 숨기는데.’
이안은 돈이 잘 있나 확인하기 위해 요술 주머니를 손바닥 위에 뒤집었다.
짤랑.
동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동전들 틈에서 강한 생명력을 품은 푸르른 잎사귀가 눈에 띄었다.
‘나바혼이 답례로 줬던 어머니 나무의 잎.’
솔직히, 그 용도를 몰라서 주머니에 처박아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음을 담아준 나바혼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곤란한 종류의 선물인 것이다.
그때.
손바닥 위에서 아장거리던 호크가 눈을 빛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그 눈동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핍!”
녀석은 잎사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노골적인 반응에 이안이 별생각 없이 잎사귀를 내밀었다.
“먹을래?”
“핍! 핍!”
맹렬하게 달려든 호크가 잎사귀를 빠르게 쪼아 먹었다.
그제야 이안은 아차 싶었다.
‘아. 이거 되게 소중한 물건인 거 같던데, 먹이로 줬다고 하면 나바혼이 화내지 않으려나.’
뒤늦게 남은 잎사귀라도 빼낼까 했을 이미 너무 늦었다.
생명력 가득한 잎사귀를 모두 먹어치운 병아리의 몸이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돌연.
호크의 몸에서 더 강한 빛무리가 뿜어져 나오며, 그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