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91화 (92/222)

91. 샤카자이

이안이 못 들은 척, 스텔을 데리고 앞으로 나서려 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 이미 다 봤으니까 못 들은척하지 말라고.”

이안이 조심스레 고개를 뒤로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성인 남성도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다부진 체격의 소녀.

라이젤이 말에 탄 채 사나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황녀가 네가 죽었다고 말했을 때 난 믿지 않았다고.”

“음. 그만큼 나를 고평가해준 건가?”

“너 같은 놈들은 목숨줄이 질기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라이젤이 느긋하게 말을 몰아 다가왔다.

스텔이 옆에서 무슨 일이냐는 듯, 허리를 툭툭 치는 게 느껴졌지만 일단 무시했다.

그보다는 라이젤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초원 전사들이 입는 갑주를 걸치고 있었고, 그녀가 탄 말에도 마갑이 입혀져 있었다.

애초에 도시 한복판에서 말을 탈 수 있는 건 몇몇 허락받은 이들만이 가능한 일.

그런 시선을 눈치챘는지, 라이젤이 씨익 웃었다.

“내가 그래도 이곳에서는 알아주는 신분이거든. 무려 길거리에 아무나 잡아다 즉결처형할 권리가 있지!”

“…….”

즉결 처형이라는 말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호위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라이젤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런 짓은 안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만났으니 제대로 대접해야지. 따라와. 오랜만에 할 얘기도 좀 있고. 근데…… 옆에 그건 뭐야?”

라이젤이 이안의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스텔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눈을 안대로 가려놓고. 노예인가? 너가 그런 쪽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그런 거 아니야. 야,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안대 좀 벗어봐.”

잠깐 머뭇거리던 스텔이 마지못해 안대를 벗었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 라이젤의 호위들이 감탄을 흘렸다.

“와아…….”

“아름답군.”

라이젤도 스텔이 풍기는 분위기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어디서 이런 예쁜 여자애를 데려온 거야. 능력도 좋네.”

“성직자야. 이름은 스텔이고. 어쩌다 보니 여정을 함께하게 됐어. 그리고 애 아니고 성인이야.”

“그건…… 음. 요리사한테 음식을 넉넉히 해오라 해야겠군.”

자기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정작 스텔 본인은 관심 없는 듯.

주위에 펼쳐진 동시의 풍경을 멍하니 구경했다.

무감정한 두 눈은 마치 조금이라도 더 많은 풍경을 담겠다는 듯, 이리저리 굴러가고 있었다.

“좀 별난 사람이군 그래. 끼리끼리 다니는 건가?”

“누가 들으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 줄 알겠어.”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안과 라이젤은 서로 농을 건네며 걸음을 옮겼다.

분명 코르디스에서는 반목하거나 서로 목숨을 노리려고 몸싸움까지 벌였는데도 이상하게 대화가 불편하지 않았다.

원래 친한 사이였던 것 마냥 시원시원한 라이젤의 태도 덕분이었다.

이안이 물었다.

“그나저나 너가 왜 여기 있는 거야. 학교에서 사고치고 퇴학당하기라도 했어?”

“하하. 여름에 있었던 그 일 때문에 학사가 완전히 난리가 났거든. 교수들 절반은 책임지고 옷을 벗어야 했고, 악마 때문에 건물들도 파괴되었지. 황태자가 이참에 학교의 제도를 갈아엎어야 한다고 결정했고, 건물들도 새로 다시 짓는다고 방학을 일찍 앞당긴 거야.”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와는 다르게, 황태자가 코르디스의 재건에 깊숙이 관여한 여파로 라이젤이 이곳에 있는 듯했다.

“그나저나 굳이 네놈이 죽었다고 한 건 역시 교단 때문인가?”

“뭐, 그렇지. 교단한테 조사받다가 나처럼 뒷배 없고 재수 없게 생긴 놈은 산채로 불태워지기 딱 좋거든.”

“하하하! 이해해. 우리도 이제는 교단을 따르지만, 가끔 교단에서는 막무가내로 행동할 때가 있으니까. 특히 거기 사제들은 머리가 훼까닥 한 사람들도 있고. 아, 네 얘기한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라이젤이 친근하게 스텔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허공에서 생겨난 장벽에 라이젤의 손이 가로막혔다.

스텔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명백한 거절의 표현에 라이젤이 머쓱하게 말했다.

“까칠한 친구구만. 어쨌든, 악마를 죽였다는 명예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대단하군그래.”

“별로. 너도 말 좀 맞춰줘.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질색이니까.”

“뭐, 어디 가서 남의 비밀을 떠벌리는 입 싼 여자는 아니야.”

이후로도 라이젤은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로 코르디스에 관한 일이었는데, 이안이 죽은 줄 알고 그렉이 펑펑 울었다느니.

황녀가 갑자기 자치회에 들어갔다느니. 루크는 학교를 그만뒀다느니. 플로라는 여전하다느니.

짧은 시간 동안 코르디스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다 라이젤은 너무 자기 혼자 떠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안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곳은 대체 왜 찾아온 거야. 설마 전에 내가 한번 와보라고 해서 진짜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말이야.”

“아. 여기 도시를 다스리는 대칸에게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래? 우리 아버지는 왜?”

그 말에 이안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

도시의 정중앙에 위치한 대저택. 그 저택에서 이안은 얼떨결에 식사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신분이 높을 거라고는 예상을 했지만 말이에요.’

야만인이라 멸시받는 초원의 주민이 코르디스까지 왔다면, 필시 초원에서도 높은 신분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초원의 가장 큰 부족의 부족장이자, 초원 부족들의 연합을 이끄는 대칸.

초원에서는 황제와도 같은 그 대칸의 딸이라니.

새삼 사람이 달라 보였다.

“딸 아이가 손님을 데려오다니, 드문 일이네요. 부디 준비한 음식들이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귀부인이 인자하게 말했다.

그녀는 라이젤의 어머니로, 대칸의 네 번째 부인이라 했다.

이안은 거대한 식탁 위에 차례로 올려지는 온갖 산해진미를 보며 얼빠진 표정을 짓다, 급하게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저희를 이렇게 극진히 대접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안은 한껏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네 번째 부인이라 해도, 대칸의 아내면 엄청나게 높은 신분 아닌가.

이안의 그런 반응에 귀부인이 호호 웃으며 손을 저었다.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 있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리에게도 신분의 고하는 있지만, 제국의 귀족들이랑은 그 결이 조금 다르거든요.”

“예…….”

딸이랑은 영 딴판인 그 인자한 말에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안에게 귀부인이 충고를 해 주었다.

“하지만 대칸께서 오시면 예의를 지켜주세요. 초원의 가장 위대한 전사이자 이 땅 모든 사람들의 대리자인 그분은 많은 존경을 받고 있거든요. 만약 실수를 저지른다면, 대칸께서는 관대하게 넘어가 주시겠지만.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거예요.”

귀부인의 충고에 옆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라이젤이 한소리 했다.

“이놈이 이래 보여도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어머니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문제야.”

“너도 내 나이를 먹어보렴. 사람은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잔걱정이 는단다.”

이안은 묘한 얼굴로 모녀의 대화를 들었다. 귀부인은 기껏해야 3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였는데, 말에서는 얕지 않은 관록이 묻어나왔다.

이후에 형제자매들이 점점 모이고, 귀부인이 칠 남매의 어머니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이안은 귀부인이 그저 말도 안 되는 동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이를 안 먹는 주술이라도 부린 걸까요’

[그 비결이 알고 싶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늘어나 점점 북적였다.

부인만 다섯에 슬하에 자식들. 게다가 저택의 사용인들까지 돌아다니자, 이 넓은 저택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칸이 오기를 기다리며 가족들은 왁자지껄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여기가 대칸의 저택인지, 아니면 시장 바닥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그러다 좌중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쎄한 느낌에 이안이 고개를 들자 2 미터는 족히 넘는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썹에 사나운 눈매. 위엄있는 수염. 눈에서는 총기가 넘쳐흐르고 풍채는 젊은이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이제 막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것 같은 대칸은 카리스마란 무엇인지 직접 몸으로 설명하는 듯한 사내였다.

그 위엄에 일가족이 모두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안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고, 그때까지도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던 스텔의 머리를 억지로 눌러 숙였다.

“…….”

스텔이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이안이 작게 말했다.

“좀 눈치 좀 맞춰.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대체 로마가 어디냐고 묻는 스텔의 눈빛을 무시하며, 이안은 다시 식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칸이 오고 이미 식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악사들이 와 현악기를 퉁기며 음악을 연주했고, 하인들이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형제자매들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접시를 들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꼭 연회에라도 참석한 기분이었다.

이안이 감탄한 표정으로 라이젤에게 말했다.

“너희는 매일 이렇게 먹는 거야? 무슨 꼭 연회 같다.”

“무슨 소리야. 연회 맞는데.”

“……응?”

이안이 얼빠진 얼굴로 되묻자, 옆에서 귀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귀한 손님이 왔는데, 당연히 성대하게 연회를 열어야죠. 오는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지 않으면 안 좋은 소문이 퍼진답니다.”

“게다가 그 라이젤이 데려왔을 정도니, 보통 인간은 아니겠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라이젤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 왔어? 저기서 밥이나 먹지. 왜 왔어.”

“쯧. 오빠한테 말하는 꼬락서니가…….”

쥐같이 간사하게 생긴 사내가 혀를 찼다.

라이젤이 작게 소곤거렸다.

“바톨. 둘째 부인의 장남. 성격이 더러우니까 참고해.”

바톨은 기분 나쁜 눈빛으로 라이젤부터 시작해 이안, 스텔을 순서대로 훑었다.

그러다 스텔에게서 시선을 멈추고 눈을 부릅뜨더니 중얼거렸다.

“……실로 아름답구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멍하니 있던 바톨이 갑자기 헛기침을 하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라이젤에게 말했다.

“동생아, 무얼 하느냐. 어서 이 영애를 나에게 소개시켜주지 않고.”

“으엑. 뭐야 그 목소리. 역겹게.”

눈치를 보던 이안이 앞으로 나섰다.

“저는 이안이라고 하고 이쪽은 스텔입니다. 만나서 반갑…….”

“스텔. 이름마저 아름답구나.”

이안이 내민 손을 쌩하니 지나치며, 바톨이 스텔에게 향했다.

바톨은 자연스러운 태도로 스텔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스텔은 이안의 뒤로 슬쩍 움직여 피해 버렸다.

잠깐 이안을 원망스럽다는 듯이 노려본 바톨이 옷매무새를 다잡고는 느끼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소. 나는 바톨 샤카자이라 하오. 겨울밤 하늘의 별들처럼 아름다운 영애.”

“…….”

바톨이 한쪽 무릎을 꿇더니 왼손은 가슴에, 오른손은 스텔에게 내밀었다.

“초면에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제 두 번째 부인이 되어주시겠소?”

갑작스러운 청혼에 좌중의 시선이 모였다.

누군가는 흥미롭게, 또 누군가는 놀라움으로, 누군가는 경악했다.

마지막 건 라이젤이었다.

당황한 이안이 물었다.

“어…… 너네 부족은 원래 처음 만난 사람한테 청혼하니?”

“당연히 아니지!”

이안의 귓속말에 자리를 박찬 라이젤이 외쳤다.

“오빠! 대체 내 손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게다가 그분은 성직자라고! 결혼은 안 돼!”

“성직자…… 하지만 가정을 일구고 자식을 낳아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게 진정으로 신의 뜻이 아니겠소? 어떻소? 원한다면 그대를 내 본처로 삼아줄 수도 있소!”

바톨의 얼굴에 잔뜩 기대감이 차올랐다.

사람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스텔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그때.

스텔이 품을 뒤져 비스킷을 하나 꺼냈다.

그녀의 식사를 위해 특별히 만든 물건이었다.

오도독.

스텔은 비스킷을 작게 깨물어 먹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

악사들도 연주를 멈춘 침묵 속에서 오로지 오도독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바톨은 스텔이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걸. 자신이 보기 좋게 까였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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