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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89화 (90/222)

89. 스텔

휘이익! 휘익!

사방에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리둥절해하던 사제의 표정이 이내 창백하게 질렸다.

“적습…… 컥!”

사제의 가슴에 화살촉이 삐죽 튀어나왔다.

한번 박히면 쉽게 빼낼 수 없는 미늘 모양의 화살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한 무리의 야만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야만인들은 말을 빠르게 몰면서 동시에 활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색이 된 사제가 급히 외쳤다.

“쿨럭! 모두 방어를 준비해! 어떻게든 스텔 님만은 지켜야 해!”

“하지만 상처가!”

“신이시여, 당신의 종복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소서.”

사제가 기도를 외자, 신성한 빛이 상처에 아른거리더니 이내 화살이 박힌 그대로 아물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경악하던 다른 이들도 이내 비장한 표정과 함께 기도를 외웠다.

그런 무리를 향해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고, 환한 빛과 함께 생겨난 투명한 장벽이 화살에 맞섰다.

다행히 장벽은 화살을 막아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단단했다.

사제가 다급하게 말했다.

“도시까지는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못해도 나흘은 꼬박 걸어야 합니다!”

“우리 쪽에서 먼저 공격에 나서야 한다 이건가?”

지금은 기적을 일으켜 막아냈지만 신성력도 무한히 샘솟는 건 아니다.

언젠가는 동이 나기 마련.

결국 습격자들을 물리치려면 이쪽에서 직접 공격에 나서야 했다.

문제는 저들을 공격할 수단이 없다는 것. 습격자들은 저 멀리서 말을 타고 화살만을 쏴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속한 종파에는 원거리의 적을 요격하는 종류의 기적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시간만 흘러갔다.

습격자들은 집요했다.

마치 먹잇감이 체력을 잃기만을 기다리는 늑대 떼처럼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이쪽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설상가상으로, 흩어져 있던 동료들을 불러모은 건지 습격자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났다.

날아오는 화살의 숫자가 불어나자 사제들은 장벽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그때, 사내의 말을 끊고 하늘에서 은색 번개가 내리꽂혔다.

꽈릉!

번개가 장벽에 직격하자 사제들이 피를 토해냈다.

사제들은 그제야 습격자들의 정체를 알아챘다.

“쿨럭! 컥! 헤멘 종파의 기적입니다!”

“지옥에 떨어질 놈들! 이교도와 손을 잡고 습격하다니! 어떻게 합니까!”

“일단 방벽을 더 두텁게 하게!”

서로 성질이 비슷한 신성과 신성의 싸움은 결국 소모전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혀를 찬 사제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안대로 눈을 가린 소녀는 주변의 난리에도 그저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제는 잠시 갈등하다 소녀에게 말했다.

“스텔 님, 듣고 있으십니까?”

소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드린 길을 따라 쭉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도시가 나올 것입니다. 도시에 가서 믿을만한 길잡이를 고용해 성도까지 가십시오. 스텔 님이 가진 힘이면 충분히 혼자서 성도까지 갈 수 있을 겁니다.”

소녀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마치 ‘그러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게?’라고 말하는 듯했다.

사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희는 끝까지 힘을 짜내 한 걸음이라도 더 막아내겠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뭐. 먼저 천국에 가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겠지요.”

“…….”

“스텔 님은 성도에 도착하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곳에서 당신의 믿음을 증명해, 교단의 모두를 놀라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저희 종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지금껏 당신을 위해 희생만 모두도. 그리고 저희도 만족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죠?”

스텔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제는 씨익 웃었다. 그 입가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몸에 박힌 화살을 그대로 내버려 둔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도 여기서 끝이겠군.’

사제는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스텔에게 더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거룩한 위업에 사적인 감정을 끼워 넣을 수는 없는 법.

그저 스텔의 어깨를 잡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신께서 당신의 앞날을 축복할 겁니다. 분명.”

스텔의 대답도 듣지 않고 사제는 온 힘을 다해 기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화살이 박힌 자리에서 피가 울컥 솟아 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팔을 들어 손을 하늘을 가리키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적을 준비할 뿐.

‘신이시여. 마지막 당신의 종복께 힘을 내려주십시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버는 게 그의 사명이었다.

***

피 냄새가 진하다.

흔적을 보면 싸움은 상당히 오래 지속된 듯했다.

[기마병들이 집요하게 추적했어요. 활을 쏘면서. 바닥에 신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걸 보면 사제들이 목표인 것 같아요.]

“그럼 제가 찾는 사람이 맞는 것 같아요.”

다시 말에 올라탄 이안은 속도를 올렸다.

흑마가 쏜살같이 초원을 질주했다. 과연 명마답게, 그 속도가 생각보다도 더 빨랐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저 멀리 희끗희끗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이안을 발견한 그들은 고함을 지르거나, 휘파람을 불어 경고의 표현을 했다.

이안은 경고를 무시하며 오히려 속도를 높여 다가갔다.

이제 상황이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족히 수십을 될 법한 전사들과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갈색 로브를 입을 사람들.

그들은 소녀 한 명을 중심으로 빙빙 돌며 연신 공격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어떤 공격도 은은하게 빛나는 장벽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때때로 검을 뽑아 달려나가는 이도 있었지만…….

쿵!

거대한 주먹 모양으로 바닥이 움푹 패이며, 말과 함께 기수까지 그대로 우그러졌다.

그 모습이 두려워 습격자들은 소녀에게 쉬이 접근할 수 없었다.

“좋아 안 늦었어!”

이안은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꺼냈다. 안장에 매달아 둔 화살통에서 화살을 재빨리 꺼내 시위에 걸었다.

흑마의 움직임에 맞춰 몸이 위아래로 들썩여 영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씁. 생각보다 더 어렵네.’

이안은 호흡을 멈추며, 가능한 한 상체만은 흔들리지 않게 애썼다.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막상 해보니까 어찌어찌해볼 만할 것 같았다.

이안의 정신이 깊은 집중력 속에 가라앉았다.

그러다…… 퉁.

자연스레 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멀리서 전투를 준비하던 기마병 하나가 낙마했다.

“좋아!”

휘이이이!

휘파람 소리가 다급해졌다.

소녀를 에워싸던 인원 일부가 말을 몰아 달려오기 시작했다.

몇몇은 활을 들고 이안을 겨누었다.

그 사이에도 이안은 다음 화살을 집어 들었다. 가장 가까운 적을 향해 겨냥했고, 가볍게 손을 놓았다.

이번에는 거리가 가까워 더 쉬웠다.

팍!

“끄아악!”

가슴 깊이 화살에 찔린 기마병이 그대로 달리는 말 위에 엎어졌다.

이안은 활을 다시 등에 걸고, 성검을 뽑아 들었다.

“죽어라! 죽어!”

파바박!

화살 다섯 발이 절묘한 각도로 이안을 노리고 날아왔다. 초원 전사들의 활 솜씨는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장난 아닌데.’

성검을 든 이안은 상체를 꽂꽂이 세웠다. 날아오는 화살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팔을 휘둘렀다.

카캉캉!

날아오던 화살의 가운데를 절묘하게 베어, 그대로 두 동강을 내버렸다.

다섯 발 모두.

지켜보던 전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대단하군!”

“강한 전사다! 강한 전사가 왔다!”

“모두 무기를 들어 돌격!”

이안의 무위에 전사들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강자와 싸울 수 있어 기쁘다는 듯. 누가 먼저랄 새 없이 이안을 향해 곡도를 들고 쇄도했다.

‘초원전사들의 검술.’

기마 검술답게, 말에 타 빠르게 상대를 베고 지나가는 것에 초점을 둔 검술.

이안은 오히려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달려오는 전사들의 한복판으로 돌진했다.

가장 앞선 전사가 외쳤다.

“헬렝게 부족의 카잔이다! 너를 죽일 전사의 이름이지!”

카잔이 곡도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가, 폭발적으로 앞으로 내질렀다.

날카로운 찌르기는 말의 속도와 더해져 일격 필살의 공격으로 변모했다.

‘말 속도랑 더해져서 엄청나게 빠르네.’

이안도 마찬가지로 성검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가, 앞으로 내뻗었다.

두 검의 서로의 숨통을 끊기 위해 허공에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늦게 출발한 이안의 성검이 카잔의 가슴에 먼저 닿았다.

“컥!”

가슴에 구멍이 뚫린 전사가 그대로 낙마했다.

이어서 다른 전사 둘이 이안을 향해 좌우에서 달려들어 공격했다.

왼쪽 전사가 창을 찌르고, 오른쪽 전사는 곡도를 휘둘러 베려 했는데, 이안은 날아오는 창대를 맨손으로 붙잡았다.

창대를 붙잡힌 전사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씨익 웃은 이안이 창대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겨 오른쪽 전사가 타고 있던 말에 내리꽂았다.

창에 찔린 말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고, 뒤이어 달려오던 전사들의 말은 발이 걸려 넘어져 버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셋을 처리하니, 전사들의 대열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방향이 엇갈린 전사들은 급하게 말의 고삐를 쥐었고, 이안은 그대로 속도를 내어 거리를 벌렸다.

저 앞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제들이 보였다.

‘우선 귀찮은 놈들부터.’

맹렬하게 달려오는 이안을 보고 기겁한 사제들이 급하게 기도를 외웠다.

꽈릉!

어떠한 전조도 없이 하늘에서 은색 벼락이 쳤다.

하지만 이미 이안은 한참이나 앞서서 달려나가고 있었다.

‘공격형 기적, 천벌. 공격력은 강력하지만 시전하는 데에 오래 걸리지.’

사제들에게 다가선 이안이 그대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뒤늦게 방어막을 만들어내려던 사제들이 맥없이 검에 맞아 쓰러졌다.

사제들이 모두 죽자 전사들은 주춤했다.

서로 빠르게 대화를 나누더니,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나와 이안에게 물었다.

“헬렝게 부족의 전사, 니룽이다. 이름이 뭐지?”

“이안.”

“이안. 뛰어난 전사. 기억해두겠다.”

니룽은 미련 없이 말을 돌려 달려나갔고, 그 뒤를 다른 전사들이 따랐다.

‘그냥 떠나 버렸네요.’

[호전적인 사람들이지만 바보는 아니거든요. 상황이 여의치 않고, 자신들의 의뢰인이 죽었으니 미련 없이 후퇴한 거 같아요.]

이안은 말에서 내렸다.

원했던 목표는 여전히 저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안이 다가가자 소녀의 주위에 은은한 장벽들이 만들어졌다.

“싸울 생각 없습니다. 난 오히려 도와주러 온 거예요.”

“…….”

소녀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안대 너머로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소녀는 방벽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반말에 이안도 반말로 돌려줬다.

“누구? 너를 습격한 전사들?”

소녀가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입고 있는 로브를 가리켰다.

잠시 미간을 좁히던 이안은 그게 자기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도 없어. 방금 다 확인했는데…… 안타깝게도 살아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

소녀가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이안은 서둘러 달려가 소녀를 붙잡았다. 다행히 이안에게 나쁜 의도는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장벽은 거두어졌다.

이안이 물었다.

“갑자기 어디 가는데.”

“……성도.”

사실, 이 소녀의 목적지가 성도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안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마침 잘됐네! 나도 성도에 가려 했는데! 같이 가면 되겠어!”

[너무 뻔한 거짓말 아닌가요 이안? 이 아이가 바보도 아니고…….]

끄덕.

이쪽을 물끄러미 보던 소녀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네스는 말을 잃었다.

[대체 이 사람은 뭔가요.]

‘좀 특이하긴 하네요. 그죠?’

[좀 특이한 정도가 아니잖아요! 안대를 하고도 마치 주위가 다 보인다는 듯이 걷고…… 혹시 맹인인가요?]

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크레이 사가의 주요 인물에 맹인 캐릭터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야. 그 안대는 왜 쓰고 있는 거야 불편하게. 일단 그거부터 좀 벗어.”

이안이 손을 뻗자, 의외로 소녀는 별 저항 없이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매듭을 풀자 안대가 흘러내리며 그 얼굴이 드러났다.

“…….”

드러난 건 하늘색 눈.

그 눈과 마주친 이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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