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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92화 (93/222)

92. 샤카자이(2)

스텔이 비스킷을 반쯤 씹어먹을 때가 되어서야 바톨은 자기가 깔끔히 무시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바톨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옆에서 구경하던 라이젤이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 그러니까 좀 세련되게 고백하지 그랬어! 여기 부족 사람도 아니고, 외부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먹히겠어? 멍청아!”

“얘, 그만하렴…… 푸흡.”

그런 라이젤을 말리려는 귀부인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다른 형제자매들도 바톨의 꼴사나운 모습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바톨은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거절당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그 거절이 이런 식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바톨은 억지로 화를 삭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영애는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군. 하지만 그런 도도한 모습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소. 반드시 영애의 마음을 돌려 보이겠소. 그런 의미에서 함께 식사하며 얘기라도…….”

바톨이 더 다가서려 하자 스텔이 슬쩍 몸을 기울여 이안의 뒤로 피했다.

종지에 이안은 바톨과 스텔 사이에 끼인 처지가 되었다.

이안의 몸에 스텔의 얼굴이 가려지자 바톨이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바톨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빨리 꺼지지 않으면 가만 안 놔둔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 격렬한 감정을 덤덤히 받아냈다.

‘어딜 내가 점찍어 놓은 동료를 확 채가려고.’

스텔이 바톨에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이안마저 자신의 의중을 완전히 무시하자, 이번에야말로 바톨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했다.

그 쥐새끼 같은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감히…….”

하지만 사랑하는 스텔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바톨은 이번에 참지 않으려 했다.

곧장 검에 손을 가져가려 했다.

그때, 날카로운 고함이 바톨의 귀를 찔렀다.

“바톨! 무슨 짓이냐!”

그렇게 외친 건, 각진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사내였다.

그 체격이 어찌나 좋은지, 겉옷 너머로도 바위 같은 그 몸의 형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사내의 외침에 바톨이 찔끔하고, 라이젤이 재빨리 설명해 주었다.

“오템 오라버니야. 첫째 부인의 첫째 아들. 한마디로 장남인 셈이지. 굉장하지?”

“그래. 도저히 사람 몸 같지가 않네.”

“아무래도 둘 다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고 싶어 해서 사이가 별로 안 좋아.”

오템이 성큼성큼 다가와 바톨을 꾸짖었다.

“감히 손님을 모신 자리에서 무기에 손을 대다니, 정말 미친 것이냐? 이 소문이 만약 퍼지기라도 한다면 비단 네 명예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도 바닥에 떨어질 거다!”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바톨이 황급히 사과를 표했다.

“잠시 흥분으로 눈이 멀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럴 수 있죠.”

“라이젤 너에게도 미안하구나. 네 손님께 무례를 저지르다니.”

“오빠가 이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뭐.”

라이젤의 뼈있는 말에 바톨이 눈을 흘겼다.

진짜로 미안했다기보다는 그냥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 사과였던 것이다.

그 끈적한 시선으로 라이젤, 이안 그리고 스텔을 훑던 바톨이 원래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 식사를 시작했다.

한차례 폭풍 지나가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연회가 시작되었다.

음악이 다시 연주되었고, 술과 대화가 돌았다.

오템이 이안에게 팔을 내밀었다.

“……?”

“제국에서는 처음 본 사람과 이런 식으로 인사한다지?”

그제야 오템이 악수를 건넸다는 걸 깨달은 이안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도무지 사람 피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손이었다.

오템도 감탄을 흘렸다.

“좋은 손이군. 검을 주로 쓰는 모양이야. 아, 활도 다루나 보군.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정확하시네요.”

오템은 이안의 손에 배긴 굳은살만으로도 많은 걸 알아낸 듯했다.

이안은 뒤늦게 그게 오템이 이안을 시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시험에 자기가 통과했다는 것도.

오템이 호의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저 말괄량이가 손님을 데려왔다길래 궁금했었는데, 꽤 훌륭한 전사잖아.”

“……영광입니다.”

“하하! 나중에 사냥이나 같이 나갔으면 좋겠군.”

껄껄 웃은 오템은 호탕하게 술잔을 들이켜더니, 이내 다른 형제들에게 가 담소를 나눴다.

그제야 이안은 한숨을 푹 내쉬고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맛있는 향기를 풍기는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계속 누군가 다가와서 군침만 삼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이안에게 라이젤이 말했다.

“연회 자리에 초대된 손님이 한자리에서만 밥을 먹는 건 실례야. 저기 형제들처럼 술잔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나눠야 해. 그리고 그에 앞서 아버지께 인사를 올려야 하고. 애초에 아버지께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거라며?”

이안은 손에 든 돼지 갈비뼈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라이젤의 말이 맞았다.

그는 대칸에게 할 부탁이 있어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원래라면 대칸을 직접 알현하기까지도 이것저것 고생해야 했지만, 라이젤 덕분에 그 과정이 대폭 줄어들었다.

의도치 않은 소득.

이안이 결심을 굳힌 얼굴로 일어서자, 라이젤이 말했다.

“아. 그리고 너를 위대한 전사라고 소개했으니까, 만약 아버지를 실망시키면 목이 잘릴 수도 있어.”

“……뭐?”

이안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럼 아무나 이런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괜히 연회를 여는 게 아니라고. 아. 그리고 네가 실수하면 내 목도 달아날 수 있으니까 조심 좀 해줘.”

라이젤은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의 무게마저 가볍지는 않았다.

이안은 다급하게 소곤거렸다.

“아니. 왜 그런 거짓말을 친거야. 그리고 만약 잘못되면 어쩌려고. 네가 목숨 걸 정도로 우리 사이에 신뢰가 두터웠나?”

라이젤은 특유의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악마를 죽인 네가 위대한 전사가 아니면 대체 누가 위대할 것이며, 그런 사람을 믿지 않으면 대체 누굴 믿을 건데? 잔말 말고 가기나 해.”

팡!

라이젤이 머뭇거리는 이안의 등을 강하게 밀었다.

얼떨결에 떠밀린 이안은 이내 당당하게 대칸에게 걸어갔다.

아마도 이 자리를 마련해준 건 라이젤 나름의 감사 표시일 터.

자기를 믿어준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이안이 걸어오자 양다리 구이를 손에 쥐고 뜯어먹던 대칸이 고개를 들었다.

그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신체가 짜르르 떨렸다.

단순히 강자가 뿜어내는 위세와는 결이 달랐다.

황태자와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

그건 수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만이 풍길 수 있는 분위기였다.

“용병 이안. 초원의 지배자인 대칸께 인사드립니다.”

이안이 예법에 따라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대칸의 그런 이안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딸이 말한 대로, 정말 뛰어난 전사인지 진위를 판별하려는 듯했다.

굳게 닫혀 있던 그 입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라. 이안.”

이안은 명령에 따랐다.

슬며시 몸을 일으켜 대칸의 눈치를 살폈다.

딱딱하게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예상외로, 그 눈에는 자애로움이 깃들어있었다.

“반갑다 이안. 그리고 대초원에 찾아온 걸 환영한다.”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귀한 손님이라 데려왔는데, 내칠 수는 없는 법이지. 라이젤 그 아이의 안목을 믿기도 하고.”

대칸이 고개를 들어 라이젤을 쳐다보았다. 라이젤이 장난스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싱긋 마주 웃어 준 대칸이 말했다.

“딸 아이와는 코르디스의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예. 서로 이것저것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딸의 친우라 볼 수도 있겠군. 그래 이안. 네가 나에게 부탁할 게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말해보도록.”

이안은 잠시 침을 삼켜 목을 축였다. 이 한마디에 라이젤의 목숨까지 달려 있다니 괜스레 더 긴장되었다.

조심스레 운을 뗐다.

“언젠가 듣기로, 대초원의 어딘가에 샤카자이 부족의 성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칸은 술을 들이켜며 긍정했다.

“그렇다. 매년 전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한 명만이 발을 디디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곳이지.”

“그 성소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안을 보던 일가족들은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젤도 설마 저런 부탁이었을지는 몰랐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저런 걸 부탁할 줄 알았다면 미리 들어볼걸…….”

작은 목소리였지만 워낙 조용한 상황이라 큼지막하게 들렸다.

잠시 고심하던 대칸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아느냐?”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카자이 부족의 성소에 대한 설명은 이미 전날 밤 이네스에게 설명을 들었었다.

부족 사람들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신비로운 공간으로, 그녀 자신 역시 발을 들인 적이 있다고도 했다.

대칸이 냉랭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찌하여 그곳에 들어가겠다는 거지?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안은 침을 삼켰다.

초원에 있는 성소에는 이안이 찾는 다음 성검의 조각이 있다.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기는 힘들므로 적당히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거짓말했다가는 바로 죽일 기센데요.’

생각보다 더 예민한 부분이었는지, 대칸의 눈빛이 살벌하다.

시간을 더 끌수록 그 압박감은 더해지므로, 이안은 재빨리 대답했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

“죄송합니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믿어주십시오. 절대 악한 의도로 그곳에 가려는 건 아닙니다.”

“감히 나에게도 말하지 못할 의도라. 건방지군.”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라이젤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버님. 아니, 대칸이시여. 이자의 심성은 제 목숨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그가 하려는 일이 무엇이든, 그게 결코 나쁜 건 아닐 것입니다.”

“목숨을 건다라…….”

라이젤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대칸은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좋다. 네 그 결심이 연인으로서의 연정에서 나온 게 아닌, 전사로서의 의지임을 알기에 믿어주겠다.”

대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의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이안은 라이젤에게 눈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때.

듣다 못 한 바톨이 끼어들었다.

“말도 안 됩니다!”

바톨은 이번 해에 성소로 들어갈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아버님! 성소는 부족의 가장 뛰어난 전사들만이 허락된 곳 아닙니까! 그곳에 이방인을 들이다니,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네스가 한번 들어가 봤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럴 수 있었다.

200년이라는 시간은 인간 사회에서는 결코 짧지 않았으니까.

그런 바톨의 주장에 라이젤이 반박했다.

“성소에 오로지 우리 부족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규율은 없습니다. 자격이 있는 전사라면 누구나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죠. 그리고 전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반대하는 건 너무 딱딱한 생각 아닙니까 오라버니?”

“네년이 감히……!”

“그만!”

대칸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반사적으로 귀를 양손으로 막은 이안에게 대칸이 말했다.

“라이젤이 보증했으니, 네 인성을 의심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저 바톨은 그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힘겨운 시험을 이겨냈다. 너에게 시험을 내어주겠다.”

“알겠습…….”

“하지만 그 전에!”

대칸의 목소리가 이안의 말을 끊었다.

“네가 바톨보다 나은 재주가 단 한 가지라도 있다는 걸 보여라. 그렇지 못하면 시험을 보나 안 보나 의미는 없을 터이니. 바톨!”

“네, 아버지.”

“네 재주를 선보여라.”

“알겠습니다.”

바톨의 얼굴이 화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어딘가로 급하게 사라졌다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바톨의 손에는 활이 하나 들려 있었다.

“자고로 초원을 벗으로 살아가는 전사들에게 활이란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으며,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자질. 우선 활 솜씨를 보이겠습니다!”

“좋다. 어디 한번 재주를 부려보거라.”

대칸의 명령에 바톨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안도 긴장한 얼굴로 바톨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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