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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88화 (89/222)

88. 대초원

나무 한 그루 없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초원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그들은 사제들이 즐겨 입는 특유의 낡은 갈색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다 해진 신발은 그들의 여정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때. 대열의 정중앙. 모두의 호위를 받는 위치에 서 있던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안대로 가려져 있었지만, 마치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걷던 한 사내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

소녀는 대답 없이 그저 고개만 저었다. 무언가 불안함을 느낀 사내는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너른 초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가 소녀에게 타이르듯. 아니면 자기 자신한테 말하는 듯 중얼거렸다.

“성도에만 도착하면 됩니다. 도착해서, 당신의 신성을 증명하면 모든 게 다 잘 될 겁니다. 어쩌면 성녀로 발탁될지도 모를 일이죠. 그러면 모든 게 다 잘 풀릴 겁니다.”

“…….”

“저희 종파는 힘을 얻을 것이고, 당신을 위해 헌신했던 모두가 보답 받을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힘내주십시오.”

“…….”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듣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는 오히려 그런 변함없는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낀 듯, 깊은 숨을 내뱉었다.

“후우. 서두르죠. 머지않아 도시의 숙소에 도착하면, 그 안대도 풀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사내의 말에 소녀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도한 사내도 다시 발을 디디려다, 괜스레 뒤쪽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이 지독하리만치 드넓은 초원에는 풀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하늘에서 재수 없게 날아다니는 독수리들뿐이었다.

“신이시여. 우리의 여정을 지켜봐 주소서.”

그렇게 중얼거린 사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무더위가 좀 가신다 싶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늦가을이었다.

요 몇 달간 이안은 코헨에서 바쁜 일상을 보냈다.

검술에 정령, 그리고 궁술. 게다가 새로 얻은 무구들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그 모든 일을 해내다 보니 하루가 모자를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코헨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레이먼과 잭은 빠르게 레지스 산맥을 탐사했고, 사람이 모여 살만한 지형을 몇 군데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일단 마을을 몇 군데 지어 따로 나눠 사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했다.

물론, 워낙 험지이고 여러 문제들이 산재해있지만, 이보다 더한 것도 헤쳐온 게 바로 코헨이다.

그들의 기술력과 굳은 의지만 있다면, 어디서라도 잘 적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짐을 꾸리는 이안을 보며 레이먼이 물었다.

“떠나는 건가?”

“예. 가야죠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가?”

이안은 배낭의 줄을 세게 동여매며 답했다.

“동부 대초원으로 가보려고요.”

“흠, 이건 또 예상 못 한 대답이군. 그런 야만인들의 땅은 또 왜 가려는 건가?”

“찾을 게 있어서요.”

레이먼은 그런 이안을 아쉬운 듯이 쳐다보았다.

붙잡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어차피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뻔했으니까.

그렇기에 그런 미련은 걱정의 말로 대신했다.

“야만인들은 매우 위험하다더군. 자네야 워낙 강하니, 내가 걱정하는 것도 우습겠지만 말이네.”

“얘기를 한번 나눠본 적 있는데 그냥 평범하던데요? 좀 사나워서 그렇지.”

머릿속에 떠오른 건, 코르디스에서 만났던 라이젤이다.

하지만 레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야만인도 여러 부족이 있네. 선대 황제는 초원의 가장 큰 부족에게 작위를 주고, 제국의 영향권으로 영입했지만 모든 야만인들이 동의한 건 아니네. 야만인들 중에는 식인 풍습이 있거나 위험한 이교 신앙을 믿는 이들도 있으니 조심해야 하네…… 길게 말해 미안하군. 나이를 먹으니 잔걱정만 늘어서 말이야.”

“아뇨. 명심하겠습니다.”

레이먼이 떠드는 사이에 이안은 준비를 마쳤다.

초원에 도착할 때까지 먹을 식량과 잡다한 도구들. 거기다 화살 다발까지.

짐이 상당히 많아 어쩔 수 없이 말을 한 마리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덩치 큰 흑마의 안장에 짐을 실었다. 우아한 은빛 갈기가 바람에 조금씩 흔들렸다.

레이먼이 감탄했다.

“호오. 좋은 말이군.”

“예. 카일 상단에서 보답의 의미로 마련해준 말입니다. 군마로 쓸 수 있을 정도로 혈통 좋은 말이라던데요.”

거기에 더해 두둑한 노자까지 얹어 주었으니, 카일은 배포가 두둑한 사내라 할 수 있었다.

레이먼은 흑마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카일 그 친구는 허투루 거짓말을 하는 인간은 아니지. 요즘 대륙 상황이 어수선해, 좋은 말을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 많이 했을 거네.”

“그럴 지도요.”

레이먼의 말마따나 대륙의 정세가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국의 통치 아래 유지되던 평화가 점점 깨져가고, 각국에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륙이 전란에 휩싸이는 건 그리 오래 남지 않은 듯했다.

이안은 마지막으로 레이먼에게 조언을 건넸다.

“제국도 전쟁에 참여할 거에요. 큰 전쟁이 되겠죠. 그때까지 산속에서 힘을 비축해 놓다가, 제국에 반대하는 세력에 합류하세요. 전쟁에서 활약할수록 코헨의 재건도 쉬워질 거에요.”

레이먼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자네는 제국을 이길 수 있을 거라 믿는가? 내가 보기에, 대륙의 다른 모든 국가가 힘을 합쳐도 제국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거라 보는데.”

이안은 흑마 위에 훌쩍 올라타며 대답했다.

“적어도 지금의 제국은 무너질 거예요.”

“지금의 제국이라…… 묘한 소리를 하는군.”

“어쨌든. 다음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보죠. 이만 가야 해서.”

레이먼이 손을 흔들었다.

“고마웠네 이안. 정말로 고마워. 자리에 없는 잭도 그리 말했을 거네. 그리고 추위 조심하게. 이번 초원의 날씨는 유달리 춥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여준 이안이 흑마의 목을 툭툭 쳤다. 신호를 알아본 흑마가 힘차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흑마에 탄 검은 머리의 전사라니.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당 같은 모습에 레이먼의 입가는 미소를 그렸다.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던 레이먼은 문득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안이라…… 듣기로는 얼마 전에 코르디스에서 악마를 막아냈다는 사내의 이름도 이안이었는데. 우연이겠지……?’

***

어둠이 내려앉은 초원에 모닥불 하나가 빛을 밝히고 있었다.

모닥불 앞에서 범상치 않은 행색을 한 남녀 다섯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으웩. 오늘 어떤 분이 요리했나요? 간이 엉망이잖아요! 당신이죠!”

“나 아니다. 생사람 잡지 마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타오르는 듯한 머리를 가진 마법사의 신경질적인 말에, 거구의 숲의 종족이 차갑게 대꾸했다.

둘의 사이는 첫 만남부터 좋지 않았다.

마법사는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이었고, 그녀가 다루는 불 마법을 숲의 종족들은 혐오했다.

둘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기사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찬란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미, 미안해요 로잘리아 양. 제가 손재주가 없어서요…… 그래서 언제나 이네스에게 신세 지고 있죠.”

“큼.”

기사의 말에 마법사가 헛기침을 흘렸다.

“……뭐, 클로딘 님이 하셨다면 어쩔 수 없죠. 먹다 보니 은근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기사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한번 붉힌 마법사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옆에 있던 성직자가 마법사에게 핀잔을 주었다.

“우와. 너무해요. 아타바 님이 요리했다고 하면 분명 요리를 엎어버리거나 태워버릴 거였죠?”

“……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신께서 말 하시길 성인이 되어서도 반찬 투정을 부리는 한심한 사람은 죽어서 지옥의 가장 더러운 자리에 빠질 거라 하셨어요.”

“지금 싸우자는 거죠?”

둘이 투닥대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네스가 쿡쿡 웃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고는 감탄을 흘렸다.

“와아…….”

별의 바다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밤하늘에 별들이 어찌나 촘촘히 박혀 있는지, 하늘에 별이 떠 있는 건지. 아니면 별 들 사이에 하늘이 비집고 들어갔는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든 동료들이 저마다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너무 아름다워요. 클로딘님!”

“하하, 그러게요.”

“멋있군.”

“신이시여…….”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 속에서,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만이 사람들의 가슴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누군가 문득 말을 뱉었다.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자기가 뭐라 대답했는지, 이네스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예. 반드시.”

***

이안은 몇 주 동안 부지런히 말을 몰았다. 마을을 최소한으로 들리고 곧바로 대초원으로 향하는 강행군 덕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계획상으로 곧 목적지에 도달할 것 같았다.

“보자, 지금이 늦가을이니까…… 시간상으로 보면 딱 마주치겠네요.”

[누구랑요?]

“다음 동료 후보요.”

게임상의 행적을 생각했을 때, 지금 초원을 가면 그 인물과 딱 마주칠 수 있었다.

코헨에서 잠시 지냈던 것도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고, 상행에 따라가지 않고 홀로 나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동료라. 어떤 사람이죠?]

“일단 성…….”

[또 성능이니 이런 소리 하지 말고요.]

“흠흠. 일단 신관? 성녀? 뭐 이런 설정이었어요. 신성력을 다뤘거든요.”

더 얘기하라는 듯, 이네스는 무언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이안은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플로라가 세계관 최강의 화력이라면, 그쪽은 최고의 방패 같은 느낌이죠. 엄청 단단하다고 해야 하나?”

모든 게임이 다 그렇듯, ‘크레이 사가’에서도 파티에 신관은 필수다.

그들이 부리는 치유 능력과 여러 가지 기적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강력해지는 적들을 상대로 플레이어가 즉사하지 않게 해준다.

그런 이안의 설명에도 이네스는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는 모르시나요? 성격이라거나?]

“……그것까지는 잘. 아시다시피 제가 그런 걸 별로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라서요.”

[이번에도 가볍게 찔러만 보는 거죠? 레아 양과 플로라 양 때 처럼.]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이번에는 아예 같이 다니려고요. 헤어지면 나중에 다시 만나기도 힘든 인물이고, 이제 슬슬 안정성을 위해 힐러가 한 명 필요하다 생각 하던 참이었어요. 아, 그렇게 되면 첫 동료가 되려나요?”

[…….그쪽에서 거절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시게요?]

“잘 설득해봐야죠. 잘.”

이안은 검을 툭툭 치면서 씨익 웃었다. 이미 설득할 방법은 몇 가지 생각해 놓은 참이었다.

하지만 농 섞인 이안의 말에도 이네스의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아니, 역시 동료에 대해서는 아직 이른 거 같아요. 이번에는 다시 생각해주세요.]

“네?”

드문 일이었다.

이네스가 이런 식으로 나온 건 처음이었기에, 이안은 조금 당황했다.

[동료는 이안이 자신을 더 갈고 닦은 뒤에 구해도 늦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도 꽤…….”

[아뇨. 지금 이안은 한참이나 부족해요.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고는 해도, 상대해야 할 대악마를 생각하면 턱없이 모자라요.]

그렇게 말하는 이네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대악마는 두려운 적이에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적이었죠.]

“그러면 더더욱 강력한 동료를 구해야죠.”

[아뇨.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지한다는 건 너무나 멋진 일이지만, 그 안도감은 오히려 개인의 성장을 방해해요. 달리 기댈 곳이 생긴 이안이 지금과 같을까요? 홀로 모든 걸 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해요. 이안이라면! 저와 함께라면 해낼 수 있어요. 분명!]

억지에 가까운 말이고 이네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에는 너무나 과격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이 가볍지 않다.

하지만 이안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이건 저도 포기할 수 없어요.”

[마지막에 결국, 대악마에게 한 명이 반드시 죽는다는 그 얘기 때문인가요?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안돼요!]

둘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던 그때. 흑마가 발을 멈췄다.

어리둥절해하던 이안이 말에서 내려 땅에 손을 댔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진동과 어디선가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

“일단 이 얘기는 나중에 해요!”

다시 안장에 올라탄 이안이 흑마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히히힝― 하고 길게 운 흑마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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