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90화 (91/222)

90. 스텔(2)

초원의 바람에 스텔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이 무심하게 흔들렸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작은 체구. 툭 치면 꺾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외향. 하지만 함부로 대하기 힘들게 만드는 경건한 분위기.

하지만 그녀의 두 눈과 마주치자 그런 것들은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텅 비었어.’

색이 옅은 하늘색을 띤 그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초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인간다운 감정은 티끌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 사람의 눈이라기보다는 인형의 눈으로 박혀 있는 유리구슬.

혹은…… 시체의 눈이었다.

“너, 살아 있는 거 맞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이안이 그렇게 물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스텔은 그런 이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문의 진의를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긴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니, 됐다. 어쨌든, 앞이 안 보이는 건 아니지?”

그리 말하며 이안이 손가락을 들어 스텔의 눈앞에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안의 손가락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좋아. 잘 보이는 것 같네. 근데 왜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던 거야. 뭐 햇볕에 약하다거나 그런 거야?”

“…….”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스텔은 그저 시선을 내려 이안의 검을 살펴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이안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스텔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벌써 알아챈 이안이 침음을 흘렸다.

“끙…… 그래. 한 명쯤은 과묵한 사람도 있어야지.”

그러고는 주위에 있던 사제들의 시체를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스텔은 그런 이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신기하게도, 스텔은 말을 하지 눈빛만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재주가 있었다.

“너희 동료나 그런 거 아니야? 흔적을 보니까 너를 보호하려다가 죽은 거 같은데.”

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다 버리고 갈 수는 없잖아.”

벌써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 독수리들이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었고, 저 멀리에서는 늑대 떼도 어슬렁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스텔의 기분을 생각해서라도 간소하게나마 장례를 치러주고 싶었다.

시체를 옮겨와 땅에 편한 자세로 눕히던 작업을 하던 도중, 이안은 가슴에 화살이 박혀 있는 시체를 발견했다.

아마 이 무리의 책임자로 보이는 인물이었는데, 그 품을 훑자 책 한 권이 떨어졌다.

성서였다. 이안은 스텔에게 그 책을 쥐여주고,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그렇게 시체를 모두 모은 뒤 이안은 고민했다.

“사제들 장례는 어떻게 하더라…….”

[성직자들은 그 유해를 남기지 않고 철저히 태우는 게 원칙이에요. 지상의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죠.]

하지만 이 정도 시체를 모두 태우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장작과 시간이 필요했다.

이안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스텔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은색 고리 두 개를 꿰놓은 목걸이였다.

스텔은 지그시 눈을 감고 그러 모은 양손을 이마에 갖다 대었다.

목걸이에 꿰어져 있던 둥그런 은색 고리가 은은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화악.

허공에서 피어오른 성화(聖化)가 시체를 둘러쌌다.

열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불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사제들의 죽은 몸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안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다, 문득 스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도 성화의 빛을 반사해 잠시나마 반짝이는 듯했다.

하지만 동료를 보내는 의식임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확실히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뭐, 딱히 상관없는 일이지.’

이안이 스텔에게 기대하던 건 전투 보조다.

설령 감정이 없다시피 한 사람이라도, 제 역할만 잘 해준다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터다.

이안은 시체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 의식이 끝나자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출발하자. 근데 말이야, 내가 일단 성도로 가는 길에 들려야 할 곳이 몇 군데 좀 있거든? 오래는 안 걸릴 것 같은데 괜찮을까?”

스텔은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따르는 그 모습에 이안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빨리 출발하자고.”

스텔은 다시 안대를 써 두 눈을 가렸다. 굳이 거추장스럽게 그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이안은 그러려니 했다.

뭔가 종교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이네스가 짐작했기 때문이다.

[교단은 모두 같은 신을 믿지만, 그 교리까지 전부 같은 건 아니에요. 종파에 따라 의식이나 생활 양식도 천차만별이고, 그중에는 정말 기상천외한 교리를 가진 이들도 있어요.]

먼 옛날, 대륙에 첫 싹을 틔운 교단은 무서운 속도로 대륙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대륙에는 이교의 신앙이 남아 있었고, 세가 퍼지는 과정에서 그런 이교의 신앙이 함께 녹아들었다.

따라서 ‘교단’이라는 이름으로 묶이지만, 지역마다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스텔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스텔이 믿던 종파는 특히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던 듯했다.

그걸 피부로 느낀 건, 식사자리에서였다.

솥에 고기나 밀가루를 넣고 소금을 넣어 끓인 죽을 한 입 맛본 이안이 씨익 웃었다.

“내가 했지만, 맛이 괜찮은데. 많이 먹어.”

이안이 그릇에 죽을 한 국자 퍼주자, 스텔은 멀뚱히 그릇 속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그릇을 내려놓고 이안을 향해 밀었다.

“왜 그래. 배 안 고파?”

이안의 질문에 대답 없이 혼자서 뚱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스텔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고기, 안 돼. 향신료도 안 돼. 소금은 최소한으로. 밀가루 대신 귀리. 식사는 하루에 한 끼만.”

“어. 말 길게 잘 할 수 있네.”

스텔이 제대로 된 문장을 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옥구슬 굴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게 반찬 투정이라서 문제지.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성인이잖아. 맞지?”

어려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스텔은 오히려 플로라나 레아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멍하니 쳐다보던 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니. 다 큰 성인이 무슨 반찬 투정이야. 그냥 주는 대로 먹어.”

이안은 스텔이 내민 그릇을 다시 그녀 쪽으로 밀어 버렸다.

스텔도 다가오는 그릇을 손으로 잡아 힘을 주었다.

“…….”

“…….”

이 미묘한 신경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둘 사이에 붙잡힌 그릇 속 죽만이 출렁거릴 뿐이었다.

무감정한 스텔은 의외로 완고한 면이 있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그릇을 밀치던 이안이 점점 열이 받은 표정으로 진심을 내려 하자, 보다 못한 이네스가 이안을 말렸다.

[그만하세요. 이안. 아까 말했듯이, 종파마다 생활 방식이 다 다른 법이에요.]

‘…….그렇게 오냐오냐 받아주면 버릇 나빠져요.’

[더 맛있는 음식을 달라는 것도 아니니, 나쁜 뜻이 있는 건 아닐 거예요.]

결국, 먼저 포기한 쪽은 이안이었다. 솥에서 죽을 전부 덜어낸 이안은 스텔의 요구대로 새로 요리를 해주었다.

요리라 하기도 민망한 작업이었다. 그냥 솥에 물과 귀리만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이안은 귀리 죽을 맛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

투덜거리는 이안을 무시하며, 스텔은 작은 그릇을 꺼내 귀리 죽을 담았다.

그러고는 조금씩 호호 불어 한 숟갈씩 떠먹기 시작했다.

그녀가 뱉은 숨이 초원의 찬 공기와 만나 하얀 수증기가 되어 하늘을 날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이 물었다.

“안 그래도 영양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식단인데, 심지어 먹는 양도 적네. 그 한 끼로 하루를 버틴다고?”

고개를 살짝 끄덕인 스텔이 죽을 호록 들이마셨다.

차마 남기기는 아까웠던 이안도 맛없는 귀리 죽을 씹었다.

간이 되어 있지 않아 텁텁한 죽이었지만, 그래도 못 먹어 줄 정도는 아니었다.

솥째로 식사를 하던 이안이 물었다.

“설마, 평소에도 그 정도밖에 안 먹는 거야? 매일매일?”

스텔이 두 눈을 깜빡였다. 왜 그리 당연한 질문을 던지느냐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진짜냐…….”

이안은 그제야 눈앞의 소녀가 나이에 비해 왜소한 체구를 가진 이유를 알아챘다.

유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영양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장례를 치러주었던 사제들도 하나같이 깡말라 있고 왜소했어요.’

[엄격한 종파군요. 꽤 가혹할 정도예요.]

식사를 마치고 스텔은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안은 모닥불을 불쏘시개로 쑤시며 이네스와 대화를 나눴다.

아직 매듭지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은 변함없으신가요? 동료에 관해서요.’

[이안. 대악마를 토벌하기 위한 위업에는 그 실력만큼이나 인성적인 문제도 중요해요. 악마의 무서운 점은 단순히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 빈틈을 노려오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아직 저 소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아무것도.]

잠깐 머뭇거리던 이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적어도 성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계속 같이 다녀야 하니까, 그건 차차 지켜보죠. 설령 동료로 안 받아들여도, 여기서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둘은 유보적인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여기서 언쟁을 벌여봤자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계속 같이 다니다 보면, 결국 정 많은 이네스가 더 뭐라 할 수 없을 거라는 계산도 아래에 깔려있었다.

문득, 이안은 스텔을 쳐다보았다.

잠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한 스텔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는 별들이 자아내는 장관에,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히야. 죽이네.”

이네스도 감회에 젖은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이네요.]

몇백, 몇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두 사람과 한 영혼은 그렇게 말없이 한참이나 별을 구경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초원의 어느 언덕.

그 그림자에 바짝 엎드려 훌륭하게 은폐한 전사 하나가 밤이 늦도록 이안과 스텔을 감시했다.

***

이안과 스텔은 꼬박 이틀을 말을 몰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토보르’라는 이름의 도시로, 이 드넓은 대초원에서 유일하게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은 곳이었다.

도시의 외곽에는 텐트처럼 생긴 가옥이 쭉 늘어서 있었고, 대로에는 상인들이 바닥에 좌판을 깔고 양털이나 가죽, 모피 따위를 팔고 있었다.

초원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온 상인들도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스텔은 이런 광경이 처음인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마치 처음 도시에 온 시골 촌놈처럼.

마찬가지로 즐겁게 도시를 구경하던 이안은 한 가지 낯선 감각을 느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제국이었다면 이안이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표정을 찌푸리거나, 몸을 피하거나, 다 들리는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을 거다.

하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이안의 머리와 눈 색을 보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검은 머리를 불길하게 여기는 건 제국의 풍습이니까요. 이곳 주민들에게는 그저 특이한 머리카락 색일 뿐이죠.]

눈치를 받지 않는 게 이다지도 홀가분한 것이었던가.

이안은 지금의 무관심이 참으로 기분 좋았다.

그렇게 신나게 걸음을 옮기던 그때, 느껴지는 시선에 아래를 보니 스텔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여기서 할 일이 있지 않았냐고 묻는 듯했다.

“일단 이 지역을 다스리는 대칸을 만나야 해.”

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간단한 일인 것처럼 말해놓고 갑자기 대칸이라니?

그 미묘하게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며, 이안은 일부러 힘차게 말했다.

“좋아. 일단 딴 데 세지 말고 대칸을 만날 방법을 찾아보자고.”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내가 지금 귀신을 보고 있는 건가? 이건 또 뭔 자연의 조화야.”

익숙한 목소리에 이안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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