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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97화 (98/222)

97. 초원의 시험(3)

가슴 부분이 새까맣게 타 버린 로크가 그대로 바닥에 추락했다.

이안은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적절히 굴러 충격을 줄였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떨어졌기에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은 없었다.

“좋아. 사냥 성공.”

머리와 날개 부분만 남아 버린 로크지만, 일단 부족에게 찾아가서 증명할 정도는 될 것이다.

이안은 로크의 몸을 밧줄로 잘 묶은 뒤, 말 안장에 걸었다.

구운 고기 냄새에 안대를 벗은 스텔이 신기한 듯이 로크의 사체를 구경했다.

‘좋아 이대로 출발하면…… 가만. 이 녀석의 둥지가 이 근처에 있을 텐데.’

로크의 둥지에는 보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고 소화되지 못한 보석이나 패물 따위가 주위에 남는 것이다.

‘굳이 챙기지 않을 이유가 없지. 호크.’

이안은 호크를 다시 하늘로 날려 돌산을 둘러보게 했다.

낮은 고도로 비행하던 호크는 금방 둥지를 찾아냈다.

산의 중턱쯤에 푹 패인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괴조의 둥지가 있었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위치라 이안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돌산은 그 아래보다 더욱 추웠는데, 둥지에 도착하니 또 다른 로크 한 마리가 엎어져 있었다.

이안을 발견한 로크가 괴성을 질렀다.

“과아아악!”

로크는 경계하면서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자세히 살피니 로크의 몸 아래에는 커다란 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행여나 알이 추위에 얼지 않을까 떠나지 못하는 거예요. 다른 로크가 사냥을 나가 먹이를 공급하는 거고요.]

이네스가 둥지의 한편을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뼈들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양이나 염소 따위의 뼈였지만, 개중에는 인간의 두개골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안. 어차피 짝을 잃은 로크는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 죽을 거예요. 편하게 보내주세요.]

‘예. 사람 먹는 괴수를 그냥 남길 수는 없죠.’

이안은 성검을 뽑아 단칼에 휘둘렀다. 로크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목이 떨어졌다.

‘괴수라도 새끼를 위해서는 목숨을 건다는 건가.’

겨울의 초원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가혹하다.

그건 이리 거대하고 흉포한 괴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로크의 시체를 살폈다.

상태가 괜찮아 팔 수 있다면 짭짤하게 벌 수 있겠지만, 너무 커서 가지고 가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시간 내에 시험을 완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뼈 무더기 사이에 딱히 보석도 없는 것 같고. 그냥 가야겠네…….’

주위를 둘러보던 이안의 눈에 로크가 품고 있던 커다란 알이 보였다.

***

타모그 족장이 말한 것보다 네수드 부족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부족에 찾아가니 전사들과 여인들이 눈에 적의마저 담으며 이안을 노려보았는데, 하나같이 야위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안이 대칸의 징표를 내밀자 분위기는 더더욱 험악해졌다.

몇몇은 검집에서 칼을 뽑기까지 했다.

“우리는 무능한 대칸과는 할 말이 없다!”

“제국 놈들과 붙어먹고 자기 부족만 호의호식하는 자에게 대칸이라는 칭호는 과분하다. 돌아가라!”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 저놈을 살려 보내면 안 되겠어.”

전사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하자, 이안이 황급히 안장에 걸려 있던 줄을 끌어당겼다.

“이것 보십시오. 알아보시겠습니까?”

전사들은 서로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는데, 그중 경험 많은 전사가 그 정체를 알아보았다.

“로크! 로크잖아!”

“뭐? 로크라고?”

“저걸 어떻게…….”

경악한 전사들이 검을 다시 집어넣은 채,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죽은 로크를 이리저리 살폈다.

“저, 정말 로크가 맞습니까?”

“이 단단한 깃털. 거대한 부리. 분명 로크가 맞아.”

“부족의 전사들이 수십 년 동안 사냥하지 못한 걸 대체 어떻게…….”

초원의 유목민에게 독수리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전령이다.

그중에서도 몸집이 매우 큰 로크는 하늘에서 보낸 사신 정도로 여겨져, 두려움과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 로크를 사냥한다는 건 곧 하늘의 뜻마저도 거스를 수 있는 전사라는 증거.

전사들이 급격히 공손한 태도로 이안에게 예를 표했다.

“위대한 전사를 몰라뵈었습니다.”

‘족장의 조언이 유효했군.’

적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전사들은 골칫거리였던 로크를 사냥해준 이안의 은혜와 그 이안을 보내준 대칸의 배려에 거듭 감사했다.

네수드 부족의 족장은 이안을 성대히 대접했다.

우유 죽에 양고기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상당히 무리한 것인지, 이안과 족장 외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다고 느꼈을 때 이안은 대칸의 말을 전했다.

“……그 어떤 이유로든 참석하지 않는 이들은 내 직접 목을 칠 것이다!”

전사들의 얼굴이 한차례 꿈틀댔지만, 그 말을 뱉은 게 로크를 잡아온 전사라 그런지 불쾌함을 표하지는 않았다.

네수드 부족이 침음을 흘렸다.

“끄응…… 알겠소. 우선 참석하겠다고 대칸께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소.”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걱정이군. 만약 이번에 대칸이 적절한 방안을 생각해놓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시 예전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소. 우리는 이제 더 잃을 게 없거든.”

옛 삶의 방식이란 제국과 주변 왕국을 습격해 약탈하는 것.

대초원이 제국의 세력권에 통합된 이후로는 엄격히 금지되었던 행위다.

하지만 그건 대칸이 고민할 문제지 이안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지금은 전령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어찌 됐든, 대칸께서도 항상 그대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전령이 할 법만 말을 뱉으며, 이안은 배낭에서 커다란 알을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로크의 알입니다. 그리고 돌산에는 로크의 시체가 하나 더 있습니다. 깔끔한 상태지요. 이 날씨에 썩지는 않았을 거고, 찾아서 팔면 제법 돈이 될 겁니다. 어떻게든 이번 겨울은 넘길 수 있겠지요.”

“가, 감사하오. 이거라면 굶지 않아도 될 거요…….”

어차피 계속 가지고 다니지도 못할 재물이다. 이렇게 베풀고 생색을 내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터.

황송한 표정으로 알을 받아든 족장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빨리 오셨다면 좋았을 텐데…….”

“뭐라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오. 부디 은인의 존함을 알려주시오.”

“이안. 이안입니다.”

“네수드 부족은 이안 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언젠가 불러주시면, 언제든 도우러 가겠소.”

성공적으로 대담을 마친 이안은 텐트로 들어가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이안은 바닥에 머리를 누이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나요?]

‘마을에 들어서고 계속 뭔가 찜찜한 느낌이라서요. 그게 뭐인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

이네스는 이미 무언갈 아는 눈치였지만, 구태여 설명해주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오자, 이안은 이내 포기하고 다른 주제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제가 안 왔으면 이 사람들은 겨울을 나지 못했겠죠? 아니면 약탈에 나섰거나. 우리를 습격한 다른 전사들처럼요.’

[네. 이안은 옳은 일을 한 거예요.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언제나와 같은 이네스의 격려에 이안은 미소지었다.

이네스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어쩌면 이것 역시 이네스의 수많은 재능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내일 또 눈발을 해치고 여정을 떠나려면,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

“그럼, 모쪼록 조심히 가십시오. 라구트 부족의 영역은 저희보다 더 바람이 거세게 부는 지역이오. 우리는 그나마 돌산이 바람을 막아주지만, 그곳에는 초원밖에 없으니 말이오.”

“조언 감사합니다.”

“그대의 여정에 무운이 있기를.”

부족 전사들이 함께 따라나서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한 뒤, 이안과 스텔은 눈발을 해치고 말을 몰았다.

아직 시간이 넉넉했지만, 굳이 꾸물거릴 이유는 없었다.

적당히 흑마의 다리가 풀리고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려는 찰나, 갑자기 스텔이 이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

“…….”

스텔이 안대를 벗으며 이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마치 멈추라는 듯한 시선에 이안이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이안의 도움으로 바닥에 풀쩍 뛰어내린 스텔이 땅 한쪽을 가리켰다.

눈 덮인 대지에서 유난히 불룩 튀어나온 곳이었는데, 마치 무언가 묻혀 있는 것 같았다.

스텔은 말없이 눈더미를 파기 시작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안도 한숨을 내쉬고 손을 거들었다.

“나참. 뭐가 있다고…….”

맨손으로 눈을 푸던 이안이 손을 멈췄다. 스텔도 멈췄다.

얼어붙은 시체들이 그곳에 있었다.

건장한 남성들도 몇 있었지만, 주로 노인이나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서야 이안은 이 부족에서 느끼던 찜찜함을 눈치챘다.

이 부족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었다.

‘얼마 전에 눈 폭풍이 와서 고립되었다고 했었나.’

초원의 겨울은 괴수나 인간에게나 똑같이 가혹하다. 그리고 잔인한 자연은 약자부터 데려가기 마련이다.

눈 폭풍 속에 고립되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딜힘이 없던 약자들부터 죽어 나갔을 터.

스텔은 조용히 눈을 감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이 기계 같은 소녀가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안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네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세상이 점점 더 추워지고 있어요. 악마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에요.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도 더 빨리.]

‘…….네. 더 서둘러야겠어요. 더 노력해야 하고요.’

기온이 점점 내려가는 건 이 세상의 끝이 다가온다는 뚜렷한 증거.

이럴 때마다 이안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오싹함을 느꼈다.

그러곤 자신의 나태함을 꾸짖었다. 실제로 나태하지 않았다 해도.

이안을 격려하려던 이네스는 입술만 달싹였다. 실제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는 사이, 스텔의 기도가 끝이 났는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끝났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스텔은 흑마를 향해 걸어갔다.

이안은 문득, 바닥에 떨어진 안대를 보고 스텔에게 물었다.

“야, 이거 떨어트렸는데?”

뒤로 돌아본 스텔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공허한 눈동자지만 오늘은 그 안에 무언가 담겨 있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마치 상관없다는 듯이.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잠깐 멈칫했지만 이안은 이내 스텔을 올려 흑마 위에 올려주었다.

“이제 말 타다 떨어질 일은 없겠네. 자 그럼, 어서 다음 목적지로…….”

휘이이이! 우우웅!

휘파람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뿔피리 소리.

이안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쳐다보았다.

저 멀리서 구름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전사들이 탄 말이 땅을 밟으며 튀어 오른 눈들이 구름처럼 보인 것이었다.

그 숫자만 무려 백에 달한다. 이안도 부담을 느낄 정도의 숫자다.

게다가 그 선봉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저놈 저거 왜 안 오나 했네.”

쥐처럼 간사하게 생긴 사내. 바톨이 친히 전사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갈때까지 가보자. 이랴!”

흑마에 올라탄 이안은 그대로 녀석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놀란 흑마가 빠르게 달려나가고, 그 뒤를 백에 달하는 전사들이 쫓기 시작했다.

***

고아인 스텔은 어렸을 적부터 수도원에서 길러졌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작은 종파였는데, 나름 지역민들에게는 큰 지지를 받았었다.

“영혼은 신께서 만드신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더럽고 추악한 육체와 결합되어 그 순수성을 잃었지요. 금욕적인 삶을 사십시오. 육체의 쾌락은 영혼을 타락시킵니다. 적게 먹고, 적게 자며, 적게 즐거워하십시오.”

수도원의 사제는 언제나 그렇게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렇게 하면 신께 더 다가갈 수 있다나 뭐라나.

참으로 엄격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스텔에게는 더더욱.

“스텔. 감정을 절제하세요. 감정은 영혼의 일부로, 당신이 무언가를 느낄수록 당신의 영혼은 마모되는 겁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말을 삼가세요 스텔. 입이야말로 영혼의 통로입니다.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세요.”

그들은 스텔을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 집어넣은 뒤, 하루 종일 성서만을 읽게 시켰다.

그러면서 신에 대한 믿음을 그녀의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신은 위대합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바로 그 증거이지요. 그러니 더 경배하십시오. 그게 당신을 구원으로 이르게 할 것입니다.”

스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단어들이 많아서 그러려니 했다.

온종일 좁은 방에 갇혀 있는 것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녀는 갓난아기 때부터 수도원에서 살았고, 바깥에는 나가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또래가 어떻게 사는지를 본적이 없으니 불만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었다.

가끔 독방을 벗어날 때는 사제는 항상 스텔의 눈에 안대를 씌웠다.

하루는 스텔이 질문했다.

세상이 그리 아름다우면, 왜 언제나 안대를 하게 하냐고.

사제는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직 스텔의 믿음이 굳건하지 않아서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가 갑자기 너무 밝은 빛을 봐 버린다면, 그대로 눈이 멀 수도 있으니까요. 언젠가 알맞은 때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스텔은 똑같은 일상을 일평생 동안 반복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강력한 신성을 얻었다.

단순히 그 지역을 넘어, 온 교단에 소문이 퍼질 정도로 강력한 신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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