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83화 (84/222)

83. 고대인의 요람(2)

구체형의 몸통에 눈동자처럼 보이는 큼지막한 보석. 두 개의 다리. 네 개의 기계 팔. 네 자루의 톱날 검.

지금껏 마주쳤던 가고일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였다.

가고일은 살아 움직이는 석상이었다면, 이쪽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라 할까.

우웅.

푸른색으로 빛나던 보석이 이안과 레이먼을 보자 붉게 점멸했다.

유적의 수호자들은 아무래도 침입자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레이먼이 기겁했다.

“이런 정교한 기계들이 아직까지도 작동을 하다니…… 그보다 숫자가 너무 많네. 도망쳐야 해!”

“어르신은 뒤로 물러서세요. 방해되지 않게.”

“아, 알겠네.”

이안은 품을 뒤져 단검 두 자루를 들었다. 마일로에게서 얻은 활공하는 단검. 이안은 곧장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카창! 팍!

단검 두 자루가 기계 수호자 둘의 보석에 각각 박혀 깊이 들어갔다.

보석은 수호자의 약점이었다.

“우웅.”

콰쾅!

몇 번 빛을 깜빡이던 수호자의 몸이 이내 폭발하더니, 주위에 충격파가 들이닥쳤다.

먼지의 폭풍이 주위 시야를 제한했다.

그 폭풍을 뚫고 수호자들이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수호자들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동작으로 네 자루의 검을 동시에 휘둘러댔다.

카가각!

성검과 톱날 검이 부딪힐 때마다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렸다.

어느 쪽 검이 지르는 비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드브레이커라고 부르는 무기에요. 저 톱날에 맞대면 웬만한 무기는 엉망진창이 될 거에요.]

‘성검이라 참으로 다행이네요.’

게임에서도 무기 내구도를 줄여 파괴하는 식으로 귀찮게 굴던 적들이다.

이안은 최대한 톱날에 맞닿지 않게 검을 조절했다.

성검 자체는 매우 단단하니, 깨질 염려는 없다. 하지만 저 톱날에 성검이 맞물리면 수호자들은 검을 비틀어 움직임을 봉쇄하려 했다.

상대가 하나면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다수의 적들을 상대로 한순간이라도 움직임을 제한당하는 건 큰 부담이었다.

‘기계라 그런지 좀 까다로운 부분이 있네요.’

마음이 없는 기계이기에 심리를 읽을 수 없다.

수호자들은 오로지 침입자를 배제한다는 목적에 충실했고, 자기가 파괴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없기에, 오히려 상대하기가 쉬운 부분도 있었다.

‘다 읽혀. 똑같아. 게임이랑.’

게임에는 패턴이라는 게 존재한다.

데이터로 이뤄진 게임 캐릭터는 결국 설정된 패턴대로 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곳은 게임이 아니다.

캐릭터의 패턴은 습관이나 버릇 같은 것으로 남아 있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싸움 중에 갑자기 변하는 경우도 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심리전을 걸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수호자들은 다르다.

기계답게 게임에서와 행동하는 방식이 완전히 같았다.

한마디로 변수가 없다는 소리였고, 변수가 없다면…….

‘무조건 체급 높은 쪽이 이기는 거지.’

이안이 왼손을 성검에서 뗀 뒤 손바닥을 펼쳤다.

후욱.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단검이 이안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그 즉시 오른쪽에서 접근하던 수호자의 보석에 깊숙이 박아 넣은 뒤, 힘껏 걷어차 저 뒤로 날려버렸다.

퉁퉁.

구체형의 수호자는 데굴데굴 구르며 밀려났고, 이내 당구공이 다른 공에 부딪히듯.

다른 두 수호자와 부딪힌 뒤 요란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이 까다로운 놈들이야. 가까이에서 즉사시키면 안 돼.’

수호자들이 상대를 붙잡아 두는 식으로 싸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반대로 말하면, 그것만 신경 쓰면 별거 없는 놈들이었다.

콰직!

성검의 손잡이로 내리치고, 놈들의 보석에 주먹을 박아놓고, 다시 단검을 불러들여 내리찍고.

변수도, 위기도 없는 싸움이 지나갔다.

캉!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수호자를 이안이 힘껏 걷어찼고, 그걸로 끝이었다.

이곳에 서 있는 건 오직 이안 뿐이었다.

“얘네는 그래도 피를 안 흘려서 좋네. 냄새도 안 나고. 움직이느라 몸도 좀 따뜻해졌고.”

이 정도는 가벼운 몸풀기에 지나지 않는다.

강적은 저 안쪽, 목적지의 끝에 있으니 말이다.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던 레이먼이 다가왔다.

“신이시여. 맙소사. 이걸 자네 혼자 다 해치운 건가?”

“신을 믿고 계신지는 몰랐네요.”

“말 돌리지 말게. 허. 이제는 놀랍지도 않군.”

레이먼은 수호자들의 잔해를 살폈다.

널브러진 기계와 하나 같이 산산이 조각난 보석을 살폈다.

“보석 안에 깃든 힘으로 움직이는 건가? 너무 오래되어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군.”

“낡아서 그런지 많이 약해진 거 같긴 하더라고요. 원래 이렇게 잘 부서지는 물건은 아니었을 텐데.”

“시간 앞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어쩔 수 없다…… 인가. 어쨌든. 적은 이게 전부겠나?”

“전부는 아니겠죠. 하지만 바로 안 달려오는 걸 보면 아마 제대로 작동하지는 않는 거 아닐까요?”

레이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마음껏 벽면에 새겨진 그림과 문자들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안은 활공하는 단검을 다시 회수하면서 레이먼에게 물었다.

“뭐 알아낸 거라도 있어요?”

“음! 음! 문자의 틀 자체는 비슷한 구조가 많아서 대강은 읽어볼 수 있겠어. 그렇군. 그래서 그런 거였어.”

레이먼은 벽면을 정신없이 훑었다.

“고대의 제국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보물을 함께 묻는 문화가 있었네. 아나?”

“음. 처음 듣는 얘기네요.”

“보게! 방금 놀라운 사실 두가지를 알아냈네!”

레이먼이 검지를 들어 벽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벽화였다.

건물들과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

사악한 형상을 한 어떤 존재.

모습을 감춘 태양.

눈과 얼음이 흩날리는 세상.

바닥을 파 내려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서 몸을 누이는 사람들.

레이먼이 중얼거렸다.

“이곳은 원래 제국의 황도가 있던 곳이네. 그리고 또한…… 거대한 무덤인 셈이야. 제국인들은 이곳에서 영원한 잠에 빠져든 걸세.”

***

영원불멸의 위세를 누리던 제국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악마가 나타났고, 격전 끝에 제국은 악마에게 패배했다.

대륙이 얼어붙고, 절망한 제국인들은 깊은 지하로 파고들었다.

레이먼의 해석이었다.

“모든 것은 결국 끝을 맞이하네. 제국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들은 그걸 너무나 잘 알았던 걸세. 그들은 모든 걸 포기하고, 겸허히 자신의 끝을 받아들였지. 이곳에서 유독 아티팩트가 많이 발굴되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거네.”

“모든 걸 다 포기했다라…… 그렇다면 굳이 수호자들을 이렇게 배치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자기 무덤을 훼손하는 걸 반가워할 사람이 어딨겠나.”

레이먼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온 증거로는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이안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어찌 됐든 마지막 호기심을 해결한 레이먼은 굉장히 기꺼운 모양이었다.

제국인들과 자신의 운명을 겹쳐보았는지, 혼자서 중얼거렸다.

“스스로의 끝을 겸허히 받아들이다니. 멋있군. 그리고 기품이 있어. 존경스러울 정도야. 이들처럼 나도 이 감옥에서 내 묫자리를 만들 수 있다면…….”

“일단 더 들어가 보죠.”

“음?”

“아직 벽화가 계속 이어져 있잖아요. 계속 보자구요.”

레이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안은 레이먼과 함께 벽화를 보았다.

무덤에 몸을 누이는 사람들.

굳게 닫혀가는 무덤의 문.

수호자들로 보이는 존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양.

너무나 밝은 태양.

레이먼이 눈매를 좁히며 글자를 해독했다.

“태양? 태양이 도래…… 아니. 돌아온다?

같이 벽화를 본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머릿속에 낀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공교롭게도 레이먼과는 조금 다른 해석이었지만.

“아무래도 도착한 것 같네요. 들어가죠?”

“음? 으음. 그렇게 하지.”

거대한 문이 다시 나타났다.

따로 잠금장치는 없었기에, 이안은 문을 힘껏 밀었다.

기기기기긱.

오래된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레이먼이 감탄을 흘렸다.

“역시…….”

원형의 공간에 반투명한 관이 차례대로 늘어서 있었다.

관 안에는 투명한 액체와 함께 시체들이 놓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시체들은 제법 멀쩡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라 비틀어졌지만, 아직 인간 형상을 아슬아슬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안. 저 안에서 제 영혼이 강하게 느껴져요.]

‘네.’

관 사이사이의 바닥에는 잡아당길 수 있는 손잡이가 있었는데, 이네스가 가리킨 곳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안은 섣불리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황홀한 표정의 레이먼을 뒤로 당겼다.

“위험해요.”

“뭐가…….”

파스스스스.

관들에서 희끗희끗한 아지랑이가 피어나더니 천장 부근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아지랑이는 이내 형상을 갖춰갔다.

한이 가득한 얼굴에 손에든 거대한 낫. 그림에 그린듯한 사신의 형상이 그곳에 있었다.

게임에서는 ‘고대인의 미련’이라 불리던 놈이었다.

코헨 스토리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보스였고.

충격받은 레이먼이 소리쳤다.

“죽은 제국인들의 부정한 감정이 모여 만들어진 괴물인가! 그들은 자신의 최후를 겸허히 받아들이지 않았단 말인가!”

이 사이에도 사신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공격한다면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안은 저 사신이 발산하는 살기와 적의의 뒤편에서, 진한 슬픔을 느꼈다.

이안이 말했다.

“레이먼. 아까 이 고대인들이 스스로의 무덤을 파, 자기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했었죠?”

“그, 그렇네.”

“제 생각에는 조금 달라요. 이 사람들은 끝까지 발버둥 친 걸 거에요. 조금 추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악마를 막지 못한 이들에게는 대재앙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게임의 후반부에서도 악마는 대륙의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비슷한 일들이 제국인들에게도 닥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하를 깊이 파 내려가, 스스로 동면에 들었다.

언젠가 날이 따스해질 그 날을 희망하며, 실낱같은 희망에 모든 걸 걸었다.

“이렇게 실내에 냉기가 남아 있는 건, 역설적으로 벽의 단열이 너무 잘 되어있어서겠죠. 두꺼운 문이 횃불을 대자 열린 것도. 이 사람들이 이런 불투명한 관에 스스로 들어간 것도. 한가지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에요.”

잠시 호흡을 삼킨 이안이 짧게 말했다.

“태양이 돌아오기를.”

게임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던전이다. 그저 성검을 얻기 위한 통과 장소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배경을 알고 나니, 저 앞에 있는 사신이 더는 사악하게 보이지 않았다.

문득, 한가지 시도해보고 싶은 게 떠올랐다.

저들의 넋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을.

게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은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이안. 할 수 있겠어요?]

‘어쩌면요…….’

스오오오.

사신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그 거대한 낫을 이안에게 휘둘렀다.

그림자처럼 넘실거리는 낫이 이안의 목을 노렸다.

“이안! 뭘 하는 건가!”

레이먼마저 움직이지 않는 이안을 향해 소리치던 그때.

이안이 눈을 뜨며 양손을 펼쳤다.

두 손바닥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매가 스르륵 나타났다.

일반적인 빛이 아니었다. 태양처럼 포근한 빛이었다.

이미 나바혼을 치유할 때 시험해 본 적이 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피요!”

호크의 등장에 사신의 낫이 우뚝 멈췄다.

이안은 손바닥을 들어, 호크를 위로 올려주었다.

“부탁해.”

“피요오!”

당차게 대답한 호크가 위로 올라가 밝은 빛을 뿌렸다.

오래된 지하실의 한구석에 자그마한 태양이 떠올랐다.

화아아!

빛이 퍼져나가고, 가득 차 있던 냉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으어어어!”

사신은 너무나 눈이 부시다는 듯, 양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빛에 닿은 그 몸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빛에 저항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피요오오!”

마지막으로 기합을 낸 호크의 몸에서 발산된 빛이 순간적으로 사방을 메웠다.

그러자 놀랍게도.

어두웠던 지하실의 벽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반투명한 관의 뚜껑이 동시에 열리고, 안에 있던 액체가 바닥에 흘러내렸다.

햇빛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제국인들을 깨우도록 설계된 듯했다.

‘설마 진짜로 살아나나?’

이안은 관 안을 살폈다.

하지만 기적은 없었다.

시체는 그저 시체일 뿐이었다.

오히려 갑작스럽게 공기에 접촉한 시체들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간을 가득 메우던 이들의 부정한 감정도 햇빛에 눈이 녹듯. 사르르 없어지고 있었다.

이안은 사신을 보았다.

어느새 인간의 형상으로 변한 사신이 이안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

그가 무어라 말했다.

언어가 달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감정은 어째선지 전달받을 수 있었다.

감사. 악마에 대한 분노. 현재 대륙에 있는 인간들은 같은 운명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순수한 바람.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힘껏 뒤틀자 거센 바람이 천장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안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허공에 우아한 활 하나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건…….”

제국인들이 강한 염원과 바람을 담아. 다시 돌아올 태양을 간절히 기다리며 최후의 최후에 만들어낸 걸작.

게임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이 활에 손을 대자, 저절로 그 이름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태양의 활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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