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84화 (85/222)

84. 고대인의 요람(3)

태양의 활을 잡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저절로 감이 잡혔다.

이안이 시위를 잡아당기자 호크가 발산하던 빛무리가 다시 뭉쳐들어 화살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대로 퉁! 하고 놓자 섬광 한 줄기가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카가가가각!

섬광과 벽이 부딪혀 굉음이 울렸다. 단단한 벽의 한구석에 뚜렷한 상처가 남았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제국인의 영혼은 이제 여한이 없는지, 스르륵 사라져갔다.

이네스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강한 의지와 빛을 담아 함께 쏘아내는 활이라니. 대단한 보물이에요.]

‘저도 처음 보는 물건이에요.’

게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기다. 혹은, 아직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거나.

이안은 살며시 태양의 활을 어루만졌다.

재질을 알 수 없는 이 활은 밝은 갈색 바탕에 은은하게 황금빛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활대 자체는 잘 휘지만 부러지지 않는 단단함이 느껴지니, 적은 힘으로 더 멀리까지 화살을 쏘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요. 안 그래도 활이 하나 필요했는데, 잘됐어요.’

이안은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았다.

기지를 발휘해 새로운 무구를 얻었고, 강적과의 싸움도 넘어갈 수 있었다.

‘이네스 님 말대로 레이먼을 데려오길 잘했네요. 덕분에 벽화를 유심히 보게 되었으니.’

게다가 아직 하나 더 남았다.

이안은 이네스가 이끄는 상자로 가 조심히 들어올렸다.

그 안에는 잡동사니 사이에 투박한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검 날에는 회오리치는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벌써 세 번째다.

특별히 긴장하는 느낌 없이, 이안은 거리낌 없이 검을 붙잡았다.

후욱.

주위의 풍경이 환하게 변해갔다.

곧이어 나타난 건 눈 덮인 설산이었다.

설산 이곳저곳에는 과녁으로 보이는 나무에 화살들이 빼곡이 박혀 있었다.

그 뜬금없는 풍경에 이안이 어리둥절해 있자, 돌연. 화살 하나가 날아와 이안의 바로 옆 나무에 꽂혔다.

툭! 후웅.

화살이 먼저 박히고, 소리가 뒤늦게 따라올 만큼 빨랐다.

기겁한 이안이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높이 쌓인 눈 속에서 무언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익숙한 외향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다르다.

이네스지만 그 눈동자 속에 서린 빛은 훨씬 더 날카로웠다.

날이 서 있다고 해야 할까.

둘이 눈을 맞추었다.

마치 눈싸움을 하듯, 한참 동안 그렇게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활을 든 이네스가 미간을 좁히며 툴툴거렸다.

“왜 이제야 왔나요. 한참 기다렸잖아요.”

예상치 못한 불평에 이안의 말문이 막히자, 이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됐어요. 이제라도 왔으면 된 거죠.”

그렇게 말하는 이네스의 얼굴에서는 어딘가 후련함과 안도감이 엿보였다.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주위에 빼곡히 박혀 있는 화살들은 언젠가 찾아올 이 날을 위해 그녀가 끝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인 흔적이라는 걸.

혼자서. 몇백 년이나.

그리고 그러한 노력들은 이안에게 전달될 터였다.

그 노력과 헌신. 긍지와 고귀함에 새삼 놀라며 이안은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놀랄 정도로 시린 손이었다.

주위 풍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제국의 계승자이자 온 대륙을 지배하는 황태자.

레온 그레이스 클로딘은 따분한 얼굴로 앉아 신하들이 떠들어대는 말들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저하. 올해의 식량 산출 예상량이 생각보다도 더 낮게 잡히고 있습니다.”

“프리온 왕국에서는 역병이 퍼져 국경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저하.”

“텔 공국과 알론 연합 왕국의 기류가 심상치 않습니다. 금방이라도 병사를 일으킬 분위기입니다. 이미 국경에서는 소규모 전투가 번번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초원에 때아닌 눈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아직 겨울까지는 2개월이나 남았는데…….”

대신들은 마치 내일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댄다.

정작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는데.

황태자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 시간이 참으로 지루했다.

하도 지루하니, 얼마 전에 있었던 즐거웠던 일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 검은 머리 놈. 내 이름을 팔아서 내벽의 방어를 가동했다고 하던가.’

그가 보기에 이안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탐욕이나 강한 욕망이 엿보이기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고결함도.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과 같은 절박함도. 그리고 어딘가 망가진 듯한 부분도 보였다.

이제껏 이런 다채로운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코르디스에서 황태자는 이안에게 자기 이름을 팔아먹을 기회를 주었다.

솔직히 궁금했다.

과연 이안이 어떻게 행동할지.

사기를 쳐 돈을 갈취했을까? 아니면 떵떵거리면서 학사의 교수들을 협박했을까? 어쩌면 지레 겁을 먹고 그 기회를 사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안은 황태자의 이름을 팔아 당직 교수에게 호통을 쳐 내벽의 방어시설을 작동했다.

그 덕분에 수많은 학생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황태자의 기대 이상이었다.

‘악마와 싸우다 죽었다 했나?’

곧바로 파견한 조사관도 그리 말했고, 레아의 편지도 받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믿지 않았다.

‘그런 놈이 겨우 반쪽짜리 악마한테 죽었을 리 없지.’

결과적으로 레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기꺼운 변화였다.

사랑하는 동생이 자기한테 거짓말을 할 정도로 중요히 생각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아닌가.

예전이었으면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기억을 곱씹고 있던 황태자에게 신하 하나가 말했다.

“전하. 듣고 계십니까?”

“아. 텔 공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 않소? 내 알기로 공작의 둘째 딸이 그토록 아름답다던데, 한번 직접 보고 싶군.”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우선 각국의 정세에 대해…….”

황태자는 마치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하고 치며 말을 끊었다.

“아. 그리고 즉위식을 슬슬 준비해야 할 것 같소.”

“즈, 즉위식? 하오나 전하. 아직 폐하께서는…….”

“알고 있소. 아직 살아 계시지. 하지만 너무나 슬프게도, 오래 버티지는 못하실 듯하오. 그대들도 다 알지 않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황태자의 얼굴에는 딱히 슬픔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에 대해 신하들이 더 말을 올리려던 그때.

황태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소. 회의는 다음으로 미루고, 급한 안건은 보고서로 작성해 오테르 공에게 전해주시오.”

“전하!”

놀란 기색의 신하들을 뒤로하고 황태자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복도를 지나던 와중, 악마 숭배자 테이오스가 다가왔다.

“그분이 부르시는 겁니까?”

“……그렇소.”

“직접 깨어나신 건 실로 오랜만이군요. 또 어떤 일일지 실로 기대됩니다!”

테이오스가 기대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지만 황태자는 테이오스의 얼굴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만. 잡담할 시간 없소. 경은 망이나 봐주시오.”

“……알겠습니다. 저하.”

황태자는 침실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았다.

그러고는 책장으로 걸어가 순서에 맞춰 책을 뽑았다.

철컥.

책장이 열리며 그 아래로 통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황실에는 이런 류의 비밀 통로가 여러 개 있었다.

전쟁이나 유사시에 황족들이 대피할 수 있는 통로.

하지만 이 공간은 그런 의도와는 거리가 있었다.

황태자는 양초의 자그마한 불빛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에 이르렀을 때, 황태자는 주저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

누가 보았더라면 충격에 빠졌을 광경이다.

대륙의 패자가 고개를 숙이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황태자의 물음에도 한참 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황태자는 슬며시 눈만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전신을 칠흑색 갑옷으로 무장한 채, 석좌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거대한 기사.

세간에서 ‘흑기사’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흑기사의 투구 속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안광과 눈이 마주친 황태자의 털이 곤두섰다.

권력을 쥐고. 초인의 경지에 올라선 이후로는 느끼기 힘들었던 감각이 몸을 타고 흘렀다.

흑기사의 투구에서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느껴진다.”

짧게 한마디를 뱉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더니 황태자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황태자가 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뉘었던 강한 영혼이 모여들고 있다. 성검이. 다시 온전해지고 있어.”

“성검이…….”

중얼거리는 황태자를 향해 흑기사가 새빨간 안광을 빛냈다.

“막아야 한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성검 중 하나는 제가 지니고 있습니다. 악마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면 특별할 게 없는 검이라 찾는 게 쉽지 않습니다.”

흑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태자의 변명을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침묵을 지키다 대뜸 목소리를 내뱉을 뿐이었다.

“전투를 준비하라. 방심은 있어서는 안 된다.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저번처럼. 강한 기사들의 영혼이 좋다.”

잠시 몸을 움찔한 황태자가 곧장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머지않은 때에, 적절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조시여.”

“…….”

그 말을 끝으로 황태자는 양초와 함께 다시 계단을 올랐다.

다시 어둠과 정적이 찾아왔다.

흑기사의 붉은 안광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돌아왔구나. 이네스.”

한없이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

“자네. 뭔가 변했군.”

다시 정신을 차린 이안에게 레이먼은 그리 말했다.

“겉보기에는 같지만…… 무언가 변했어.”

이안은 대답 대신 태양의 활을 들었다. 몸이 더 가벼웠다.

조용히 시위를 잡아당겼고.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퉁.

기분 좋은 소리가 울렸다.

분명 화살을 걸었다면, 원하는 곳에 명중했을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사냥을 자주 다니는 기사들에게는 궁술도 필수 덕목이에요. 이제 그 길에 이안도 발을 들여놓았네요.]

‘활을 잡아본 건 처음인데, 너무 익숙해요. 따로 가르쳐주시지 않아도, 얼마든지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또 다른 제가 수백 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궁술을 연마했기 때문이겠죠. 솔직히. 감탄 밖에 안 나오네요. 제 자신.]

분리된 이네스의 영혼은 각각 다른 재능을 지닌 만큼, 성격도 조금씩 다른 듯했다.

그렇다면 그 영혼이 합쳐진 지금 이네스는 이전과는 다른 건가?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바닥에 쭈그려 앉은 레이먼이 말했다.

“고대 제국인들의 끝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니…… 허탈하군. 아름다운 끝이라는 건 없다는 건가. 그나저나 자네는 정령까지 다루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제가 여러모로 상식을 벗어난 사람이라서요.”

“이곳에서 원하던 건 모두 이루었나?”

“예. 덕분에 예상 이상으로 일이 잘 풀렸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겠나? 지금 바로 탈옥이라도 할 셈인가?”

잠깐 고민하던 이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떠나야죠.”

“……그래. 여러모로 고마웠네. 자네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바라겠네.”

“근데 혼자 나가지는 않을 거고요. 일단 죄 없는 사람들은 풀어줘야죠.”

이미 이들과 같이 생활하며, 죄수들이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를 피부로 느꼈다.

게임이라면 모를까.

이 지옥에 사람들을 버려두고 도망갈 정도로 이안은 냉혈한이 아니었다.

끈을 이용해 태양의 활을 등에 매고, 채비를 마친 이안이 마지막으로 몸을 풀었다.

“천천히 오세요. 어르신. 아주 난리가 날 테니까요.”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사람들을 그냥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되갚아 줘야 하는 놈도 있고.”

탓.

이안이 발끝으로 땅을 박차 가볍게 달려나갔다.

레이먼이 등에 대고 무어라 외쳐대는 게 들렸지만, 이미 너무 멀어진 후였다.

마치 바람처럼 몸이 가벼워진 걸 느끼며, 이안은 순식간에 던전을 주파했다.

출구가 보인다.

기대 가득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는 간수들의 얼굴도.

“뭐, 뭐야!”

이안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간수가 말을 더듬었다.

그게 그 간수의 마지막 말이었다.

콱!

순식간에 갑옷의 틈새에 칼을 박았다 뺀 이안이 맹수처럼 다른 간수한테 달려들었다.

그제야 간수들도 자신을 공격하는 게 이안임을 알아챘다.

“일칠삼육! 미쳤나! 그 검은 또 어디서 났고!”

간수는 신속히 품에서 스크롤을 찢으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스윽!

이미 이안의 검이 빛살이 되어 사내의 손을 훑고 지나갔다.

손가락이 깔끔히 잘려 후두둑 떨어졌다.

“끄아아악!”

“뭐, 뭐가 이렇게 빨라!”

“죽여!”

간수들은 당황해 각자의 무기로 이안을 노렸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사용자의 실력이 떨어지면 의미 없는 법이다.

이안은 순식간에 간수 넷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마지막 남은 간수의 머리를 붙잡아 땅에 박았다.

이안이 입가에 사나운 미소를 그리며 간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타놀. 우리들은 친구가 아니라 했던가?”

“으윽!”

간수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입에서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제발요.”

입가의 미소가 더더욱 진해졌다.

이안은 간수의 머리를 들어 그 귀에 속삭여주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자존심이 좀 센 편이라 말이야.”

이안

불길한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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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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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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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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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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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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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정령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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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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