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고대인의 요람(5)
콰과과곽!
형상화된 참격이 경로의 모든 걸 휩쓸었다.
그 두꺼운 쇠문마저도 단 일격에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아만은 마검을 들어 황홀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좋아. 아주 훌륭해.”
가까스로 몸을 굴러낸 이안은 황당한 심정이었다.
‘무슨 위력이…….’
만약 반응이 늦어 피하지 못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시체 정도는 남았을까?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고대 제국인들은 마법이나 검광 같은 신비들을 잘 다루지 못했다더군. 그래서 그들은 인위적으로 검광을 만들어내는 무기를 만들어냈지.”
아만이 검을 옆으로 내밀었다.
병사 중 하나가 커다란 통을 들고와 내밀었다.
통 안에는 피가 가득 차 있었다.
아만이 검을 그 안에 담자, 검이 순식간에 피를 전부 먹어치웠다.
‘충전식이라 이건가.’
아만이 양손으로 검을 잡아 조용히 들어 올렸다.
검에서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에스테반이 보여주었던 검광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너한테는 묻고 싶은 게 많다.”
투구 속에서 아만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니 되도록 죽지 마라.”
탕!
아만이 땅을 박찼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발을 내디딘 바닥이 움푹 꺼졌다.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아만의 속도는 예상보다도 더 빨랐다.
‘아니.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빠른 건가?’
안 그러면 저 정도의 속도가 나올 수 없다.
이안은 재빨리 성검을 세로로 세워 들었다.
까가가가가각!
마검에 부딪힌 성검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 짧은 충돌 동안 성검이 엄청나게 흔들렸다.
마치 검이 아니라 전기톱과 부딪힌 느낌이었다.
“검광에도 버티는 검이라니! 그 무기도 제법이구나!”
호탕한 외침과 함께 아만이 파고들었다.
이안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검광은 검광으로밖에 대응할 수 없어요! 성검이라도 계속 부딪히면 부러져 버릴 거에요!]
‘한번 맞아보니 알 것 같아요!’
선택지가 없다.
최대한 검을 맞부딪히지 않으며 틈을 노려야 했다.
마검의 힘을 끌어다 쓰는 아만은 분명 강했지만, 원래 아만 자체가 전사는 아니었던지라 엉성한 부분이 분명 있었다.
이안은 틈을 보다 아만이 큰 동작으로 내리쳐오자, 그대로 검을 위로 향해 검의 궤도를 틀은 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곧바로 손에 활공하는 단검을 불러들인 이안이 그대로 아만의 투구 틈새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아니, 박아 넣으려 했다.
카앙!
마치 셔터가 내려가듯. 투구의 틈새가 단검이 침입하기 전에 가로막혔다.
“아니 이건 사기잖아.”
황망히 중얼거리는 이안의 배에 아만의 주먹이 꽂혔다.
이안의 몸이 반으로 꺾여 날아가고, 아만이 다시 땅을 박차 그런 이안을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아만의 손에 든 마검의 붉은빛이 흐릿해졌다.
빛을 확인한 아만이 주저 없이 뒤로 물러났다.
병사들이 피가 든 통을 가져왔고, 아만은 다시 검을 통 안에 박아 넣었다.
이안은 욱신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후우. 연료가 떨어져서 살았어요. 아무래도 연비가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네요.’
[물러서지 않았다면 유리한 싸움을 계속했을 텐데, 신중한 걸까요.]
‘검광이 아니면 자신이 없는 걸지도 모르죠.’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만의 공격과 수비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검광을 고갈시킬 때까지 싸움을 질질 끌 수만 있다면 또 다른 얘기겠지만, 상대는 계속해서 피를 통해 연료를 충전하고 있었다.
무한한 체력을 가진 상대와 싸우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어떻게든 피를 보급하는 걸 멈춰야 해. 주변에 있는 병사들부터 먼저 처리 해야 하나? 아니. 가만히 내버려 둘리가 없지.’
아만은 이안에게 생각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검에서 붉은 아지렁이를 피워냈다.
막막한 상황에 검을 꼬나쥔 이안이 힘겨운 싸움을 대비하던 그때였다.
챙강! 쨍! 쨍그랑!
어디선가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병사들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두리번거렸다.
아직 새벽에 별도 잘 뜨지 않는 코헨의 밤은 특히 어둡다.
바닥에서 자욱하게 올라오는 연기를 병사들이 늦게 발견한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유달리 키가 작은 병사 하나가 가장 먼저 알아채고 외쳤다.
“이거…… 다들 입 막아!”
병사들은 코헨에서 나고 자란 이들답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응이 조금 늦고 말았다.
병사들이 연기를 들이마시고 말았다.
“으악! 컥! 숨이……!”
“눈이, 눈이 안 보여!”
병사들은 눈을 미친 듯이 긁거나, 목을 부여잡고 켁켁거렸다.
그제야 아만은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을 따라 회색 옷을 입은 사내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 선 건 대머리와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 잭이었다.
아만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한 숨을 푹 쉬다, 잭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근데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지, 잭? 드디어 미친 건가?”
“갚아야 할 게 있어서 왔다.”
잭이 이안과 시선을 마주치며 씨익 웃어 보였다.
얼굴의 흉터 때문에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잭!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온 도시에 그토록 요란하게 경보음이 울리는데 눈치 못 채면 병신이지. 네가 감옥에 들어간다 했을 때부터 이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진짜로 탈출에 성공할 줄은 반신반의했지만…….”
캉!
아만이 마검을 바닥에 찍어 대화를 끊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어. 잭, 결국 제국과 손을 잡은 건가? 솔직히 좀 실망인데.”
“……너 제국 쪽 사람이었냐?”
잭이 미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이안이 고개를 재빨리 저었다.
그 알기 쉬운 반응에 잭이 고개를 까딱였다.
“아니라는데? 그리고 뭐든 상관없어. 이미 너무 많은 걸 받았고, 이제는 갚을 생각이니까.”
잭과 그 부하들이 자세를 잡았다.
아만은 병사들을 둘러봤다.
공기로 퍼지는 독의 특성상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효과는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아만이 말했다.
“산성 연기의 사용은 78회 가주 회의에서 금지하기로 협의했던 거 같은데?”
“병신아. 이제 그 가문들이 다 끝장났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하. 그것도 그런가.”
피식 웃은 아만이 손을 척 들어 잭을 가리켰다.
“전부 죽여라. 저런 건달들한테 설마 지지는 않겠지?”
“옙!”
“전진!”
“너희도 맞서 싸워라! 누가 도시의 진짜 주인인지 보여라!”
“우와아아아!”
아티팩트로 무장한 병사들과 도핑으로 강화된 조직원들. 두 세력이 맞붙기 시작했다.
아티팩트와 도핑, 여러 시약들이 활약하는 전투는 제법 화려한 맛이 있었다.
그 모습을 착잡하게 쳐다보던 아만이 여전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얼른 끝내자.”
아만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눈동자가 더더욱 붉어졌다. 당최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초점이 어디 맺혔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바뀐 분위기에 이안은 왼발을 뒤로 뻗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전혀 다른 기세.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마검에 몸을 완전히 맡긴거예요. 조심해요. 이안.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예요.]
이안은 대답 없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알려 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탕!
아만이 느닷없이 가속했다. 땅을 박차는 힘이 어찌나 센지 마치 대포가 발사되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이안이 반사적으로 검을 흘렸다.
카가가각!
순식간에 마검이 성검을 세 번을 연달아 때렸다. 그것도 같은 부위를.
그 움직임이 너무 빨라 이안의 눈에는 마검이 남기고 간 궤적에 남은 붉은 잔상만을 보았다.
‘더 빨라졌다!’
마일로가 떠올랐다. 적어도 속도 하나만큼은 초인의 경지에 발을 걸쳤던 마일로를.
눈앞의 상대는 마일로 만큼은 아니었지만, 만만치 않게 빨랐다.
검을 휘두르기 전에 미리 예측해서 방어 동작을 취해야 했다.
이안은 어떻게든 집중 상태로 들어가 상대의 수를 읽으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마검은 처음 보는 검술로 이안을 상대하고 있었다.
깡! 깡! 깡!
맞부딪히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성검과 마검을 교차해 막아냈다.
다행히 성검은 작 버텨냈다.
아직까지는.
한번 일격을 막을 때마다 강한 충격이 손을 타고 신체에 누적되었다.
손이 저릿했다.
[이안! 충격을 더 흘려요!]
‘이미 검으로는 한계까지 흘리고 있어요!’
[무게중심! 벌써 잊으신 건가요?]
이번에는 알아듣기 쉬운 조언이었다. 이안은 검으로 충격을 흘려내면서, 관절과 무게중심을 절묘하게 이동해 다시 한번 충격을 흘려냈다.
그러자 제법 버틸만해 졌다.
버티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문제였지만.
“…….”
과묵해진 아만은 이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뭐야.’
[인정했다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니 더 무서운데요.’
말과는 달리 이안은 이미 칼을 뻗고 있었다.
이제껏 수비적이었던 모습과 달리, 선공으로 주도권을 가져올 생각이었다.
저 검광에 성검을 맞대는 건 여전히 꺼려졌지만, 어떻게든 활로를 뚫어낼 생각이었다.
깡!
마검의 옆면을 후려쳐 궤도를 튼 이안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대로 무릎 관절을 발로 차 균형을 무너트리려 했다.
하지만…… 퉁!
단단한 갑옷에는 어림도 없었다.
한 번의 공격 실패는 곧 주도권을 잃는 것과 같다.
순식간에 다시 공수가 전환되었다.
아만이 땅을 딛는 힘을 그대로 이용해 사선으로 내려 베었다.
단순한 공격이었다.
이안은 적절하게 뒤로 물러나 피해내려 했다.
하지만 왠지 아랫배가 쎄 한 느낌이 들었다.
본능에 울리는 경고음.
이안이 몸을 힘껏 뒤틀었다.
후욱!
아만의 비스듬한 사선 베기는 가볍게 빗나갔다. 하지만 아만은 멈추기는커녕, 도리어 힘을 더했고.
깡!
땅과 부딪힌 마검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 오르며 이안을 노렸다.
‘미친! 검을 막 쓰네!’
피하지 못했다면 이안의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을 것이다.
그와 함께 갑옷과 투구의 빈틈을 향해 연이어 검을 찔러넣었다.
갑옷이 너무 단단해 의미는 없었지만…….
이안이 거리를 벌리자 아만도 뒤쫓지 않았다.
이번에도 공격이 실패한 데다가 반격까지 당한 게 충격이었는지, 그는 말없이 투구를 긁적였다.
“……훌륭하군.”
그러더니 마검을 내려다보았고, 검광이 희미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만은 곧장 땅을 박차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그러더니, 주저 없이 한 병사의 배를 향해 칼을 뻗었다.
푸욱!
“끄읍!”
비명을 지르려던 병사는 피가 빨려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다.
마검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마검에 어김없이 피를 바쳐야 했다.
[다행히 요구되는 피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요. 지금 어서 수를 써야 해요.]
‘하지만 저 갑옷을 뚫을 방법이 없어요. 웬만한 공격은 흠집도 안 날 거예요.’
[하나 있잖아요.]
‘예?’
이네스가 이안의 뒤를 가리켰다.
[수천 년을 견뎌온 제국의 벽에 상처를 낼 정도의 위력을 가진 무기가.]
‘아…….’
이안은 태양의 활을 집어 들었다. 확실히, 검에만 집중하느라 생각이 활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이 걸로 충분할까요?’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결정을 내리자마자 이안은 호크를 소환했다.
달조차 뜨지 않는 코헨의 밤거리에는 달리 모을 빛이 마땅치 않았다.
이안은 천천히 활시위를 잡아당겼고, 호흡을 멈췄다.
스스스.
호크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이 자연스레 활에 모여 화살의 형상을 띠었다.
빛이 모일수록 시위를 잡아당긴 오른쪽 어깨가 뻐근해져 왔다.
활 끝도 미친 듯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안은 숨은 멈춘 채, 충분히 빛이 모여들 때까지를 기다렸다.
사실 어느 정도가 충분한지 감이 안 잡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기다릴 셈이었다.
피를 다 빨아들인 아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활에 걸린 빛나는 화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이지만 아만의 원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갑옷 앞에서는 어떤 무기도 소용없다.”
아만의 손에 들린 마검에 불은 아지랑이가 다시 피어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시위를 붙잡는 데에만 집중했다.
금방이라도 줄이 끊어질 것처럼 활이 덜덜 떨렸다.
버티는 것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만이 뛰었다.
한 번에 끝낼 요량인지, 그 검에 서린 검광의 크기가 유달리 크고, 그 색깔은 짙다.
둘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들었다.
이안은 버텼다.
팔의 힘이 버틸 수 있는 끝까지 버텼다.
그리고 둘 사이가 불과 다섯 걸음 떨어졌을 때. 마검의 새빨간 검광이 공기를 찢는 소리가 선명히 들릴 정도로 가까운 그때.
이안은 그저 모든 걸 내려놓듯,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한줄기 광선이 활에서 시작되어 곧은 직선을 그리며 나아갔다.
어두운 코헨의 밤거리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아만이 다시 한번 외쳤다.
“이 정도로는 소용없다……!”
광선이 아만을 덮쳤다.
아만이 검을 내리쳤다. 검광과 광선이 어우러지고.
빛이 너무 환해 아만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
너무나 길게 느껴지던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
빛이 사르륵 흩어졌다.
구경하던 이들은 아만이 서 있던 곳을 재빨리 훑었다.
하지만 아만이 서 있어야 할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