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00화 (101/222)

100. 성소

유달리 눈발이 심한 날이었다.

깊은 새벽.

대칸과 부족의 전사들, 그리고 이안과 스텔은 은밀하게 저택을 나섰다.

도시의 거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 도시 같은 모습에 괜스레 불쾌함이 몸을 타고 흘렀다.

[기억나네요. 제가 성소에 발을 디뎠던 그 날도, 이렇게 눈보라가 치던 날이었어요.]

‘이네스 님은 왜 성소에 들어가셨는데요?’

[그때는 조금이라도 강해지기 위해 동료들과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거든요. 샤카자이 부족이 초원을 평정할 수 있게 한 성소라니, 흥미가 생겼었어요.]

그 이네스다.

웬만한 시험 따위는 가볍게 깨부수고, 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얻어냈을 터.

정작 그랬던 사실을 샤카자이 부족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악마가 침공하는 혼란한 시기니, 전해지지 않은 걸 수도 있겠지.’

이안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텔은 흩날리는 눈발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번부터 스텔은 쭉 저 상태였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게 사람 속마음이라지만, 스텔은 더 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과는 궤를 달리했다.

스텔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안은 함부로 조언하기가 어려웠다.

‘뭐. 일단 신성만 잘 쓸 수 있으면 괜찮겠지.’

당장 생각할 건 성소에 들어가 성검의 조각을 찾아내는 것.

그 외의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선두에서 말을 몰며 가던 대칸이 친히 이안에게 경고해주었다.

“앞으로 눈발이 거세질 거다. 앞사람을 잃지 말도록. 눈보라 속에서 영원히 헤매고 싶지 않다면.”

“……예?”

대칸의 말을 듣고, 도시를 나서고 보니. 과연 심상치 않은 날씨였다.

원래라면 지평선 끝까지 펼쳐졌을 대초원이건만, 지금은 흩날리는 눈보라 때문에 주위를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잠시 초원을 살피던 대칸이 진지하게 말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의심하지 마라. 의심은 결코 너를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지 않을 테니.”

“예…….”

대칸의 알쏭달쏭한 말을 곱씹으며, 이안은 초원과 눈보라를 바라보았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구석에서 두려움이 슬며시 피어올랐다.

[제국이 초원을 굳이 무력으로 점령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에요. 얻어봤자 크게 가치 있는 땅이 아니지만…… 얻어내기도 힘들죠.]

그렇기에 과거 제국의 황제는 샤카자이의 대칸과 조약을 맺었다.

초원의 부족들은 제국이나 왕국의 변방을 약탈하지 않을 것.

대신 제국은 초원이 상업적으로 발달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것.

그 조약 이후 확실히, 초원의 상업은 발달했다.

초원에서 난 질 좋은 양털과 말가죽이 제국으로 향했고, 제국산 문물들이 초원에 흘러들어왔다.

주머니가 부유해지면서 더는 부족들이 약탈할 이유가 없어졌으며. 상업이 발달하며 자연스레 문학이나 예술 따위가 꽃 피우기 시작했다.

초원의 눈부신 발전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대륙이 추워지기 전까지는.

‘사실, 굶주리는 걸 생각하면 조약을 깨고 약탈을 하는 게 맞을 수도 있어. 하지만 대칸은 잠깐이나마 융성했던 초원이,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는 게 무서운 거야.’

대칸에게는 미련이 남았다.

미련이 남아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대칸의 애매한 태도가 결국 상황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온 것이라 봐도 되었다.

이안은 문득, 한없이 넓어 보였던 대칸의 등에서 긴 그림자를 엿보았다.

어딘가 의기소침해진 모습이었다.

[내색은 안 해도, 아들의 배신이 큰 충격이겠죠.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바람이 거세지며 뼛속까지 한기가 침투하자, 남 걱정할 여유도 없어졌다.

‘더럽게 추워지네.’

눈발이 흩날리니, 시야는 더더욱 좁아져 앞 사람이 탄 말의 엉덩이가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대칸이 경고했던 내용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진짜로 조난 당할 수도 있겠는데.’

전사들은 눈보라 속을 묵묵히 헤쳐나갔다. 이따금 타고 있던 말들이 추위를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면, 직접 걸어서 헤쳐나가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점점 손이나 발의 감각이 사라진다고 느낄 때쯤.

이안은 문득, 일행이 같은 자리를 계속 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눈보라 속에서 같은 곳을 도는 걸 티비에서 본 것 같은데…….’

링반데룽. 혹은 환상방황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어쩌면 지금, 일행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지만 문득. 대칸이 했던 조언이 생각났다.

‘의심하지 말라 했던가.’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한 걸까.

그렇다면 따를 수밖에.

이안은 조용히 앞사람의 뒤를 따랐다. 이안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가혹한 행군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흑마가 어떻게든 버텨주어, 스텔이 눈을 해치고 걸어갈 일은 없었다는 정도.

그렇게 얼마나 걸었으며, 같은 길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시간 감각조차 둔해지던 그때.

어느새 주위가 거짓말처럼 따뜻해졌다.

“…….”

“성소에 온 걸 환영한다.”

“……어?”

피부가 얼어 있어서 주위 풍경이 변했다는 것도 미처 몰랐다.

이안은 부릅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트막한 네 개의 언덕이 작은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고, 호수는 어찌나 투명한지 그 아래가 전부 비춰 보일 정도였다.

이안 일행이 서 있는 곳이 바로 그 언덕 위였다.

언덕의 뒤쪽으로는 여전히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쳤는데, 오직 이 안쪽만이 태풍의 중심처럼 고요했다.

“분명 언덕 같은 곳을 넘어온 기억은 없었는데…….”

“아무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면, 그만큼 특별한 장소가 될 수 있을 리 없겠지.”

이안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아닌, 포근하고 상쾌한 공기가 폐 속을 가득 채웠다.

대칸은 호수를 가리켰다.

“샤카자이의 선조께서는 눈보라를 헤매다 우연히 이 공간을 찾게 되었다. 저 호수에서 몸을 씻었고, 그 뒤로 깨달음을 초원을 평정했지.”

“호숫가 특별한 힘이라도 준 겁니까?”

“글쎄, 전사마다 얻는 건달라. 깨달음과 함께 더 강해지는 전사도 있지만, 마음의 평화를 얻어내는 전사도 있지.”

“제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군요.”

대칸이 고개를 끄덕인 뒤, 이안의 등을 밀어주었다.

“이 앞은 오직 너 혼자서 가야만 한다. 우리는 이 언덕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이안은 언덕을 천천히 내려갔다. 티 없이 맑은 호수에는 물고기 하나 살지 않았다.

[언제봐도 아름다운 호수네요.]

‘느껴지시나요?’

[예. 호수의 한 가운데에 묻혀 있는 것 같아요.]

이안은 조심히 호숫물에 발을 담갔다. 호수는 보이는 것보다 제법 깊었는데, 허벅지까지 호숫물이 올라왔다.

물에 몸을 담그자 포근한 기운과 함께 온몸에 쌓인 피로가 씻겨 내려갔다.

‘더러운 게 씻겨나가는 느낌이에요.’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맑아지는 기분에 이안은 작게 감탄을 흘렸다.

과연 성소라고 불릴 만큼 신비로운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퍼뜩 정신을 차린 이안은 호수의 중앙으로 향했다.

중앙은 이안의 머리까지 잠길 만큼 깊었는데, 그 안쪽으로 잠수해 바닥을 살피니 투박한 검 한 자루가 파묻혀 있었다.

‘찾았다.’

네 번째 성검의 조각의 검신에는 사람의 눈 모양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잠수해 들어간 이안은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정신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보세요. 하늘 높이 펼쳐진 저 별들을.”

“네?”

정신을 차리니 사방이 어두웠다. 이안 자신의 손바닥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웠는데, 바로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보세요. 어서요!”

“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정신이 몽롱했다.

비몽사몽 한 이안이 고개를 들자 하늘에는 별과 달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저리도 하늘은 밝은데, 지금 이안이 서 있는 곳은 이토록 어둡다니.

옆에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할 거 없어요. 빛나는 사람의 옆에 있다고 모두가 그 빛을 나눠 받는 건 아니니까요.”

“네…….”

“결국. 이러나저러나 스스로 빛나야 한다는 거겠죠.”

이네스는 본디 빙빙 돌려 말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번 이네스는 특히 더 그런 듯했다.

이안의 미묘한 반응에 이네스가 미소 지었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그랬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당신 마음의 상처가 보여요. 그 상처는 껍질이 되어 당신을 에워싸고, 스스로가 반짝이지 못하게 막고 있네요. 그리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어요.”

“무슨…….”

“하지만 언젠가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해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때가 조금 기대되네요.”

“그러니까 제가 수수께끼는 별로 안 좋아하니까 알기 쉽게 설명…….”

돌연. 하늘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던 보름달에서 섬광 한 줄기가 이안의 두 눈에 파고들었다.

“끄아악!”

두 눈이 멀어 버릴 만큼, 눈부신 빛이었다.

강렬한 고통과 함께 세상이 점점 빛무리 속에서 흐릿해져 갔다.

***

“끄윽.”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내며, 이안은 눈을 떴다.

다시 호수였다.

통증은 어느새 멎어 있었다.

[이안. 정신이 드시나요?]

‘예. 뭔가 눈에 강렬한 빛이…….’

이안은 뒷말을 흐렸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같은 풍경 같은 장소였지만, 전혀 다르게 보였다.

좀 더 선명해졌다 할까.

[태양 빛을 받아 빛을 내는 달은 거울을 상징하죠.]

“네?”

[다른 사람들을 한번 봐보세요.]

이안은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대칸과 전사들을 쳐다보았다.

분명, 가깝지 않은 거린데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들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물체가 반짝이고 있다는 것.

같은 크기의 원을 여러 개 겹쳐놓은 것 같은 기묘한 형체였다.

[그 사람의 영혼이에요. 마음이라고도 하죠. 저는 이곳에서 특별한 눈을 얻었죠. 이안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거 완전…….’

이안이 감탄을 흘리려던 그때. 머리 쪽에 느껴지는 싸한 기분에 이안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쾅!

무언가 날아와 호수 바닥에 부딪히고. 굉음과 함께 물이 튀어 올랐다.

이안이 다시 눈을 뜨니, 호수의 중앙에 기다란 창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이거 무슨…….”

“하하하! 이곳이 바로 샤카자이의 성소인가! 실로 놀라운 곳이구나!”

갑자기 나타난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대칸이 일어섰다.

“헬렝게…… 어떻게 찾아온 거지? 아니. 물을 필요도 없겠군.”

헬렝게의 족장 옆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바톨.

바톨을 발견한 오템이 격노했다.

“바톨! 감히 배신한 것이냐!”

“먼저 배신한 건 내가 아니오. 형님. 형님께서도 저 이방인을 도와주려 했지않소.”

“윽!”

바톨은 옆구리에 낀 생물체를 쓰다듬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죽은 말을 기워 만든 것 같은 괴물이었다.

바닥을 킁킁거리던 괴물은 바톨의 손길에 기분 좋게 머리를 비볐다.

아무래도 바톨은 괴물의 후각을 이용해 앞서가던 이안을 추격해온 듯했다.

족장이 웃으며 말했다.

“거친 눈보라 속에서 전사의 절반을 잃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모두 값진 승리가 될 것이다.”

사납게 웃은 헬렝게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 여기까지 와서 대화는 무의미하겠지! 가라! 헬렝게의 힘을 보여라!”

“와아아아!”

족장의 말에, 사기가 오른 헬렝게 부족의 전사들이 돌진했다.

대칸도 전사들에게 외쳤다.

“저들에게 왜 샤카자이가 초원의 지배자인지 알려주어라!”

“와아아!”

양측의 전사들이 빠르게 언덕을 넘어 격돌했다.

하지만 이안은 도우러 갈 수 없었다.

쿵!

언덕에서 뛰어오른 누군가가 호수의 한 가운데에 착지했다.

커다란 키. 길다란 팔다리. 특이한 문신. 하지만 전과는 달리 검은색으로 덧칠해진 피부.

“못…… 간다.”

이안의 눈을 조금 크게 떠졌다가, 이내 다시 서늘한 평정을 되찾았다.

기시감의 정체가 눈앞에 있었다.

“오랜만이네.”

이안은 잠시 침을 삼켰다가 힘겹게 내뱉었다.

“나바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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