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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87화 (88/222)

87. 문명의 끝에는

“사, 사라진 건가?”

당황한 잭이 그리 외쳤다.

그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아만이 서 있던 자리를 살폈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 그대로 건물이며 도로며 할 거 없이 모두 깔끔히 사라져 있었다.

잭은 그곳에서 아마도 갑옷의 잔해로 보이는, 고철 조각을 발견했다.

“맙소사. 정말 죽었군.”

그걸로 상황은 끝이었다. 우두머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병사들은 모든 사기를 잃고 순순히 투항했다.

고함을 질러가며 부하들을 통솔하던 잭에게 이안이 말했다.

“덕분에 살았어. 큰 도움을 받았네.”

“도움이라고 할 것도 없어. 네가 다 했잖아.”

잭은 손가락으로 이안의 손에 들린 태양의 활을 가리켰다.

“그런 흉악한 건 또 어디서 난 거야? 설마 아만 말대로 제국의 첩자나 그런 거냐?”

“왜. 첩자면 잡아가기라도 하게?”

“하하. 난 오래 살고 싶거든. 기꺼이 모른 척해 줄게.”

피식 웃은 이안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감옥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아래에 사람들이 갇혀 있어. 간수랑 싸우고 있을지 몰라. 가서 도와줘야 해.”

“그럴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

발소리가 들린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박살 난 문틈 사이로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죄수복을 입고 있던 사내는 외쳤다.

“지, 진짜 밖이야!”

그 말에 다른 죄수들도 우르르 몰려나왔다.

“진짜다! 하늘이야! 하늘이 보인다고!”

“따뜻해…….”

“내가 지금 꿈꾸고 있는 거 아니지?”

평생을 차가운 지하에 갇혀, 희망도 없이 살아갈 거라 생각하던 죄수들이다.

코헨의 공기는 매캐했고,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뭐가 그리 감동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 몇몇은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어대기까지 했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

그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뿌듯함이 이안의 마음속을 채워나갔다.

‘좋은 일을 한 기분이에요.’

[실제로 좋은 일이에요. 더 자랑스러워해도 좋아요.]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백 명의 죄수들이 감옥을 전부 빠져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승강기 하나로 나를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안은 아는 얼굴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설마 죽지는 않았겠죠?’

[삶을 포기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면 저 아래에 남았을지도 모르죠.]

기다리다 보니 마침내 마지막 죄수들이 나왔다.

이안은 재빨리 죄수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영감님. 나오셨군요.”

레이먼이 멋쩍게 웃었다.

“사실 저 아래에 남을까 생각했네만…… 유적의 수호자들이 말이지, 왠지 모르게 내 등을 앞으로 밀쳐 내더군. 빨리 자기 집에서 나가라는 듯이 말이야.”

그때를 떠올리는지, 레이먼이 쓴웃음을 지었다.

등을 밀어주던 그 차가운 손의 감촉이 아직 몸에 남아 있는 듯 했다.

“그건 마치 고대 제국인들이 내 등을 밀어주는 기분이었네. 아직은 죽을 날이 아니라고.”

“그렇군요…….”

쿠구구구구구.

갑자기 지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시청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위험을 알리는 경보음이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모두가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는 그때, 레이먼과 이안만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했다.

“시청…… 아니. 유적이 무너지고 있는 거야. 이제 더는 살아있는 사람도 없고 본인의 역할을 다했으니. 스스로 붕괴하는 거지.”

이안은 유적의 심층부에서 열렸던 투명색 관들을 기억했다.

이제는 텅 비어 있는 관들.

오랜 세월을 실낱같은 희망과 함께 버텨오던 이 유적도 끝을 맞이하려 했다.

새로운 희망을 다음 대에 전해두고.

이안은 태양의 활을 어루만졌다.

활대를 만지니, 이걸 만들어낸 사람들이 느꼈을 염원이나 생존 욕구 같은 감정이 전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착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콰르르릉!

마침내 시장 관사가 무너져 내렸다. 건물이 깊은 지하로 빨려들어 가고, 동시에 지하가 무너지며 완전히 그 입구를 막아버렸다.

이제 더는 이 고대인들의 안식처에 사람들이 발을 디뎌, 그 깊은 잠을 방해할 일은 없어진 셈이다.

“요람으로 지어져, 무덤으로 착각 받고, 최후에는 무덤이 되었다. 이건가.”

레이먼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찬란했던 문명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다 생각 하니, 기분이 묘했다.

“확실히. 어르신 말대로 엄청 깔끔하게 가긴 했네요. 자기관까지 스스로 짜다니.”

“그렇네. 정말이지, 끝까지 대단한 인간들이야…….”

그런 둘의 사이에 잭이 어색한 얼굴로 다가왔다.

민망한지 없는 머리를 긁적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먼 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허허, 덕분에 말이네.”

뼈가 있는 레이먼의 말에 잭이 움찔했다.

“그, 그 일은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해하네.”

“예?”

“모든 건 때와 장소가 중요한 법이네. 난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고.”

회한에 젖은 레이먼의 눈동자.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 안에는 자그마한 감정이 하나 더 섞여 있었다.

기쁨.

자신에게 아직 사명이 남아 있다는 기쁨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거짓말은 없고, 언젠가 반드시 진실은 밝혀질 거라 생각 하네. 나와 같은 시선에 도달한 사람들이 이후에도 분명 나타나겠지. 그 사람들을 위해 내가 얻은 깨달음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이네.”

이안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게 무슨 일이든,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던 모습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옆에서 듣던 잭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레이먼 님. 염치없이 들릴 수도 있지만, 같이 도시를 이끌어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시 예전처럼요.”

“허허. 나 같은 늙은이가 대체 무얼 하겠나.”

“어르신의 지혜를 나눠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분명.”

레이먼은 붕괴하여버린 시청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상징성이 큰 건물이다 보니 여러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레이먼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 끝났네. 코헨은 이제 돌이킬 수 없어.”

“그게 무슨…….”

“제국의 정보력이라면 이미 이 유적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을 거네. 아티팩트가 솟아나는 광산이라니. 가만히 놔둘 리 없지.”

“전쟁을 벌일 거라는 말입니까?”

“하하. 전쟁이랄 것 있나. 일방적인 학살이 될 거야. 아만은 그걸 잘 알기에 악착같이 전쟁을 준비한 걸 테고.”

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기껏 코헨의 내부 갈등이 끝이 났는데, 이제 제국이 집어삼키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이안이 끼어들었다.

“꼭 이 땅을 고집해야 해?”

“뭐? 무슨 소리야.”

“다른 데로 도망가면 안 되냐 이거지.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낫잖아?”

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조 때부터 목숨을 걸고 지켜온 이 도시를 버리라고? 아니, 그것까지는 좋아. 대체 우리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어? 어딜 가도 제국의 손이 닿아 있고, 왕국이나 연합에 위탁해도 노예처럼 다뤄질 게 눈에 보이는데. 귀족한테 빌빌대는 거, 난 절대로 못 해.”

“적절한 곳이 있다면?”

“뭐?”

“지금 당장도 몇백은 수용할 수 있고, 제국을 상대로 방어하기도 좋은 주인 없는 땅이 있다면 어떤데?”

“그런 곳이 있을 리가…….”

있다.

딱 한군데.

산세가 너무 험해 제국조차 내버려 둔 험지.

한때 수백 명으로 이뤄진 도적단과 강대한 괴수들이 어슬렁거리던 장소가.

“레지스 산맥으로 가.”

“레지스 산맥?”

“1년 조금 전에 거기 있던 도적단을 토벌했었거든. 걔들이 만들어 놓은 거주지가 산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을 거야.”

“하지만 레지스 산맥에는 괴수들이…….”

“명물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놈들은 대부분 토벌했어. 나머지는 너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고.”

잭은 레이먼에게 의견을 요청하듯, 눈빛을 보냈다.

곰곰이 생각하던 레이먼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직접 가서 터를 보고 지형을 봐야겠지만 말이네.”

“어르신…….”

“그리고 우리한테는 다른 좋은 대안이 없지 않나.”

레이먼은 허리를 숙여 관사의 잔해 중 하나를 손에 들었다.

부스러기가 바람에 흩날렸다.

“도시를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도 나름 재밌을지도 모르겠어.”

레이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동시에 사위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바라보던 레이먼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렇게 우중충한 코헨의 하늘을 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겠다고.

***

“스으읍.”

이안은 시위를 붙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호흡은 멈추고. 팔의 떨림은 작게.

눈은 오로지 목표물에.

미세한 오차가 커다란 실패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게 완벽히 통제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이안은 시위를 놓았다.

퉁!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발사되었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르던 화살이 중간 지점에 이르자 아래를 향해 머리를 틀었고, 이내 멋들어진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의 정가운데에 내리꽂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명중이었다.

“명중이네요. 150 미터는 되는 거리였는데.”

[다만 조준하는 데에 너무 오래 걸려요. 반복 숙달을 통해 시간을 줄여야 해요. 마상 궁술도 연습해야 할 거고요.]

이네스의 엄한 말에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이렇게 먼 거리의 과녁에 화살을 꽂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네스의 재능에는 감탄 밖에 나오지 않았다.

“검도 쓰고, 정령도 부리고, 활도 쏘고. 남들은 평생동안 한 가지만 파도 못 이룰 걸 혼자서 이루신 거잖아요.”

[예. 저도 이렇게 재능을 타고 난 걸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앞장서서 악을 베러 다닌 것이고요.]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잠시 숨을 골랐다.

어쨌든 궁술을 배움으로써 이안에게 가장 부족했던 부분이 채워졌다. 바로 원거리 견제.

아무리 검을 잘 써도, 멀리서 공격해대는 놈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제 때에 따라 능동적으로 거리를 벌리면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가능하면 가까이서 싸우기 전에 멀리서 요격하는 게 좋지.’

이안은 손에 들린 장궁을 기분 좋게 매만졌다.

태양의 활은 꼭 빛을 쏘아내는 효과가 아니라도 매우 훌륭한 무구였다.

평범한 화살을 사용해도, 적은 힘으로 충분히 먼 거리까지 쏘아 보낼 수 있었다.

‘빛을 모아 쏘는 건 연달아 사용하기는 힘들지만, 꼭 필요할 때는 큰 위력을 낼 수 있을 거예요.’

지금까지는 큰 화력이 필요할 때는 ‘피에람의 긍지’에 의지했다. 하지만 피에람의 긍지는 그리 보여도 공격보다는 방어 쪽에 더 강점을 발휘하는 아티팩트다.

이제 강력한 화력을 낼 수 있는 무구를 얻었으니, 피에람의 긍지는 방어용으로 아껴둘 수 있게 되었다.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건 상황에 더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같았다.

‘무엇보다 활이 워낙 튼튼하고 좋아서, 따로 귀찮게 관리를 안 해줘도 될 정도예요. 성검이랑 비슷하게요.’

그렇게 기분 좋게 무구들에 대해 생각하자니, 문득. 아만이 사용하던 마검과 갑옷에까지 생각에 미쳤다.

“그거 두 개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 마검은 정말이지 섬뜩했어요.”

피를 흡수해 검광을 피워내다니. 게다가 아만은 뛰어난 검사처럼 움직였었다.

“검에서 힘을 얻어내다니…….”

[만약 아만이 평소에도 부지런히 수련해서 그 힘을 더 잘 받아들였다면, 어쩌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지도요.”

결국 아무리 훌륭한 무구가 있어도, 그 무구에만 집중해서는 안된다는 거다.

적어도 그 무구를 다룰만한 역량은 갖추어야 한다.

‘무구에서 힘을 얻는 다라…….’

그렇게 곱씹던 이안은 문득, 한가지 생각에 달했다.

마검에서 힘을 얻은 아만과 성검에 깃든 이네스에게서 재능을 물려받은 이안.

둘이 비슷하지 않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

‘요즘 몸이 편해져서 그런지 별 잡상이 다 떠오르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날려 보낸 이안이 다시 활을 잡았다.

쓸데없는 데에 사용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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