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고대인의 요람
“던전! 던전이다!”
한 죄수의 외침에 죄수와 간수들 모두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지금껏 흙으로 통로가 막혀 있던 것과 달리, 깨끗하게 뚫린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한 간수가 중얼거렸다.
“한눈에 봐도 규모가 엄청난 것 같군. 어쩌면 엄청난 보물들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겠어.”
지하 유적에서 유물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금까지처럼 흙을 파내 그 안에 묻혀 있는 유물을 발굴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이렇게 때때로 등장하는 던전을 탐사하는 것.
던전에는 진귀한 보물과 아티팩트가 묻혀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간수가 이안에게 말했다.
“훌륭하다 일칠삼육! 네 직감대로 정말로 대단한 게 묻혀 있었군.”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알지 모르지만, 던전의 탐사 역시 죄수의 일이다.”
던전은 위험하다.
언제 괴수 튀어나오거나 치명적인 함정을 마주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간수들은 절대 던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일단 게임에서와 지형이 비슷한 거 같네요. 이네스 님. 느껴지나요?’
[예. 이 공간 어딘가에. 성검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이안에게는 기꺼운 일이었다.
예상보다도 더 빨리 목표를 이루게 생겼다.
이안은 간수에게 결연한 얼굴을 연기하며 말했다.
“제가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호, 혼자? 미쳤나? 던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나?”
“잘 압니다.”
“그러면 왜…….”
간수는 이안을 말리려 했다.
이미 요 지금까지의 실적과 이 던전을 찾아낸 것으로 이안의 능력은 입증되었다.
쓸모있는 죄수를 허무하게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이안이 말했다.
“물론. 위험한지 잘 알고 있죠.”
“그렇다면…….”
“제가 말 안 했던가요? 이곳에 오기 전에 저는 모험가였습니다. 던전 탐사는 제 주특기입니다.”
모험가. 용병과 탐험가, 그리고 유물 도굴꾼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그들은 유적 탐사의 귀재들이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구현된 직업이었고.
모험가라는 말에 간수가 탄성을 내뱉었다.
“아. 모험가! 그렇군. 그래서 그렇게 유물을 잘 발굴하던 거였어. 이제 이해되는군.”
“예. 뭐, 그런 셈이죠. 그리고 제 모험가로서의 감이 말하는데, 이 던전 안에는 엄청난 보물이 잠들어 있을 겁니다.”
이안은 간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할당량을 모두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유물이 있을지도 모르죠. 간수님이 몇 개를 슬쩍해도 모를 정도로.”
꿀꺽.
군침을 삼킨 간수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듣고 있던 다른 간수들도 마찬가지. 한 간수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도 혼자서는 너무 위험하지 않나?”
“오히려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려와 봤자 방해만 될 뿐입니다.”
“미리 다른 죄수들을 밀어 넣어 함정을 제거하는 건? 죄수가 몇 명이 죽든, 던전 탐사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상관없어. 다른 구역 간수들도 불평 못 하겠지.”
아무렇지 않게 죄수들을 고기 방패로 사용하자는 의견에 이안의 입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람이 많이 들어가면 오히려 구조가 뒤틀리는 던전도 있습니다. 저 혼자서 들어가는 게 가장 낫습니다.”
“그런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지만 간수들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이안이 모험가 출신이라니, 그런가 보다 하는 눈치였다.
“다만, 한가지 필요한 게 있습니다.”
“말해보도록.”
“일단 다리에 쇠사슬을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던전에서는 발이 빨라야 하는지라…….”
서로 눈짓으로 대화를 나눈 간수들이 승낙했다.
“알겠다. 그동안 보여준 신뢰가 있으니 특별히 풀어주겠다. 하지만 무기나 다른 장비를 줄 순 없어.”
“아, 그 정도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대신 식량을 좀 준비해주십시오. 어쩌면 탐사가 오래 걸릴 수 도 있으니까요.”
“좋아. 바로 준비하지. 언제 출발할 거지?”
“준비되는 대로 바로요.”
간수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다른 죄수들은 이제 반대 방향으로 가 다시 땅을 파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자신들을 던전에 밀어넣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게 모두 이안의 덕분인 것을 잘 알았다.
“감사합니다. 이안 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조심하셔야 해요.”
“꼭 무사히 돌아오시길 바랄게요.”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을 배웅이라도 하듯.
죄수들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그 사이에서 홀로 고심하던 레이먼이 말했다.
“나도 가지.”
“예?”
이안의 반문에, 레이먼이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여러모로 아는 게 많네. 이 유적에 대해서도 꽤 오래 연구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절대 폐가 될 일 없게 하겠네. 내가 봤을 때…… 이 던전이야말로 이 유적의 핵심이야. 난 이 끝에 뭐가 있는지 내 두 눈으로 보고 싶네. 그러니 부디 데려가 주게.”
레이먼이 고개를 숙이며 간절한 어조로 부탁했다.
이안은 조금 곤란했다.
‘어떻게 하죠? 솔직히 저 혼자는 몰라도, 레이먼은 위험할 수도 있는데…….’
[결심을 굳힌 눈이에요. 죽음 정도는 이미 각오한 거겠죠. 어차피 이안과 함께 가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들어올 거에요. 그러면 굉장히 위험할 거고, 그건 이안도 원치 않죠?]
‘찝찝하겠죠.’
[게다가 유적에 대해 연구를 했다고 했잖아요. 어쩌면 이안이 알지 못했던 걸 발견할 수도 있어요.]
유적의 난이도에 대해서 생각하던 이안도 결정을 내렸다.
레이먼이 별 도움이 될 거 같지는 않았지만, 크게 방해가 될 거 같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염치없는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줘 고맙네.”
“어서 준비하시죠. 어르신 사슬까지 풀어달라고 말을 해놓겠습니다.”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간수들은 둘이 하루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챙겨주었고,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종이와 잉크도 준비해주었다.
지도를 그리는 역할은 레이먼이 맡았다.
“꼭 한꺼번에 탐사를 맡을 필요는 없으니 조심하도록.”
“갔다 오겠습니다.”
“자! 뭣들 구경하고 있어! 빨리 가서 일들 해!”
찰싹!
간수의 채찍질 소리와 함께 죄수들이 흩어지고, 이안과 레이먼은 길을 따라 조심히 걸었다.
오랜만에 발이 가벼운 느낌에 어딘가 홀가분했다.
그렇게 계속 안쪽을 걷다가 간수들이 안 보일쯤. 이안은 품을 뒤져 요술 주머니를 꺼냈다.
“……그게 뭔가?”
이안은 말없이 요술 주머니를 뒤집어 내용물을 쏟아냈다.
레이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요술 주머니……!”
“꼭 필요한 물건들 정도는 넣을 수 있죠.”
이안은 성검을 집어 들어 홀스터와 함께 허리에 매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이 묵직한 감각이 제법 반가웠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안이 슬쩍 검을 뽑아 날을 살피자, 레이먼은 눈매를 좁히며 성검을 쳐다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투박하지만…… 대단한 명검이군.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난 겐가?”
“오. 안목이 있으시군요.”
지금껏 성검의 진가를 알아본 이는 레이먼이 처음이었다.
뿌듯한 미소를 지은 이안은 다시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넓은 아치형 통로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까마득히 먼 옛날에 지어진 구조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멀쩡했다.
레이먼은 감탄했다.
“멸망한 고대 제국의 기술 수준은 지금보다 아득히 뛰어났다고 하네. 그들이 남긴 유물들은 지금도 제대로 작동해, 아만 그놈이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지.”
“시장은 대체 왜 이렇게 유물을 발굴하는 데에 혈안인 거죠? 멀쩡한 시민들을 잡아다 죄수로 부리면서까지.”
“그거야 그놈이 탐욕에 눈이 먼 놈이기 때문이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레이먼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은 코헨의 자치를 인정해주는 대가로 매년 천문학적인 금액을 요구하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니. 발달한 상업과 약을 판 돈으로 겨우 충당하고 있었지. 아만은 그게 마음에 안 들었을 거네.”
레이먼이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이었다.
“하지만 저항하고 싶어도 제국은 너무 강력하네. 코헨은…… 제국과 비교하면 어른과 어린아이 정도지.”
“그러다 이 유적을 발견한 거군요.”
“발견 자체는 좀 오래되었네. 하지만 이 안에 뭐가 있을지 몰라 아만을 제외한 다른 다섯 가문들은 발굴을 반대했지.”
당연하게도, 아만은 실권을 쥔 이후 적극적으로 유적의 발굴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아티팩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른과 어린아이라도, 아이의 손에 무기가 들려있으면 얕잡아 볼 수 없는 법이지.”
“아만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레이먼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이안이 물었다.
“어르신은 코헨이 이길 수 있다고 보시나요? 제국을 상대로?”
“불가능하네. 나는 코헨을 사랑하지만, 안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아만은 이 아래에서 강력한 아티팩트를 찾아내면 가능할 거라 믿는 눈치였지만.”
코헨의 명줄이 경각에 달했다.
그 사실을 레이먼은 너무나 잘 알았다.
“아마 제국에서도 이 유적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채고 있을 거네. 아티팩트가 펑펑 솟아나는 광산이라니. 제국에서 가만히 두겠나? 전쟁은 필연적이고, 코헨은 얼마 안 가 멸망할 것이네.”
평생을 몸담아 왔던 가문도. 어떻게든 지키고 싶던 고향도 모두 사라질 운명에 놓인 노인의 마음이 어떨지, 이안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레이먼이 한 맺힌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껏 너무 많은 소중한 것들의 끝을 봤어. 그리고 또 보겠지. 이미 삶에 미련은 없네. 하지만 문득 한가지가 너무 궁금하더군.”
“……뭡니까.”
“고대 제국이. 그 찬란하고 위대했던 그 제국의 끝이 어땠는지. 나는 그걸 알고 싶네. 그리고 아마도 그에 대한 해답이 이곳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 같군.”
죽음을 각오한 눈빛.
삶에 미련이 없다는 말은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각오와 함께 호기심이라는 감정도 함께 빛나고 있었다.
레이먼은 끝까지 학자로서 죽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동행을 허락한 이상, 이안은 어떻게든 노인의 마지막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이 던전의 끝에 노인이 원하는 게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검은색 벽이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레이먼이 조심스레 벽을 두드렸다.
“막다른 길인가? 굉장히 단단해. 대체 무슨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짐작도 안 가는군. 손잡이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겠나?”
‘보자. 이 던전을 여는 조건은…….’
다행히 아직 머릿속에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이안은 간수가 챙겨준 횃대에 불을 붙였다.
그다음, 횃불을 문에 새겨진 문양에 가져다 대었다.
“지금 뭐 하는…….”
드르르르륵.
굉음과 함께 벽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동시에 안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얇은 죄수복을 뚫고 몸속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레이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갑자기 추워지는군.”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는 견딜만해. 그 정도로 약골은 아니야. 하지만 왜 유독 이 안쪽이 이렇게 추운지 모르겠군.”
어떤 장치로 낮은 온도를 유지하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는 안쪽에 고여 있던 냉기가 이제야 밖으로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공기에서 아주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안쪽으로 조심스레 발을 디딘 레이먼이 벽면을 살폈다.
“지금까지와는 구조는 똑같은 것 같지만…… 벽면에는 마법인지 뭔지 모를 문양이 빼곡히 적혀 있군.”
“글자도 적혀 있어요. 무언가의 그림도.”
게임에서는 그냥 지나칠 뿐인, 조금 짜증 나는 적들이 나올 뿐인 그저 그런 던전 중 하나에서 이안은 처음으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무언가 이안의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이안은 이 오래된 공간에 압도당해 그대로 우뚝 멈춰섰다.
반면, 레이먼은 황홀한 표정으로 벽에 새겨진 글자와 그림들을 살폈다.
그림은 일부러 누구라도 알아보게 새겨진 것 마냥 굉장히 단순했다.
레이먼이 중얼거렸다.
“하하. 돌을 갈아 도구로 사용하던 원시인들도 이런 식으로 동굴 벽에 그림을 남겼었지. 이토록 발달한 문명이 결국 원시의 방식으로 정보를 남겼다니, 아이러니하지 않나?”
멍하니 있던 레이먼이 퍼뜩 벽에서 떨어졌다.
“이크.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도 모르게 신을 냈군.”
“걱정하지 마세요. 함정은 없으니까.”
“그건 어떻게 확신하나?”
게임에서 없었으니까 이곳에서도 없을 거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요.”
“허어. 싱겁긴.”
“하지만 다른 것들은 있죠.”
철컥 철컥 철컥.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유적의 수호자들이 다가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