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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02화 (103/222)

102. 얻은 것, 잃어버린 것

쾅! 콰직!

둘이 격돌할 때마다 굉음이 터지고 천지가 진동했다.

둘은 결코 지치는 법이 없었다.

물러서지도,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마치 신화 속의 용과 호랑이가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듯, 끊임없이 공격할 뿐.

그렇게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전투는 돌연, 너무나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화악!

대검을 든 둘이 교차하며 스쳐 지나갔다.

둘은 그렇게 제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잠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대칸의 가슴에 깊은 상처가 생기며 피가 쏟아져 나왔다.

헬렝게 족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대칸을 보며 후련한 듯, 미소지었다.

“과연 초원의 지배자답구나.”

그 말을 남긴 족장의 거구가 쿵― 하고 초원에 엎어졌다.

승패가 갈렸다.

가쁜 숨을 몰아쉰 대칸이 크게 외쳤다.

“승패가 났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싸움을 그만두어라!”

눈치를 살피던 헬렝게 부족 전사들과 마녀들은 바닥에 엎드려 항복의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중에 한 명, 무릎을 꿇지 않은 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바톨이었다.

바톨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대칸은 그의 아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톨의 몸 위로 긴 그림자가 기울였다.

“아버지…….”

“대칸이라 부르도록.”

“…….”

“바톨. 내 전령을 해코지하려 했으며 부족을 배신하고 헬렝게와 마녀의 편을 든 것을 인정하느냐?”

바톨의 입이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건 짧은 한마디였다.

“……인정합니다.”

“검을 쥐어라 바톨.”

“……!”

지켜보는 모두가 매우 놀랐다. 가족을 사랑하는 대칸이라면 너그럽게 봐줄 것이라 생각했다.

바톨만이 고개를 숙인 채 손을 파르르 떨었다.

대칸이 엄하게 말했다.

“도시로 돌아간다면 오래도록 이어져온 법에 따라 너의 사지를 벤 뒤, 마지막으로 목을 쳐야 한다. 그러니 너에게 전사로서 마지막으로 싸우다 죽는 자비를 내려주겠다.”

“…….”

“어찌하겠느냐 바톨.”

생각을 갈무리하던 바톨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칸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그래.”

오템을 위시한 전사들이 대칸에게 모여들었다.

서로 자기가 바톨의 마지막 상대가 되겠다고 말했다.

대칸이든 초인적인 전사든 결국에는 인간.

그들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베는 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대칸은 단호히 그들을 물렸다.

“배신자의 처단은 군주의 몫. 와라 바톨.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후회 없이 싸워라!”

굳은 표정으로 일어난 바톨이 검을 쥐었다.

말에 올라탄 바톨이 삶의 마지막 돌격을 시작했다.

***

둘 간의 싸움은 굳이 보지 않아도,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이안은 그 대신 호수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미약한 생명 반응이 아직 남아 있었다.

화염에 휘말려 몸의 대부분이 소멸되어 버린 나바혼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숲의 종족 특유의 생명력인지. 아니면 마녀의 주술이 남아 있는 흔적인지.

나바혼은 미약하게나마 숨을 내뱉고 있었다.

“이봐. 정신이 좀 들어?”

“……그래.”

나바혼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고통스러워하던 영혼은 지금은 이제 편안히 안정되어 있었다.

‘살리기에는 너무 늦었나. 아니야. 스텔이라면 어쩌면…….’

이안은 급하게 걸음을 옮겨, 멍하니 서 있는 스텔의 팔목을 잡았다.

“……?”

“너가 살려야 할 사람이 좀 있어.”

“……!”

스텔은 어쩐지 좀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던 이안은 스텔을 잡아끌어 나바혼에게로 왔다.

“치유 기적으로 좀 살려줘.”

스텔은 심각한 나바혼의 상태를 보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이 은은한 빛에 둘러싸였다.

하지만 그 빛은 점점 흐릿해지더니 이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스텔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런. 싸우는 중에 신성을 다 써 버린 건가.”

[신성도 무한하지는 않으니까요.]

한숨을 내쉰 이안이 나바혼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이번에는 진짜 못 살려줄 거 같아.”

나바혼이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영혼을 보았을 때 이안에게 감사해하고 있었다.

하긴. 원수를 갚아주고 고통에서 해방해주었는데 당연히 고마워할 수밖에.

죽어가는 나바혼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이안이,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니라는 어떻게 됐어. 그 너 따라간 음유시인.”

“도망…… 쳤다.”

“그나마 다행이군.”

나바혼의 생명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이안은 착잡한 얼굴로 물었다.

“뭐. 마지막으로 부탁할 거 있어?”

“이걸…… 내 고향에.”

나바혼이 손을 힘겹게 내밀었다. 그 안에는 웬 검은색 씨앗이 있었다.

“고향에 가져다주면…… 내 가족들이 반드시 보답…… 할 거다. 부탁한다.”

“이게 뭔데.”

대답은 없었다.

씨앗을 건네준 나바혼은 숨이 끊기고 말았다.

이안은 씁쓸한 마음으로 그 씨앗을 손에 들었다.

‘나중에 언젠가는 대수림으로 가야 하긴 하니, 어려운 부탁 자체는 아니지만요.’

이안은 씨앗을 요술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문득 주위가 조용해 고개를 드니, 언덕 위에서 죽은 바톨의 몸을 부여잡고 고개를 파묻은 대칸의 모습이 보였다.

또 하나의 싸움이 막을 내렸다.

***

다음날 일찍. 이안은 대칸의 앞으로 불려갔다.

이안은 공손히 예를 표하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허허. 아직 욱씬 거리지만, 적의 강함을 생각하면 이 정도 상처는 운이 좋았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군.”

시답잖은 말을 뱉던 대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번 일로 내 스스로의 부족함을 통감했다. 내 애매함이 헬렝게 부족이 배신하게 만들었고, 사랑하는 아들이 잘못된 선택을 내리게 했지.”

“……바톨의 일은 유감스럽습니다.”

“최후는 전사답게 갔으니, 놈도 억울하지는 않을 터. 어쨌든, 아들을 직접 벤 건, 내 나약함을 끊어낸다는 나름의 의식이었다. 그리고 난 이제 마음을 굳혔다.”

나약함을 끊어낸다.

대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결단을 내린 듯했다.

그게 무엇인지 물어봐 주길 원하는 눈치였기에, 이안은 기꺼이 물어보았다.

“어떤 결단을 내리셨습니까.”

“제국…… 을 약탈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에 과가 없다면, 먼저 멋대로 조약을 어긴다는 건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니. 그렇다고 이대로 간다면 초원의 모두가 굶어 죽거나 얼어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제국의 치세 아래서 화합을 이루던 시대가 끝나고, 왕국들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더군.”

이안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왠지 대칸이 도달한 결론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대륙의 지도를 만지작거리던 대칸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초원의 전사들을 모아 한쪽 편을 들고 같이 싸워줄 거다. 동맹군으로서.”

“……그렇습니까.”

말이 동맹군이지, 사실상 용병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평화롭게 대초원을 다스린다고 칭송받던 대칸의 긍지도 바닥에 떨어질 터.

하지만 대칸은 그런 건 더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대륙에 진짜 전사란 무엇인지 보여주어야겠어.”

초원 부족민들이 전쟁에 끼어들면 어떤 양상이 될까.

특히 대칸 같은 초인이 전쟁에 끼어들면 엄청난 변수가 될 터.

하지만 이안은 더 말을 얹지는 않았다.

그저 나중에 제국을 상대할 때를 위해, 왕국들의 전력이 너무 소모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떠나는 건가?”

“예. 일을 다 봤으니 떠나야지요.”

“호수에서 원하던 걸 얻었나?”

“그 이상을 얻었습니다.”

두 초인의 대결은 이안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검에 대한 이해가 한 단계를 오를 만큼.

대칸이 웃음을 터트렸군.

“지혜로운 전사는 남의 싸움에서 많은 걸 얻어가는 법이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도록. 이안. 너는 이미 훌륭한 사캬자이의 전사니.”

그렇게 말한 대칸은 조금 짓궂게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는 진짜 가족이었으면 좋겠군. 사위.”

“하하. 농담도 참.”

이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자리에서 물러났다.

더 있으면 농담이 농담이 아니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

라이젤의 배웅을 받으며 이안과 스텔은 길을 떠났다.

성도까지의 거리가 길어 생각보다 짐이 많아지게 되었고, 결국. 이안이 흑마를 잡아끌고 스텔만 안장 위에 올라타서 걷기로 했다.

도시를 벗어나고 한참의 시간 동안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도 말을 잘 안 하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서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스텔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고, 이안은 두 초인의 대결을 기억에서 되새기기 바빴다.

‘엄청나게 빠른 싸움이었어요. 찰나에 모든 판단이 이뤄지면서도 놀라운 건, 그게 반사적으로 휘두른 게 아니라 다섯 여섯 수를 생각했던 거예요.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하지만 이안. 생각해보세요. 이안은 그게 어떻게 다섯 수를 내다보고 지른 일격이라는 걸 알아챈 거죠?]

‘…….어?’

이안이 멍하니 입을 벌리자 이네스가 싱긋 웃었다.

[눈 덕분이에요.]

‘눈이요?’

[좋은 눈을 가졌다는 건 검사에게 커다란 축복이에요. 눈은 타고난 재능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에요. 수련하기도 힘들고요. 하지만 이번에 이안은 새로 좋은 눈을 얻었으니,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느껴질 거예요.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껏 배웠던 걸 다시 복습해봐야겠군요.’

[예. 브레이브하트의 24검이나 제가 전수해드린 검술에도 분명.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의도를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네스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걸 찾아내는 과정 자체가 수련의 일환이라는 것처럼.

이안은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각 동작의 의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보인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점점 요령이 붙자 동작들에 숨은 의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마치 숨은그림을 찾거나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어, 꽤 재미있었다.

그리고 의도를 찾을수록 이안의 마음속에 있던 관념이 하나 깨져 버렸다.

검술은 그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기술.

이제껏 그 생각을 바탕으로 수련했고, 그 틀에 맞춰 상대의 검술을 분석했다.

엄밀히 따지면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각 동작에 숨어 있는 의도들을 살펴보면, 그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극히 효율적인 기술에도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나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할까.

이안은 점점 더 사색에 빠져들었다.

그 과정이 거듭될수록 검에 대한 이안의 머릿속 개념이 부서지고, 새로 재창조되었다.

황홀한 감각이었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건 없어요. 기존의 그릇을 깨버리고 새로운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사람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만…… 들리지는 않는 것 같네요.]

그런 제자의 성장을 이네스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사색에 들어가 기존의 관념들을 깨부수는 건, 사실 그리 쉽지 않은 작업이다.

깨부수는 데에 결국 실패하는 이도 있고, 부수고 재창조하는데에 실패해 그나마 가진 것도 모두 잃어버리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이네스 자신도 지나온 길이다.

그리고 이안은 이네스의 제자다.

이네스는 당연히 이안도 자신처럼 더 높은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

이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해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다.

하도 집중해 땀을 비 오듯 흘린 이안의 앞에는 모닥불과 따뜻한 식사가 있었다.

‘스텔이 준비했을 리는…… 당연히 없고.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준비한 건가.’

쓴웃음을 지은 이안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앞을 보았다.

스텔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왠지 심상치 않았고, 그 투명한 마음의 상태도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텔답지 않은 일이었다.

너무 집중해 동료의 상태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가볍게 자책한 이안이 스텔에게 물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스텔은 대답 대신 양손을 내밀었다. 조용히 집중하더니, 그 손에 은은한 빛이 서렸다.

눈앞에 신성한 장벽이 만들어졌다.

“갑자기 신성은 왜…….”

쨍!

장벽이 힘없이 깨져나갔다. 일부러 깨트린 건 아니었다.

그건 분명, 스텔의 의도와 달리 깨진 거였다.

이안은 놀란 얼굴로 스텔을 보았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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