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85화 (86/222)

85. 고대인의 요람(4)

간수의 품을 뒤지니 열쇠꾸러미가 나왔다.

죄수들의 사슬을 풀 수 있는 열쇠였다.

이안은 소란을 듣고 찾아와 참상을 목격한 죄수들의 사슬을 하나하나 풀었다.

딸칵!

멍하니 있던 죄수가 중얼거렸다.

“이, 이게 무슨…….”

이안은 짧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살던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도망쳐 보던가. 제가 시선을 끌 테니, 여유 되면 다른 구역 죄수들도 풀어주세요.”

그 말만을 남기고, 이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달려나갔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선택은 죄수들의 몫이었다.

죽은 간수들이 사용하던 무기들이 있으니 충분히 저항할 수 있을 터.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이안은 통로를 내달렸다.

마주치는 간수들은 그대로 칼을 먹여주었다.

하지만 갑옷의 틈새에 박아 넣어야 하는지라,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시간이 끌렸다.

땡땡땡땡!

이변을 알아챘는지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이내 여기저기서 고함이 들려왔다.

“죄수들의 사슬이 풀렸어!”

“반란이다! 3구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어!”

“철창 내려!”

끼기기긱!

복도의 중간중간에 설치되어 있던 철창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안은 바람처럼 달려 철창이 내려앉기 전에 연거푸 통과했다.

스윽!

마지막으로 바닥을 미끄러져 아슬아슬하게 철창을 통과.

복도를 넘어서니 식당이 등장했고, 식당에는 이미 간수들이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바로 대비하다니. 만만치 않구만.’

과연 시장의 정예병들이었다.

간수 중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내가 이안을 보더니 황당해했다.

공교롭게도 이안과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여기까지 통과해오다니. 대단한 놈이구나. 하지만 너 혼자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

사내는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 이안을 겨누었다. 상대가 고작 한 명이라도 방심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순순히 투항해라. 너 정도 되는 실력자가 그냥 이곳에 들어왔을 리는 없겠지. 네 배후를 캐야겠다.”

“투항하면 살려주고?”

“살려준다는 약속을 할 수 없지만, 최소한 고통 없이 죽여줄 수는 있다.”

“자비로우셔라.”

이안은 간수들을 둘러보았다.

그 중, 코 가리개가 달린 투구를 뒤집어쓴 한 사내가 눈에 띄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안을 이곳에 데리고 온 간수, 베이커였다.

베이커의 두 눈이 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만약 이안이 이곳에서 잡힌다면, 그를 불러 들여온 베이커도 곤란해질 터.

그럴 바에는 이곳에서 이안을 죽여버리는 게 낫다.

갈등하던 베이커가 굳은 결심을 내린 듯, 스크롤을 힘껏 잡아당겼다.

“죽어!”

부욱!

스크롤이 찢어지고, 허공에서 강한 물줄기가 이안을 향해 쏘아졌다.

이안은 곧장 땅을 굴렀다.

베이커의 공격에 다른 간수들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부욱! 부욱!

스크롤이 동시에 찢어졌다.

이어서 불어닥치는 냉기와 칼바람.

가고일을 상대했을 때 한번 봤었던 연계가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안은 벽을 강하게 걷어차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물은 피했으니 냉기는…….’

주저 없이 등 뒤의 화살을 꺼냈다. 조준하거나 할 여유는 없었다.

곧장 호크를 소환해 빛을 모은 뒤, 그대로 아무렇게나 발사해버렸다.

파바박!

스크롤의 냉기와 화살의 열기가 허공에서 부딪혀, 서로 밀고 당기기를 시작했다.

그 기세는 호각.

하지만 어느 순간 둘은 서로 어우러지더니, 이내 하나로 합쳐져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남은 건 자욱한 수증기뿐이었다.

“이, 이런!”

시야가 가려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스크롤을 사용하기도 곤란하다.

자칫하면 동료를 해칠 수 있었다.

간수들은 곧장 무기를 들었지만 이안이 한 수 더 빨랐다.

수증기 속에서도 이안은 감각을 끌어 올려 빠르게 움직였다.

검을 휘둘렀고.

어김없이 간수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간수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공포에 질린 베이커가 외쳤다.

“이, 이봐! 나야! 베이커! 나 기억하지?”

“글쎄. 우리가 알던 사이던가?”

“히익?”

어느새 다가온 이안이 베이커의 귓가에 말했다.

“잠…… 끄윽!”

베이커는 목에 단검이 깊숙이 박혀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내 수증기가 걷히고.

모든 게 다시 선명히 보였다.

살아남은 간수는 절반 정도.

그 생존자 중에서도 부상자가 반이었다.

이안은 어떻게 마무리할까 고민하다 이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승강기.’

지하의 간수를 모두 죽여봤자 승강기를 타지 못하면 탈옥은 불가능했다.

승강기가 지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이안은 그대로 땅을 박찼다.

뒤늦게 간수들이 무기를 던졌지만 애꿎은 바닥에 흠집만 낼 뿐이었다.

“도, 도망인가!”

“탈옥하려는 거다! 상부에 알려!”

땡땡땡땡땡!

경보음이 더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한동안 신세 졌던 수감동을 순식간에 지나갔다.

저 앞에 올라가기 시작하는 승강기가 눈에 보였다.

벌써 꽤 높이 올라갔다.

저 승강기를 놓치면 끝이다.

[이안!]

‘알아요!’

이안은 달렸다.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렸다. 최대로 가속했을 때 있는 힘껏 도약했고.

한순간이나마 날아올랐다.

텅!

“잡았다!”

가까스로 승강기의 바닥,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승강기가 충격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후우. 좋아. 계획 성공. 이대로 매달려 지상까지 갈 수 있다면…….”

하지만 김치국을 마시기에는 아직 이른 듯 했다.

“씹! 놈이 승강기에 매달렸어!”

“곧장 끊어!”

“하지만 아래에는 아직 동료들이…….”

“시키는 대로 해!”

절벽의 중간에 지어진 망루에서 감시하고 있던 간수는 곧장 대검을 꺼내 들어, 승강기의 줄을 끊어버렸다.

승강기에 매달려 천천히 올라가던 이안은 몸속 장기들이 붕 떠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승강기가 빠르게 추락했다.

“냉정한 새끼들!”

간수들의 대응이 빠르다.

이렇게 승강기로 끊으면 지하에 있는 동료 간수들은 모두 죽겠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고민할 시간은 없다.

이안은 승강기에 올라탄 뒤, 그대로 승강기 바닥을 힘껏 밟아 뛰어올랐다.

끊긴 승강기 줄을 향해 손을 힘껏 뻗었다.

아슬아슬한 거리가 점점 좁혀 들어 결국 손이 닿으려…… 닿는려…… 놓쳤다!

줄까지 불과 한 뼘을 앞에 두고 이안의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런 씨……!”

이안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찔했다.

이미 너무 멀리 올라와, 여기서 떨어지면 아무리 튼튼한 몸이라도 성하기 힘들어 보였다.

망루에서 이안을 보며 비웃음을 흘리는 간수들의 표정이 보였다.

“그대로 떨어져 죽어 개자식아!”

이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럴 수 없지.”

후욱!

허공에서 한번 크게 돌아 발을 벽 쪽으로 향했다.

벽과 발이 부딪힌 그 짧은 시간.

이안은 몸의 무게중심을 절묘하게 움직였다.

삽질하던 때의 깨달음은 참으로 많은 곳에 응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안은 찰나의 시간.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절벽을 타고 걸었다.

간수들은 그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의 눈에는 이안이 마법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두 걸음을 옮긴 이안은 그대로 벽을 박차 반대편 벽으로 날아올랐다.

이번에도 두 걸음.

그다음에 다시 도약.

이번에는 도약력이 처음보다 크게 줄었지만 상관없었다.

승강기의 줄이 이안에 손이 붙잡혔으니까.

“말도 안 돼! 컥!”

어느새 간수 둘의 가슴에는 단검이 각각 한 자루씩 박혀 있었다.

방심의 대가였다.

이안은 승강기 줄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닥을 보면 정신이 아득해져, 오로지 위에만 집중하며 팔을 움직였다.

‘거의 다 왔다!’

지상에서도 이변을 알아차린 간수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는 하루에 한 번만 열리는 쇠문도 어쩔 수 없이 올라갈 터.

그때가 기회였다.

‘호크! 시선을 끌어!’

“피요오!”

날아오른 호크가 간수들의 한복판에 내려앉았다.

신비로운 호크의 외형에 간수들이 순간 당황했다.

“이, 이게 뭐야…….”

파앗!

밝은 빛무리가 무방비한 간수들의 시야를 가렸다.

그 틈을 타 줄을 타고 올라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

눈이 먼 간수들을 처리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일을 마치고. 이안은 잠시 숨을 골랐다.

“후. 생각보다 쉽지 않네.”

이렇게 격하게 움직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아슬아슬했네요.]

“계획은 완벽했는데. 간수들 대응이 제 예상보다 두 배는 빨랐어요.”

[원래 계획이란 건 어그러지기 마련이니까요.]

“돌아가면 일단 한숨 푹 자야겠어요. 그 전에 제대로 음식도 먹고요. 일단…….”

이안은 승강기의 조작장치 쪽을 유심히 살피다, 이거다! 싶은 레버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천장에서 자그마한 승강기 하나가 내려왔다.

“아. 역시 있네요. 예비 승강기.”

유사시를 대비한 예비 승강기.

이안은 장치를 조작해 예비 승강기를 아래로 내렸다.

아래의 상황을 마무리한 죄수들도 이제 올라올 방법이 생겼다.

“자. 지금으로선 제가 할 건 다 한 것 같네요. 이 이후로는…… 일단 잭한테 가봐야겠어요.”

드르르륵.

쇠문이 천천히 올라갔다.

이안은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간수 몇만 처리하면 이제 탈옥은 성공이었다.

쇠문이 완전히 올라갔다.

그대로 뛰어들려던 이안은 자리에 멈춰섰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화려하게도 저질렀군.”

코헨의 시장. 윌리엄 아만은 그렇게 말했다.

그의 뒤에는 잘 무장한 사병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

윌리엄 아만은 신사적인 느낌의 중년이었다.

크레이 사가의 플레이어들은 보통 그를 탐욕에 젖은 배불뚝이로 상상했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전혀 달랐다.

두 눈에서는 날카로움과 총기가 엿보였으며, 몸은 오랜 세월을 단련했는지 탄탄했다.

도시를 통치하는 위정자라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충성하는 기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너는 누구냐. 누구의 사주를 받고 내 도시를 엉망으로 만드는 거지? 역시 제국의 첩자인가?”

아만은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안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생각했다.

‘이거 야단났네.’

윌리엄 아만은 게임에서는 마주치지 않는 인물이다.

코헨 스토리의 주요 인물은 어디까지나 마일로와 잭이고, 아만은 맥거핀 느낌의 인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마주쳤다.

왜일까.

사실, 짚이는 구석은 많았다.

코헨의 조직간의 항쟁에서 서로의 세력이 크게 줄지 않은 것.

이안이 혼자서 탈출하지 않고, 다른 죄수들을 이용해 난동을 피운 것.

유적의 끝에서 사신과 싸우지 않은 것.

그 모든 변수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예상치 못한 상황을 불러들였다.

‘보스 하나 건너뛰었다고 좋아했더니, 다른 놈을 마주쳐버렸네요. 그것도 처음 보는 놈으로.’

생각에 빠진 이안이 대답하지 않자, 아만이 차분히 말했다.

“대답하지 않는 건가? 하긴. 쉽사리 그 입을 열 순 없겠지. 내 검과 갑옷을 가져와라.”

아만의 명령에 병사 하나가 커다란 갑옷과 롱소드를 가져왔다.

둘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푸르스름한 문자가 빼곡히 박혀 있는 판금 갑옷과 붉은색 날에 흉흉한 기운을 흩뿌리는 검.

무엇보다 그 검이 눈에 걸렸다.

이네스는 한눈에 그 정체를 알아챘다.

[마검이군요.]

‘마검이요?’

[강력한 힘을 주는 대신, 사용자의 정신을 빼앗는 종류의 검이에요. 마검 사용자는 결국 자아를 잃고 마검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리죠.]

병사가 아만의 몸에 갑옷을 입혀주었다.

거대했던 갑옷은 놀랍게도, 아만의 몸에 맞춰 그 크기가 줄어들었다.

건틀릿을 낀 손을 쥐었다 폈다 한 아만이 말했다.

“고대 제국인들은 참 대단한 물건들을 만들어냈지. 평범한 농민도 혼자서 기사 수백을 상대할 수 있는 무구들을 말이야. 이것들도 그중 하나다.”

아만은 느릿하게 검을 쥐었다.

그러자 그의 기세가 변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양, 눈동자에서 격렬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자세를 잡는 방식이나 호흡의 분배까지 달라졌어요. 마검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했어요.]

‘아만이지만, 아만은 아니다 이건가요?’

이안도 성검을 굳게 쥐며 대꾸했다.

“그런 흉악한 걸 사용해가지고 정신이 남아나겠어?”

“하하. 걱정하지 마.”

피식 웃음을 터트린 아만이 마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오래 끌 생각은 없거든.”

아만이 가볍게 검을 아래로 내리쳤다.

콰가가가각!

검에서 형상화된 붉은색 참격이 경로의 모든 걸 찢어발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