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샤카자이(4)
대칸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소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전사들에게는 각각 시험을 내려준다. 그 시험을 얼마나 훌륭히 수행했느냐에 따라 우열을 가리지. 바톨은 이미 여름에 시험을 통해 자신의 자격을 증명했다.”
어제 바톨과 한 대결은 그저 최소한의 시험을 볼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진짜는 지금이었다.
“인정받고 싶다면 바톨이 했던 것보다 더 어려운 시험을 돌파해야 한다. 몹시 어렵고, 때로는 목숨이 위험한 일이 될 테지. 그래도 괜찮겠나?”
“예. 그 정도는 이미 각오했습니다.”
“좋다. 이걸 받아라.”
이안은 반투명한 자수정에 형형색색의 말꼬리 털을 매달아 놓은 장식품을 건네받았다.
대칸의 증표였다.
“다섯 개의 부족에 전령으로서 찾아가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나의 말을 전하라.”
대칸이 잘 들으라는 듯,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륙의 정세가 어지럽다! 대칸으로서 명하노니, 한 달 후에 부족 회의에 참여하라! 그 어떤 이유로든 참석하지 않는 이들은 내 직접 목을 칠 것이다!”
“......목을 쳐야 한다는 부분도 말해야 하는 겁니까?”
“그 부분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왜, 못하겠는가?”
“아닙니다. 대칸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뒤로 물러서지 않는 이안의 모습에 대칸이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너에게 2주의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야 한다.”
“맡겨만 주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인 이안에게 대칸이 몹시도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이번 시험만 제대로 마친다면 라이젤과의 혼인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다.”
“......네?”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조아리던 이안이 우뚝 멈췄다.
대칸은 황송하게도, 이안의 어깨를 직접 두드려주며 격려했다.
“초원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은 제국과는 달리, 출신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네가 성소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전사라면, 너는 이미 훌륭한 부족 사람이라 할 수 있지. 힘내도록, 예비 사위.”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와 라이젤은 그저 친우일뿐,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 초원의 왕은 이안이 성소에 발을 들이려는 게,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고 착각한 듯 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오해가 생긴 걸까.
이안이 급하게 부인하자 대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뭐? 내 딸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어디가 모자라서!”
“아니 모자라다는 게 아니라…….”
대칸은 생각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안은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
“전령으로서 다른 부족을 방문한다라……. 꽤 성가신 일을 받았네.”
라이젤이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썰었다.
이안이 대칸과 독대하는 동안, 스텔과 라이젤은 이미 방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라이젤이 물잔을 건네주자, 스텔이 말없이 홀짝 들이마셨다.
어제 처음 만났을 때는 몸에 손도 못 대게 했던 걸 생각하면 꽤 친해 보였다.
나름 스텔에게도 사람을 대하는 기준 같은 게 있는 것일까.
이안도 식사자리에 합석하면서 물었다.
“뭐,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
게임에서 받는 대칸의 시험도 똑같았다. 제한 시간 내에 다섯 부족을 돌고 올 것.
다른 무엇보다 그 촉박한 시간이 까다로운 퀘스트였다.
라이젤은 입안에 든 고기를 꿀꺽 삼키고 말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 전령으로 갔다가 목이 잘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거든.”
“그래도 되는 거야? 그래도 대칸인데.”
“많은 부족들의 지지를 받는 게 대칸이라지만, 당연히 그걸 고깝게 여기는 놈들도 있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승냥이들이.”
결국, 시험을 치르기 위해 사지의 한가운데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일까.
하지만 이안은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여차하면 도망갈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위한 스텔이다.
이안은 얼마 전, 습격자들이 스텔 한 명을 어찌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얘만 있다면 전장 한복판에 떨어져도 죽을 일은 없겠지……. 근데 위급해지면 도와주겠지?’
게임에서야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게 바로 동료인데, 이곳에서는 그런 점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스텔처럼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더더욱.
이안이 갑자기 고민에 빠지자 라이젤이 물었다.
“왜 그래. 씹던 음식도 내버려 두고.”
정신을 차린 이안은 이곳에 오기 전의 일에 대해 얘기했다.
“아니. 얼마 전에 초원을 지나는데, 얘가 습격을 받고 있더라고.”
이안은 손가락으로 스텔을 가리켰다.
스텔은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무심한 얼굴로 비스킷을 우물거렸다.
라이젤이 흥미롭게 들었다.
“흐음, 그래? 뭐. 삶이 궁핍해지면 순식간에 강도로 돌변하는 부족들이 좀 있지. 그래서, 싸웠어?”
“어. 근데 좀 특이한 건 그 안에 교단의 사제들이 섞여 있더라고.”
초원에 살아가는 민족 과반수는 아직 이교도다.
황제와의 협정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지만, 교단에서는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교단의 사제들과 전사들과 함께라니. 흔히 볼 수 없는 조합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텔과 함께하면 유난히 많이 습격을 받게 되지’
게임에서는 성도와 관련된 이벤트 때문에 스텔은 많은 습격을 받는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 빈도가 성도에 가까워질수록 심해진다는 건 기억에 남았다.
라이젤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음……. 요즘 헬렝게 부족 쪽의 소문이 좋지 않다는데, 어쩌면 그곳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소문이 좋지 않다니?”
“그쪽 대지가 오염되고 있다는 보고가 가끔 들어와서 말이야. 놈들이 다른 누군가랑 손을 잡지 않았나 하는 말이 많아. 배신을 준비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헬렝게 부족은 이안이 전령으로서 찾아가야 하는 부족이기도 했다.
어쩌면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스텔이 노려지는 배경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스텔에게도 물어봤었지만 모른다는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새 식사를 깔끔하게 마친 라이젤이 말했다.
“2주밖에 없으면 지금 당장 준비해서 가야겠네.”
“어. 이거 먹고 바로 떠나려고.”
“잘 준비해서 조심히 갔다 와. 네 생각보다 초원의 겨울은 가혹하니까. 근데……. 여기 이 친구도 같이 가는 거야?”
라이젤이 눈짓으로 스텔을 가리켰다.
위험한 일에 스텔을 데려가는 게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실제 나이는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스텔은 그저 작은 소녀일 뿐이었으니까.
“그야 당연하지.”
“서로 합의는 본 거 맞아? 억지로 끌고 가는 거 아냐?”
“나를 뭘로 보……. 아.”
그제야 이안은 스텔에게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게임에서 동료 캐릭터란 플레이어를 당연히 따라다닌다.
하지만 지금 이안과 스텔은 함께 성도로 가자고 협의하고 동행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제야 실수를 깨달은 이안이 횡설수설 스텔에게 설명했다.
“어, 내가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말이야. 어, 음. 어쩌면 네 동료들을 죽인 배후랑 연관이 되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찾아갈 텐데. 네가 함께 와주면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얼씨구. 아직 서로 합의도 안 된 모양이구만. 어이 아가씨. 이런 거 하나하나 들어주면 버릇 나빠져요.”
“…… 초치지마!”
이안이 라이젤과 투닥대는 사이.
멍하니 얘기를 듣고 있던 스텔이 무감정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의 표시였다.
***
“이안. 우리도 함께하겠다!”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함께한다면 매우 값진 여정이 될 거야.”
이안이 시험을 위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부족의 전사들 몇이 이안을 찾아왔다.
어젯밤 이안이 보인 활약이 벌써 소문이 퍼져, 호감을 품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이안이 시험을 해결하는 데에 한 손 보탤 생각이었다.
전사들의 뒤편에서 일가의 장남, 오템이 앞으로 나와 설명했다.
“부담스러워 할 필요 없네. 주위를 아우르는 인망 역시 전사로서의 미덕 중 하나니까. 심지어 바톨 그 녀석은 시험을 치를 때 거의 군대를 데리고 다녔거든.”
오템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자네 같은 뛰어난 전사와 함께 할 수 있다면, 큰 명예라 생각할 걸세.”
이안은 하나같이 잘 무장한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말과 함께 짐까지 싸 놓은 걸 보니, 벌써 긴 여정을 위해 모든 준비를 끝마친 듯했다.
그 점에서 이안은 마냥 호의를 베푸는 듯하던 오템의 진의를 엿보았다.
“아무래도 오템 님께서는 제가 꼭 성공하시길 바라는 것 같군요. 여기 있는 전사들은 다 오템 님을 따르는 사람들인가요?”
전사들이 크게 눈을 뜨며 오템의 눈치를 보고, 오템은 눈썹을 꿈틀였다.
“하하. 눈치가 빠르군. 맞네. 하지만 나쁜 뜻은 없었다는 걸 알아주게.”
“바톨 때문인가요?”
“그래. 내 반푼이 동생은 능력에 비해 언제나 과분한 걸 원하려 하지. 게다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네. 이렇게 전사들을 지원해주는 건 내 욕망도 있지만, 자네를 걱정해서이기도 하네.”
오템과 바톨은 서로 대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다.
만약 이안이 바톨을 제친다면, 바톨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 터.
그런 계산이 아래에 깔렸었기에 오히려 오템의 제안은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이안은 거절했다.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이 전사들은 모두 뛰어난 자들이네. 그리 앞서 말했다시피, 남의 도움을 받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전사들의 실력을 의심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안은 뒤에 있던 스텔을 힐끔 돌아보았다.
스텔의 신성력은 강하지만, 한계는 있다.
사람이 늘어나면 불필요한 신성력의 낭비가 커질 것이고, 그렇다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게다가 일행이 적을수록 발걸음은 가벼운 법.
그런 이안의 의중을 알아챈 오템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이 확고하니 어쩔 수 없군. 알겠네. 자네가 무사히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겠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었는데.”
“네, 말씀하세요.”
“라이젤과는 무슨 사이인가?”
그 뒤로 이안은 대칸 때와 마찬가지로, 오해를 푸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
모든 준비를 마친 이안과 스텔은 함께 말을 끌고 일가를 나섰다.
벌써부터 싸늘한 바람이 얼굴에 불어닥쳤지만, 양털로 만든 두꺼운 외투 덕에 그리 춥지는 않았다.
그렇게 대저택을 나서려던 그를 배웅하는 사람이 여럿이었는데, 그중에는 바톨도 있었다.
바톨은 이안에게는 깊은 분노를, 스텔에게는 탐욕의 감정을 내비쳤다.
“아니, 졌으면 좀 사내답게 넘기자고. 아직도 꿍해 있어가지고 말이야.”
그 불순한 눈빛을 눈치챈 라이젤이 옆에서 핀잔을 줬지만, 바톨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런 바톨과 눈 씨름을 하던 이안은 고개를 휙 돌려, 대저택을 나섰다.
안대로 눈을 가린 스텔의 팔을 잡아끌며 혼잡한 거리를 헤쳐나간 이안은 도시를 벗어나고 나서야 말에 올라 속도를 올렸다.
두 사람을 실은 흑마는 빠르게 달려, 금방 점이 되어 초원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맞나?”
“그래. 샤카자이와 연관이 있는 듯 하다.”
“......까다로워질 수도 있겠어.”
“죽이면 그만이야.”
도시의 입구 근처, 바짝 엎드려 숨어 있던 사내 둘이 그 뒷모습이 사라지는 방향을 가늠하다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대초원의 겨울바람과 섞여 지평선 저 너머까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