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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96화 (97/222)

96. 초원의 시험(2)

그 뒤로 이안은 이틀을 더 달려 첫 번째 부족에 도착했다.

타모그 부족은 양과 염소를 데리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생활하는 전형적인 유목민들이었다.

낯선 이방인들이 다가오자 아이들이 호기심 얼굴로 지켜보다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꺄르르 웃으며 도망갔다.

여인들은 그런 아이들을 치마 뒤로 감추었다.

부족의 전사들이 달려 나와 이안을 잔뜩 경계했지만, 이안이 대칸의 증표를 보여주니 이내 공손하게 맞아주었다.

이안은 족장과 부족의 전사들이 모두 모인 텐트에 안내되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소. 대칸께서 이번에는 독특한 분들을 전령으로 보내셨군.”

타모그 부족은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는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는데, 몸도 몹시 야위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이안이 고개를 숙여 예를 차리자 족장이 허허 웃었다.

“그대는 대칸의 대리인이오. 나와 동등한 입장이라 할 수 있지. 그러니 그리 낮은 자세로 예를 표하지 않아도 된다오.”

“그렇습니까.”

이안이 다시 고개를 들자, 족장은 따뜻하게 데운 술을 들이켜며 물었다.

“괜찮다면 대칸의 말을 전해주기 전에, 그대들이 어떤 경위로 전령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주겠소? 나이가 먹어, 는 건 호기심뿐이라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성소와 대칸이 내준 시험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족장과 전사들은 크게 놀라워했다.

“샤카자이 부족의 성소라. 그들이 이 초원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내어준 신비한 장소지. 설마 부족원이 아닌 외부인이 그 시험을 치를 수 있을 거라 생각치는 못했소.”

“이제 대칸의 말씀을 전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오.”

한차례 헛기침한 이안은 대칸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했다.

“……그 어떤 이유로든 참석하지 않는 이들은 내 직접 목을 칠 것이다!”

이안이 대칸의 마지막 말을 뱉자, 전사들이 표정에 분노가 깃들었다.

개중에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자들도 있었다.

부드럽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냉랭하게 변하자, 이안은 당황했다.

하지만 족장이 손을 내저어 그런 전사들을 달랬다.

“그만. 대칸의 전령에게 무슨 무례들이냐.”

“하, 하지만 족장님!”

“그리고 저 둘을 너희들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저자의 눈에서는 강한 용력이 느껴지고, 저 여인에게서는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게다가 수십 명분의 피 냄새가 몸에 배어있어. 이미 이곳으로 오는 동안 한차례 싸움을 벌인 모양이오?”

노인 특유의 혜안에 이안은 크게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틀이 지나 피 냄새는 다 흩어졌다 생각했는데, 노인의 감각은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족장님 말씀대로입니다. 이곳에 오는 와중, 알 수 없는 부족에게 한차례 습격을 당했습니다.”

“저런…… 같은 초원의 주민으로서 내가 대신 사과드리겠소. 이번 겨울은 유달리 빨리 찾아왔고, 또 유달리 가혹하오.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으니 가축이 쉽게 죽어버리고,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린다오. 배고픈 처자식을 위해 전사들이 할 행동은 뻔하지.”

족장은 데운 술을 홀짝이며 목을 축였다.

“대칸이 각 부족의 족장들을 상대로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듯하오. 그 역시 불안한 것이오. 안팎으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니, 일부러 도발해 자기 편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젊었을 적에는 그토록 강철 같은 사내가 이리 초조해하다니, 세월이 그를 무디게 한 건가. 아니면 그 아래 생긴 가족들이 사내의 마음을 녹여 버린 건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노인이 입을 열었다.

“어찌 됐든, 얘기 잘 들었소. 대칸께는 내 직접 전령을 보내 기꺼이 이 노구를 이끌고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의사를 밝히겠소.”

“감사합니다.”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족장 덕분에 쓸데없는 싸움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든지 쉬었다 가시오.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 대접해드리겠소.”

“그렇다면 말이 많이 지쳤으니, 하루만 쉬어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조언을 해도 되겠소?”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족장과 이안의 두 눈이 마주쳤다.

족장의 노인은 그 살아온 세월만큼 깊은 지혜를 담고 있었다.

“이대로 다른 부족에 갔다가는 그대들은 결코 환영받지 못할 것이오.”

“……역시 그렇겠습니까?”

그 뒤로 족장은 이안이 전령으로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참 동안을 설명했다.

이안은 족장의 조언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들었다.

***

족장과의 독대가 끝이 나고.

이안과 스텔은 부족에서 가장 좋은 텐트로 안내되었다.

원래는 족장과 가장 뛰어난 전사들이 묶는 곳이었는데, 이안과 스텔을 위해 특별히 하루 동안 비워준 것이다.

이안은 텐트 중앙에 놓인 화로에 몸을 쬐면서, 따뜻한 물로 몸을 닦았다.

이틀간 씻지 못해 이안은 몹시 꾀죄죄했는데, 반대로 스텔은 방금 씻고 나온 것처럼 청결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입고 있는 옷도 방금 세탁한 것처럼 매우 깔끔했다.

어떤 종류의 기적인가 싶어 이안도 자신에게 걸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스텔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남에게는 걸어줄 수 없는 기적인 듯했다. 아니면 그냥 걸어주기 싫거나.

마른 헝겊으로 몸을 대충 닦아낸 이안은 생각했다.

‘전령으로서 하는 일이 생각보다 더 힘드네요. 애초에 알고는 있었지만.’

[족장의 말대로 하면 불필요한 싸움은 피할 수 있을 거예요. 대칸이 내려준 시험에 더 부합할 거고요. 막상 임무를 완수해도, 그 업적이 바톨보다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큰일이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죠.’

단순히 말을 전하고 끝이 아니었다. 대칸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야 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분명 있었다. 바로 습격자들에 대한 문제다.

‘이번 습격자들이랑 함께하던 사제들은 저번 사제들이랑 다른 기적을 썼어요.’

[저번에는 ‘속박의 성광’. 그 전에는 ‘신벌’이었던가요? 나름 이름있는 종파들의 기적들이네요.]

그만큼 스텔은 적이 많고, 다양하다는 뜻이었다.

원래 게임에서 스텔과 초원에서 합류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결국 어찌하든 성도에는 알아서 도착하게 되어 있다.

그 말은 혼자서도 그 모든 적들을 물리쳤다는 뜻일 터.

지금으로선 교단 내부에서도 종파끼리의 경쟁이 치열하고, 그들에게 스텔은 위협적인 경쟁자라는 것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초원의 전사들을 이용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이안은 저번 전투에서, 스텔의 방벽을 뚫어내던 검은 꼬챙이를 기억해냈다.

‘스텔의 벽이 그렇게 쉽게 뚫어낼 만한 게 아닌데…….’

[그 무기에서 주술의 냄새를 맡았어요. 신성과는 극 상성인.]

‘그렇다면 스텔을 죽이기 위해 전사들뿐만 아니라, 마녀랑도 손을 잡았단 거네요. 스텔이 어지간히도 위협적인가봐요.’

이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교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요. 겉으로는 깨끗해 보여도 그 속은 얼마나 추악하고, 또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는지.]

이네스는 교단과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건지, 언제나 교단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안은 문득, 이네스의 동료 중 하나가 위대한 성자라는 걸 기억해냈다.

평소였다면 말하길 꺼릴 주제였지만, 스텔을 동료로 영입한 이후. 이안은 좀 더 과감해지기로 했다.

‘신성이 강한 사람은 전부 이상하다고 하잖아요. 이네스님의 동료 중에도 성직자가 한 명 있지 않았나요? 분명…… 에릭 그린이었던가요?’

잠시 입을 다문 이네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다른 성직자들과는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런가요?’

[굉장히 인간적인 사람이었죠. 또, 사고가 굉장히 유연했어요. 자기가 가진 믿음을 끊임없이 의심했고, 남의 생각을 경청하는 사람이었죠.]

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되나요? 분명 신성력은…….’

[예. 믿음의 강함에 따라 결정되죠.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릇 속에 오래 고인 물이 있다면 갈아줘야 하고, 더 크고 단단한 그릇을 만들고 싶다면 기존의 그릇을 깨부숴야 한다고.]

이안이 되물었다.

‘그릇을 부순다는 건, 기존에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건가요?’

[그럴 지도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제 전문분야가 아니니.]

그 뒤로도 이네스는 여행 중에 함께하며 에릭 그린과 함께한 추억에 대해 설명했다.

마법사 동료인 로잘리아 피에람을 골탕 먹이려고 자는 도중에 찬물을 뿌린다거나, 탐욕스러운 주교의 주머니를 모조리 털어 주민들한테 나눠준다거나, 이교도와 사흘간 설전을 벌인 끝에 상대를 개종시킨 이야기라거나.

추억을 이야기하는 이네스의 목소리에는 즐거움과 진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오라버니와 함께 여정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맞이했던 동료라 추억이 많네요.]

‘그런가요?’

[예. 이곳 초원에서도 함께 와서 같이 돌아다녔는데…… 어쨌든 그리운 사람이에요. 가능하면 다시 만나고 싶을 정도로.]

‘뭐, 그 정도 사람이면 천국에 갔을 테니, 나중에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럴지도요.]

쓴웃음을 지은 이네스의 시선이 자연스레 스텔에게로 돌아갔다. 마음속으로 에릭 그린과 스텔을 비교하는 듯했다.

이안도 멍하니 불을 쳐다보는 스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눈치챈 스텔이 눈동자에 의문을 담았다.

마치 왜 쳐다보냐는 듯.

이안은 턱짓으로 화로를 가리켰다. 신경 쓰지 말고 불구경이나 계속하라는 의미였다.

스텔은 스르르 고개를 돌려 다시 불구경을 했다.

‘말 하나는 잘 듣네요.’

[…… 그러게요.]

피식 웃은 이안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들어 올렸다.

내일도 강행군이었다.

***

다음날 아침.

아침을 든든하게 채운 이안은 지체없이 타모그 부족을 떠났다.

한시라도 시간을 아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더 머물면서 대접받는 것도 미안한 감이 있었다.

‘족장님은 로크를 잡아가라 했지.’

타모그 부족의 족장은 각 부족마다 앓고 있는 골칫거리를 해결해주면, 아무리 대칸의 명령이 마음에 안 들어도 은인으로서 극진히 대접할 것이라 조언했다.

다음으로 향하는 네수드 부족은 혹독한 겨울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얼마 전의 이상 기온으로 이른 눈 폭풍이 불어닥쳐 주위와 고립된 뒤,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초원에 서식하는 괴수 ‘로크’가 그나마 살아남은 가축들을 잡아가는 경우가 많아 큰 고심이라 했다.

‘로크라…… 독수리처럼 생긴 거대한 괴조였지.’

주로 시체를 뜯어먹는 독수리와 달리, 로크는 그 커다란 덩치로 직접 먹이를 사냥한다.

기회가 되면 사람도 잡아먹는다 하니, 주변 유목민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냥하기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조언하던 족장도 이렇게 말했다.

―로크를 사냥하는 건 아주 힘들 것이오. 지상에 있는 가축을 한순간에 확 낚아채서 다시 위로 올라가는데, 그 가죽은 칼이 안 들어갈 정도로 몹시 단단하다 하오. 하지만 상징성이 큰 로크를 사냥한다면, 그대는 전사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그 뒤로도 족장은 자기 경험을 섞어서 로크의 무서움을 설파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저울질을 해보니, 사람들이랑 싸우느니 조금 힘들더라도 괴수랑 싸우는 게 더 낫다는 쪽에 생각이 기울었다.

당장 로크를 사냥할 방법을 생각해냈기도 하고.

이안은 부지런히 말을 몰아 족장이 알려준 로크의 영역까지 달려갔다.

그 사이에도 날씨는 점점 더 추워졌다.

찬바람은 거세지고, 눈발도 굵어지기 시작했다.

계절이 본격적인 겨울에 들어서는 것도 있지만, 네수드 부족의 영역 자체가 지형적으로 더 추운 곳이기도 했다.

한참을 달려 해가 지기 전에 높다란 돌산에 도착했다.

저 돌산 어딘가에 로크의 둥지를 틀고 산다고 하니, 사실상 이미 로크의 영역 한복판이라 볼 수도 있었다.

[하늘에 있는 괴조를 사냥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방법은 생각해두었나요?]

‘당연하죠.’

[참고삼아 말하는 거지만, 활을 쏴서 떨어트리는 건 힘들 거예요.]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이안은 품에서 호크를 소환했다.

호크는 나타나자마자 곧장 이안의 의지대로 높이 날아올랐다.

“핍.”

‘하늘에서 근처를 비행하다가, 거대한 새가 보이면 적당히 잡히는 척하면서 이쪽으로 와.’

화려하게 생긴 호크는 어디서나 이목을 끈다.

게다가 대부분의 괴수들은 호크를 생물의 일종이라 인식했다.

이보다 좋은 미끼는 따로 없을 것이다.

호크가 날아오른 사이.

이안은 흑마와 스텔을 돌산의 그늘에 숨긴 뒤, 홀로 평지로 나와 서 있었다.

‘감각 공유.’

조용히 눈을 감고, 호크의 눈으로 주위를 보니 대초원의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그 시원한 감각을 즐기던 이안은 예상보다 빨리 로크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 거대한 괴조는 막 사냥을 나서려던 차에 환히 빛나는 호크를 발견하고 쫓아온 듯했다.

호크는 명령대로 로크에게 달아나 이안 쪽으로 향했다.

“꽈악!”

약이 오른 괴조는 맹렬히 속도를 높였지만, 빛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두 새는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순식간에 이안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순간, 이안은 호크의 소환을 해제했다.

“꽈악?”

갑자기 사냥감이 사라지자,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로크가 몹시 당황했다.

그러다 이내 분노를 흘렸는데, 그때 마침 눈앞에 평원에 홀로 서 있는 이안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손쉬운 먹이라 생각한 로크는 그대로 하강해 발톱으로 이안을 잡아챘다.

놈의 발에 단단히 잡힌 이안의 몸이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이안은 재빨리 팔을 움직였다.

‘칼도 안 들어갈 정도로 가죽이 단단하다고? 그렇다면…….’

이안은 품에 매달아 놓은 붉은 브로치에 손을 가져다 댔다.

후욱!

환한 빛과 함께 열기가 퍼지고.

펑펑 내리던 눈이 녹아 대초원에는 때아닌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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