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초원의 시험
“더럽게 춥네.”
라이젤의 말이 맞았다.
대초원의 겨울은 혹독했다.
한낮에도 뼛속까지 불어닥치는 칼바람에 이안은 외투를 단단히 둘렀다.
추위가 익숙하지 않은지 타고 있떤 흑마가 푸르르 투레질을 하며 짜증을 부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에 이안은 작게 혀를 찼다.
“쯧.”
나침반을 챙겨왔으니, 이 드넓은 초원에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시야가 좁아지는 건 중요한 문제다.
당연하게도 이 초원에도 위험한 괴수들은 서식하고, 스텔을 따라오던 습격자들도 신경 쓰였다.
‘아니, 오히려 이 눈 덕분에 쓸데없는 싸움을 피해갈 수도 있겠지.’
눈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는 건 이안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그때, 뒤에 타고 있던 스텔의 몸이 기우뚱 넘어갔다.
이안이 황급히 팔을 뻗어 스텔의 허리를 붙잡았다.
“깜짝이야.”
흑마가 야트막한 둔덕을 건너뛰면서 몸이 조금 세게 흔들렸는데,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스텔이 중심을 잃은 듯했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이 안 보이니까 그러는 거 아냐. 종교적인 이유든 뭐든, 일단 말을 탈 때는 안대 좀 벗어.”
“......”
사실 스텔이 낙마한다고 다칠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기분의 문제다.
이안의 조언에 스텔은 안대를 슬쩍 올려, 한쪽 눈만 빼꼼 드러냈다.
색의 옅은 하늘색 눈동자가 갑작스러운 빛에 조금 찡그리다, 이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설마 눈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야?”
스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도 안 내릴 정도로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온 거야?”
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부정할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던 이안이 되물었다.
“그니까 눈이 내리는 지역인데, 이번에 눈을 본 건 처음이라고? 아, 대부분의 시간을 안대를 써서 그런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텔은 말없이 다시 안대를 내려버렸다.
이안은 고삐를 쥐면서도 이 기묘한 소녀이자 동료에 대해서 생각했다.
‘막상 보니 엄청 특이한데요. 제 예상보다 더요.’
이네스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신성이란 마법이나 정령술과는 또 궤를 달리하는 힘이에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죠.]
‘강한 신성을 다룰수록 그만큼 신에 대한 믿음이 두텁다는 거네요?’
[네. 그리고 그런 믿음을 인정받으면 교단의 윗자리에 오를 수 있고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런 사람들이 과연 정상일까요?]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수준으로 신을 믿는다면, 다룰 수 있는 신성도 평범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 신을 굳게 믿는 건 바로 광신도 들이다.
그들은 일반인의 사고와는 동떨어져 있는 어딘가 뒤틀린 존재다.
그리고 교단의 수뇌부는 바로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요컨대 스텔이 특이한 것도 당연하다 이건가요?’
[그리고 그녀를 이렇게까지 키워낸 사제들도 정상적인 사람들은 아니었겠지요. 그녀를 보세요. 뭔가 생각나는 게 없나요?]
이안은 고개만 돌려 스텔을 보았다. 스텔은 여전히 안대를 쓴 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 마냥.
이안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밥은 최소한의 영양가만 있는 식단. 수면은 딱 세 시간. 실내가 아니면 안대를 벗으려고 하지도 않아요. 그런 생활을 평생 유지했다고 하면…….’
이네스가 이어 말했다.
[그녀는 평생을 학대받고 살아왔던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아니었을 거니까요.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바꿔주고 싶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뭐라 하기엔 몇 개의 문제가 있었다.
우선 스텔이 속해 있는 종파의 금욕적인 방식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는 것.
당장 스텔이 그 증거였다.
이 정도로 강력한 신성을 다루고 기적을 부릴 수 있는 이는 드물었다.
또 다른 문제는 스텔의 의중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
대화라도 가능하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으련만, 당최 대답을 하지 않으니 뭔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뭔가 도와주고 싶어도, 뭘 어떻게 도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지. 자기 역할만 잘 해준다면 별로 상관없는 거 아닌가?’
이안이 스텔을 받아들인 건 그녀가 가진 신성 때문이다.
그 신성이 유지된다면, 사실 그 외의 부분은 이안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스텔이 갑자기 돌발행동을 보이거나 할 타입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종교인들에게 교리와 관련된 문제는 민감한 부분이 아닌가.
평생을 무교로 살아왔던 이안은 차마 그 부분을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잘못했다가 스텔이 이안과 함께하는 걸 거부하기라도 하면 그것만큼 곤란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유보적인 태도를 이네스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이안이 동료를 구하는 것을 꺼려하고, 설령 구한다 해도 그 인성적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다.
이네스는 완벽한 사람을 원하는 걸까?
어쨌든, 이안은 자기가 정리한 생각을 이네스와 논의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차가운 바람 소리 사이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있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챙강!
두 동강 난 화살이 힘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습격이야. 스텔! 대비해!”
도시에서 벗어난 지 불과 반나절 만에 습격을 해오다니.
이안이 도시에 머물고 있을 때부터 감시한 것일까?
잡상을 머리에서 지워내며 이안은 활을 손에 들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초원 너머, 수십 개의 인영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그 안에 섞여 있는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이안이 스텔에게 부탁했다.
“장벽으로 지켜줘!”
고개를 끄덕인 스텔이 손바닥을 하늘로 향했다.
신성하게 빛나는 반구형 장벽이 이안과 스텔, 그리고 흑마까지 모두 감싸주었다.
두두두두!
화살비가 장벽을 두드리며 흩어져 나갔지만, 이 정도에 뚫릴 정도로 스텔의 믿음은 약하지 않았다.
이안은 지체 없이 화살을 꺼내 활에 걸었다.
시야가 제한 되어 흐릿하게만 보였지만, 그건 적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저들이 이리 화살을 정확하게 쏘았다면 이안도 가능할 터.
“후우.”
깊게 숨을 내뱉은 이안은 곧장 화살을 쏘았다.
그대로 방벽을 통과한 화살이 저 멀리 날아가고.
“억!”
인영 하나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안은 연속해서 방벽에 막히는 화살을 쳐다보며, 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적군의 공격만 딱딱 막아내는 방벽이라니. 역시 편리하구만.’
신성은 다른 모든 신비와 비교해도 그 범용성이 높다.
말 그대로 믿음에 따라 기적을 부리는 것이기 때문에 활용할 여지도 많고, 현실의 법칙에서도 가장 자유롭다.
그 장점은 싸움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쐐액!
내리는 눈을 뚫고 날아간 화살이 또 한 번 적중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여긴 습격자들이 말을 몰아 달려왔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기마술에서는 초원 부족들에 비해 떨어졌기에 금방 거리가 좁혀들었다.
가장 앞서 온 건 쫙 째진 눈에 험상궂게 생긴 전사였다.
전사가 곡도를 들고 거리를 좁혀 왔다.
활 대신 검을 든 이안이 남은 한 손으로는 스텔의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칼을 찔러넣었다.
캉! 캉! 푹!
일점을 향해 연달아 세 번의 찌르기가 펼쳐졌다.
제법 실력이 있던 전사는 앞선 두 일격을 막아냈지만, 허리 균형이 깨진 탓에 세 번째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절묘하게 나아간 성검이 급소만을 얕게 찌른 뒤, 그대로 되돌아갔다.
사내가 낙마했다.
“죽여!”
“일단 요술부터 부숴!”
그렇게 칼을 몇 합 겨루는 사이. 뒤따라오던 전사들이 박차를 가해 접근했다.
스텔의 장벽은 계속 둘을 감싸고 있었는데, 전사 중 하나가 꼬챙이처럼 생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꼬챙이의 끝은 불길한 검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전사는 그대로 속도를 그대로 실어 꼬챙이를 장벽에 부딪혔다.
쩌적!
“......!”
간단히 막아내리라 여겼던 스텔의 장벽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에서 시작된 균열이 쩌적―하고 퍼져나가다, 이내 깨져버렸다.
무감정한 스텔의 눈이 조금이지만, 평소보다 크게 뜨였다.
“좋아! 그년이 준 무기가 효과가 있어! 이대로 마무리……. 컥!”
신이 나서 외쳐대던 전사의 목을 이안의 검이 꿰뚫었다.
이안이 외쳤다.
“다시 장벽 세워!”
퍼뜩 정신을 차린 스텔이 장벽을 만들어냈다.
장벽이 잠깐 깨진 틈을 타 날아오는 갈고리와 화살 따위가 튕겨 나갔다.
‘몇이나 남았지? 10? 20?’
눈 때문에 적의 정확한 전력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스텔의 장벽에 대비해서 특별한 무기까지 챙긴 저들이 또 어떤 걸 준비해 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였다.
이안의 바로 앞쪽 땅에 황금색 직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직선은 이리저리 구부러지더니 이내 한 변이 10 미터 정도 되는 정사각형이 되었다.
정사각형의 가장자리로 황금색 장막이 펼쳐졌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그게 어떤 기적인지 알아차렸다.
‘저 기술을 뭐라 하더라. 그래. 속박의 성광이었나?’
옛날 옛적, 한 사제가 자기 영혼을 걸고 강력한 악마의 수하를 봉인한 일화에서 유래된 기적이다.
시전자의 영혼을 깎아 사용하는 악질적인 주문이지만, 그만큼 효과는 강하다.
‘이대로 벽에 부딪히면…….’
스텔의 장벽과 황금빛 장막. 어느 쪽이 더 단단할까.
만약 이쪽 장벽이 먼저 깨져버린다면 둘은 달리는 속도 그대로 장막에 부딪힐 것이다.
‘굳이 도박할 이유는 없지.’
이안은 급하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흑마를 멈췄다.
아직 더 달리고 싶은지, 흥분한 흑마가 콧김을 내뿜었다.
이안은 황금빛 장막을 툭툭 두드렸다.
‘단단하네요. 하지만 그리 오래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안이 멈추자, 뒤따라오던 전사들도 속도를 줄였다.
높은 계급으로 보이는 전사가 투덜거렸다.
“후우. 애먹게 하긴. 이제 독 안에 갇힌 쥐 신세군.”
그들의 뒤로 로브를 얼굴까지 푹 눌러쓴 사내 다섯도 뒤따라 도착했다.
그들의 손이 은은한 빛에 감싸여 있었다.
다섯 사내는 마치 한 몸인 듯,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움직였는데, 다섯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 기적은 오래 유지하지 못합니다. 빨리 끝내주시지요.””
“하. 우리만 믿으쇼. 아무리 재빨라도, 혼자서 우리 전부를 당해낼 재간은 없을 테니.”
전사는 품에서 칼을 뽑았다. 그 검 끝이 아까 본 쇠꼬챙이처럼 새까맣다.
전사가 명령을 내렸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우와아아!”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전사들이 달려들었다.
장막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까지 막지는 않는지, 전사들의 몸이 장막을 부드럽게 통과했다.
이안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
뚝뚝.
칼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잔뜩 지친 이안은 땅에 쭈그려 앉았다.
주위에 시체가 너무 많고, 피가 너무 흥건해 앉을 곳도 없었다.
“후우 후우.”
이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상대가 너무 많았고, 수준이 생각보다 더 높았다.
수준 높은 전사들이 여럿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칼을 받아내는 건 언제나 섬뜩한 경험이었다.
다행히 스텔의 적절한 지원 덕에 일격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아니, 좀 다쳤어도 상관없으려나?’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스텔의 치유 마법으로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을 거다.
이안은 뒤를 돌아 스텔을 봤다.
스텔은 주위에 펼쳐진 지독한 참상을 덤덤히 보고 있었다.
곳곳에 널브러져 싸늘하게 식어가는 인간의 시체들.
대부분은 칼에 베인 시체였지만, 개중에는 온몸이 찌부러진 듯한 시체도 있었다.
스텔의 기적에 압사당한 흔적이었다.
좀 익숙해졌다 싶은 이안도 거북한 광경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스텔은 어떤 기분일까.
하지만 그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하다.
“넌 대체 무슨 원한을 샀길래 이런 놈들한테 습격을 받는 거냐.”
“......”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도 아니었고,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이안은 피로했지만, 다시 억지로 일어났다.
눈 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신기해할 정도로 세상 경험이 적은 스텔에게 이런 광경을 계속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정작 본인은 별생각 없어 보이지만.
“자, 빨리 가자.”
“......”
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들 사이에 섞여 있던 사제들은 진작 도망갔고, 장막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안은 스텔을 들어 올려 흑마에 태운 뒤 본인도 그 앞에 올라탔다.
둘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둘이 남겨진 자리에 남겨진 시체들 위에는 하얀 눈이 쌓였고.
어느샌가 날아온 독수리들이 간만의 잔치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