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샤카자이(3)
바톨은 하인들을 시켜 연회장을 밝히던 은 촛대를 쭉 나열하게 했다.
은 촛대 열 개가 탁상 위에서 밝을 빛을 흩뿌렸다.
“활을 쏴 촛불의 불꽃을 모두 꺼트려 보이겠습니다. 촛대를 상하지 않고 말이죠.”
“한번 해보거라.”
대칸의 허락에 바톨은 지체없이 활을 들었다.
화살을 쥔 오른팔의 근육이 순간적으로 부풀어 올랐고, 바톨은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쐐액! 팍!
일자를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경로의 촛불을 모조리 꺼트리며, 끝에는 반대쪽 벽에 박혔다.
짝짝짝짝.
구경하던 일가족은 심드렁한 얼굴로 의례적인 박수를 보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이곳 대초원에서 이 정도 묘기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았다.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조금 화가 난 듯하면서도 바톨은 이안을 자신만만하게 쳐다보았다.
마치 이걸 할 수 있냐는 듯한 태도였다.
지켜보던 이안에게 대칸이 물었다.
“할 수 있겠나? 활을 다룰 줄 아나? 원한다면 활을 내어줄 수 있다.”
“아뇨. 제 활을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거라.”
허락을 맡은 이안은 방에서 성검과 태양의 활을 모두 챙겨 들고 왔다.
대칸이 흥미를 보였다.
“검은 검집에 쌓여 있어 잘 모르겠지만 제국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종류의 검인 것 같고…… 활은 대체 어디서 구한 거지? 대단한 보물이군.”
활에 익숙한 초원 민족답게 대칸은 이안이 가진 태양의 활이 얼마나 대단한 무구인지 알아보았다.
지켜보던 일가족들도 감탄을 흘리며,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구경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런 가족들을 바톨이 짜증을 내며 막아섰다.
“지금은 저자를 시험하는 중입니다! 사사로운 호기심은 나중에 해결하십시오.”
“어휴. 구경도 못 하냐.”
“바톨 저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예민한 부분이 있었죠.”
“쩨쩨해 바톨. 그러다 대머리 된다.”
“방금 누구야! 라이젤 너지!”
방방 뛰며 가족들을 쫓아낸 바톨이 이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바톨이 씨익 웃었다.
“초원에서 전사로 인정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다. 어디, 너도 한 번 실력을 보여봐라.”
그러고는 여유로운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이안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실패할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건 다른 가족들도 다르진 않았다.
초원의 부족들은 자신들만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궁술이었다.
젖을 떼면 곧바로 활을 잡는 초원의 주민들의 궁술은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대륙의 정예 궁병보다 초원의 10살짜리 아이가 활을 더 잘 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차분히 활을 쥐었다.
이네스가 말했다.
[바톨. 마음에 안 드는 사내지만 궁술 자체는 뛰어났어요. 그 정확성도 정확성이지만, 시위를 메긴 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니까요.]
‘맞아요. 저는 그렇게 빨리 못 쏠 거 같아요. 그건 포기하고…… 다른 부분에서 좀 더 강한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겠죠.’
이안은 천천히 시위를 잡아당겼다.
코헨에서 머무는 동안 쉬지 않고 연습했다 해도, 바톨이 평생 연습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이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네스의 재능을 물려받은 지금, 시간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집중력.
이안은 오로지 목표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위를 당긴 채 조용히 기다렸다.
어깨에 강한 힘이 들었지만,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
팔에 떨림을 최소화하고, 목표에 집중했다.
그렇게 기다리다, 시야에 주위 모든 것이 지워져 버리고 목표만이 보이는 그때.
이안은 손을 놓았다.
퉁! 파각!
부드럽게 날아간 화살이 순식간에 촛대의 불을 꺼트렸다.
그 속도가 어찌 빠른지, 마치 바람이라도 불어 촛불들이 한꺼번에 꺼진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실력이 나쁘지 않군.”
슬쩍 고개를 들어 화살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확인한 대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있던 가족들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쏜 화살은 아까 바톨이 쏘아 박혀 있던 그 화살을 부러트리고 정확히 그 자리에 박혀 있었다.
바톨과 이안, 어느 쪽의 실력이 더 위였는지는 정확히 가릴 수 없다.
하지만 이안이 더 강한 인상을 주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짝짝짝짝!
가족들은 이안을 향해 힘찬 갈채를 보냈다.
이번에는 진심이 담긴 박수였다.
“제국인들도 꽤 하잖아.”
“멋있군. 다른 것보다 시위를 당겨서 그렇게 오래 버티다니,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힘이 대단해.”
일가족들은 갑자기 이안에게 진한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거친 환경에서 태어나 호전적인 이들은 강한 전사를 좋아했다.
분위기가 불리하게 흘러간다는 걸 눈치챈 바톨이 급하게 외쳤다.
“잠깐! 인정하지. 네 활 솜씨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다음으로 넘어가자!”
“우우. 바톨. 결과에 승복해라!”
“시끄러워!”
바톨이 급하게 대칸에게 말했다.
“아버지. 다른 재주를 보이겠습니다.”
“하지만 바톨. 나는 이미 너보다 단 한 가지라도 나은 재주를 보이면, 허락해주겠단 말을 내뱉었다. 나더러 한 입으로 두말을 하란 말이냐.”
바톨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 고갯짓에 맞춰, 수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보다 나은 재주를 보이라 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제 활 솜씨가 저놈보다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어쨌든 더 낫지는 않았단 얘기지요.”
본인이 직접 하기에는 뻔뻔한 얘기였지만 바톨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다.
그만큼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이 부족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였다.
바톨의 말을 들은 대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자의 활 솜씨가 인상 깊었지만, 너보다 뛰어나다고 얘기하기는 힘들군. 인정하나?”
이안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톨을 추켜올렸다.
“예. 바톨 님의 솜씨가 아주 뛰어났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바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깔끔하게 인정하는 모습은 바톨의 행동과 대비되어 바톨이 더더욱 추하게 보였다.
대칸이 물었다.
“그렇다면 바톨. 다음은 무엇을 보여줄 거지?”
기다렸다는 듯, 바톨이 곧바로 답했다.
“예! 으레 초원의 전사라면 활을 잘 다뤄야 하고, 검을 잘 써야 하며, 말을 잘 타야 하고, 매를 잘 부려야 합니다. 특히 매는 매우 지혜로운 동물입니다. 본능적으로 사람을 가리지요.”
“그래서?”
“제가 한번 매를 부려보겠습니다.”
“바톨!”
“비겁하네 정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톨의 말마따나 초원의 뛰어난 전사들은 대부분 매를 하나씩 길렀다.
매를 이용해 드넓은 초원에서 사냥감을 찾는 것이다.
과거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초원의 매들이 제국 측 전서구를 잡아내거나 매복을 간파해, 제국군이 고전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초원 부족들은 매에 대해서도 강한 자부심을 가지지만, 매를 기르는 건 그들만의 문화기도 했다.
제국에서도 빈번히 쓰이는 활과 달리, 매를 기르는 제국인은 손에 꼽았다.
그렇기에 바톨은 절대 지지 않을 승부를 제안한 셈이다.
비겁하게도 말이다.
대칸의 미간을 좁혔다.
“바톨. 너는 정말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느냐?”
엄숙한 대칸의 질문에 바톨은 뻔뻔하게 답했다.
“제가 기르는 매는 제 자부심이자 자존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진다면, 깔끔히 결과에 승복하겠습니다.”
“그렇다는군.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이 시합은 한쪽에 너무 유리한 듯하다. 네가 원한다면 거부해도 이해해주겠다.”
이안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아닙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흐음…….”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의중을 읽기라도 하겠다는 듯, 이안의 얼굴을 훑던 대칸이 말했다.
“좋다. 서로 합의가 됐다면, 말릴 이유는 없겠지. 바톨, 네 재주를 보여라.”
“네! 휘이익!”
바톨이 휘파람을 불자 커다란 매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들었다.
구릿빛 깃털이 매우 우아한 매였는데, 그 꽁지깃을 붉은색과 푸른색 실로 장식해 화려한 인상도 함께 주었다.
게다가 그 크기와 더불어 날카로운 눈매까지.
한눈에 보아도 좋은 혈통의 매였다.
자랑스럽다는 듯, 그 가슴 털을 쓰다듬어준 바톨이 입을 열었다.
“자, 네 묘기를 보여주거라.”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매가 낮게 날아, 아까 설치해둔 은 촛대 사이 사이를 빠르게 통과했다.
언제 은 촛대에 부딪혀도 안 이상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비행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별다른 지시도 없이 저런 묘기를 부리다니.
대체 얼마만큼의 연습을 하고, 바톨과 매 사이의 신뢰도가 어느 정도일까.
지금껏 바톨을 조금 우습게 여기던 일가족도 이번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이번 해의 성소에 들어갈 유력 후보가 아니었다.
푸드득.
바톨의 매가 비행을 끝내고 그의 팔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지금껏 큰 반응 없이 보던 대칸도 그 돌 같은 손바닥을 부딪혀 갈채를 보냈다.
“훌륭하다. 많이 노력했구나. 바톨.”
아버지께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바톨이 눈물마저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일가족들. 특히 바톨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오템은 미묘한 얼굴을 했지만.
어쨌든, 이미 시합이 끝나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에 이안이 끼어들었다.
“이제 제 차례입니까?”
대칸에게 한 말이었지만, 어째 바톨이 으스댔다.
“하하. 그래그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모습 하나는 칭찬해줄 만하군 그래. 근데 매도 없는 거 같은데. 괜찮겠어? 아니면 이 친구를 빌려줄까? 네 명령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이겼다는 생각에 잔뜩 신이 난 바톨을 무시하며, 이안은 조용히 손을 그러모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안의 손에 시선이 모여들었다.
이안이 천천히 손을 뗐다.
빛으로 이뤄진 매가 세상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개를 펼쳤다.
“핍!”
시종일관 무덤덤하던 대칸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부릅떠졌다.
***
이런 류의 시합은 매가 부리는 묘기도 중요했지만, 그 외형적인 모습도 몹시 중요했다.
더 아름답고 커다란 매가 따르고 인정하는 사람이 더 뛰어날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미 호크가 묘기를 부리기도 전에 승부는 결정 났다고 볼 수 있다.
그 어떤 매를 데려와도, 호크가 자아내는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는 따라올 수 없었으니까.
[저도 빛의 정령을 선보여서 초원 부족들의 호감을 얻었었죠. 역시, 시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네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은 이미 이안이 보여준 빛의 정령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다들 즐거운 듯이 방금 본 신비한 광경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고, 바톨은 얼이 빠진 얼굴로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아무도 승부의 결과에 대해 말하거나, 빛의 정령이 진짜로 매가 맞는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방금의 경험을 순수하게 즐거워했다.
라이젤이 이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이야! 그런 재주는 또 언제 생겼데? 설마 그때 보였던 빛 덩이가 커서 그 매가 된 건가?”
라이젤에게서 느껴지는 알싸한 술 냄새에 이안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 열심히 하다 보니 되더라.”
“활은? 너 원래 활 같은 거 안 썼잖아!”
“그것도 하다 보니 되더라.”
“하하! 재수 없는 자식!”
“라이젤 비켜! 나도 얘기 좀 나눠보자!”
“꺼져! 내 손님이야!”
이제껏 자리를 지키던 형제들이 라이젤을 제치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다들 조금이라도 이안과 말을 붙여보고 싶은 눈치였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건네는 말과 술잔을 받으며 정신없이 연회를 즐기던 이안은 문득, 내팽개쳐 놓은 자기 일행이 떠올라 주위를 훑었다.
스텔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
그녀는 아까 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음식을 먹지도, 술을 먹지도, 누구랑 대화하는 일 없이.
그저 멀뚱히 허공을 바라보며, 마치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절로 사람의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스텔의 이질적인 분위기에 다른 이들도 선뜻 접근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안은 사람들을 뿌리치고는 스텔에게 다가갔다.
올라오는 취기에 걸음걸이가 불안정했다.
따지고 보면 자기 때문에 온 건데, 신경 쓰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이안이 짧게 사과를 표했다.
“미안.”
“…….”
그제야 스텔이 고개를 들었다.
이안을 보며 그저 무감정한 눈빛으로 침묵을 지켰다.
마치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마냥.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스텔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연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렇게 떠들썩한 연회가 끝이 나고 다음 날.
대칸은 아침 일찍 이안을 불렀다.
“시험을 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