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얻은 것 잃어버린 것(2)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스텔이 누구인가.
‘크레이 사가’ 내에서 독보적인 신성을 자랑하던 캐릭터가 아닌가.
악마의 일격조차 막아내는 그녀의 기적은 실로 최강의 방패라는 말에 어울렸다.
하지만 그녀의 신성은 지금, 고갈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 아니. 전조는 있었을지도 몰라.’
가끔씩 전사들의 공격을 받아 장벽이 깨지거나, 저번처럼 신성이 부족해 치유를 못 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었다.
그때는 그저 여정의 피로함과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전투에 회복이 덜 된 거라 생각했는데…….
이안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언제부터 이런 거야.”
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소리였다.
이안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변수로 인해 이미 여러 가지 변화를 체험했지만, 이런 식의 변화는 예상외였다.
설마하니 스텔이 신성을 잃어버리다니.
[진정하세요 이안. 당황해봤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아요.]
‘아.’
이네스의 목소리는 언제나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이안이 이네스에게 물었다.
‘이런 경우가 흔한가요? 사제가 갑자기 힘을 잃어버리는…….’
[꼭 사제가 아니리도 마법사나 정령사, 심지어 검사에게서도 가끔 보이는 현상이에요.]
이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분명 해결법도 있을 터.
이네스가 말을 이었다.
[다만 특히 사제들에게서 자주 보이기도 하죠.]
‘대체 원인이 뭐죠?’
[마음속에 간직한 믿음이 흔들리는 거예요.]
‘예?’
신성은 다른 그 어떤 신비보다도 믿음에 의존하는 힘이다.
신에 대한 강력한 믿음. 숭배. 무한한 사랑과 존경.
그러한 감정들이 모여 신성이라는 형태로 변화한다.
그런 스텔이 신성을 잃었다는 의미는…….
‘스텔이 신앙을 잃어버렸다는 건가요?’
[글쎄요. 정확히는 저도 알 수 없어요. 어쩌면 의심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요. 의심은 곧 신성의 천적이거든요.]
‘하아. 그럼 어떻게 해야죠.’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아온 이안에게 이런 류의 문제는 영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당황하면 안 돼요. 신성을 잃어서 가장 충격을 받았을 건 바로 스텔이에요. 그녀를 위로하고, 안정시켜 주는 게 우선이에요.]
정론이었다.
우선은 스텔을 위로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어떻게?
잘은 몰라도, 독실한 종교인에게 신에 대한 믿음이란 삶의 모든 것일 터다.
그 모든 걸 잃은 스텔은 지금 어떠한가.
이안은 스텔의 영혼을 들여다봤다.
미동도 없이 그저 고요한 마음이 그곳에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 투명한 색깔이다.
이안은 새로 능력을 얻은 후, 여러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알게 된 건, 사람의 영혼은 가지각색의 빛을 낸다.
하지만 스텔은 그 색이 극단적으로 옅다.
마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 마냥 공허하다.
스텔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절대로.
[우선 스텔에 대해서 좀 알아갈 필요가 있어요. 그간 스텔에 대해서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잖아요? 어디서 살았고, 어떻게 살았고.]
‘…….굳이 신경 안 쓰긴 했죠.’
[믿음을 어떤 식으로 쌓아 올렸는지도 알아야 해요. 각 종파마다 교리가 다르니까요. 그래야 다시 신성을 되찾을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겠죠.]
성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두 달이 남아 있다.
그곳에서는 막강한 적과 어려운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
플레이어들에게는 사천왕이라 불리는 적 중 하나 ‘배교자’. 그 배교자를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상대하려면 스텔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안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 좀 하자.”
모닥불을 쳐다보던 스텔이 고개를 들었다.
이안은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희 종파에 대해서 좀 알아야겠어. 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랑. 그러고 보니 저번에 사제들이랑 싸울 때, 뭔가 사제들이 너한테 열변을 토하던데. 대체 무슨 말을 하던 건 자기랑. 전부.”
두서없는 말에 스텔은 이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안은 인내심을 가지고 스텔의 답을 기다렸다.
다그쳐봤자 답이 나올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스텔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낡은 사제복의 품을 뒤졌다.
그 안에서 나온 건 피 묻은 성서였다.
‘이건…….’
이안과 스텔이 처음 만난 그날. 스텔의 일행 품에 간직되어 있던 성서다.
“이걸 다 읽으라고?”
확실히, 교리를 알고 싶으면 성서를 읽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었다.
하지만 얼굴을 찡그린 이안에게, 스텔은 고개를 저어주었다.
그게 아니라는 듯.
“이걸 다 읽는 게 아니라면 대체 왜…….”
이안은 성서를 쭉 훑었다.
그리고 성서의 마지막 절반쯤은 빈 종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 안에 자기가 얻은 깨달음이나 생각을 적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성서의 주인은 그곳을 일기장으로 활용했다.
이안은 일기장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
클로딘 182년 2월
누군가 수도원 앞에 아이를 버리고 갔다. 너무나 어여쁜 아이였다. 별처럼 반짝이며 사람들을 이끌라는 의미에서 스텔이라 이름 지어줬다.
클로딘 187년 4월
아이에게서 엄청난 재능을 발견했다. 신을 섬길 수 있는 완벽한 육신과 정신이다. 이 아이라면 우리 종파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 그래. 이 아이라면.
클로딘 189년 8월
스텔의 신학 담당 수업을 맡게 되었다. 똑똑한 아이다. 벌써 언어를 뛰어나게 구사한다. 나는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아이가 실망한 표정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클로딘 192년 1월
아이가 점점 커가며, 수도원에 갇혀 사는 것도. 안대를 하고 다니는 것도 답답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아직 분별력이 부족한 아이들한테는 위험할 수도 있다. 계속 칭얼거리는 스텔에게 어쩔 수 없이 매를 들고 말았다.
클로딘 194년 4월
스텔은 이제 입을 열지 않는다. 기쁘다. 드디어 가르침의 결과가 보인다. 아이가 신성을 다루기 시작했다.
클로딘 195년 9월
스텔 님의 신성이 수도원의 대부분의 사제들을 뛰어넘었다. 우리는 존경의 의미를 담아 경어를 쓰기 시작했다.
클로딘 198년 4월
스텔 님은 엄청난 믿음을 지니셨다. 그 소문이 주위 일대에 퍼져나가고 있다. 가끔 무표정하게 지내시는 스텔님을 보면 죄책감이 생긴다. 내가 어린아이에게 못 할 짓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믿음이 부족한 탓이겠지. 스텔 님은 신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인의 재목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클로딘 200년 10월
때가 왔다. 성도에 갈 시간이다. 스텔 님의 기적이라면 우리 교리가 옳았음을 증명할 수 있다. 우리가 당해온 모든 걸, 이제는 되돌려 줄 때가 오는 거다.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신께서 우리의 영혼을 보호해주시길.
일기를 쓴 사제는 굉장히 꼼꼼한 인물이었다.
그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 내려갔다.
일기의 내용은 주로 스텔에 관한 얘기였다.
하지만 어릴 적을 넘기면 굳이 일기를 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매일 똑같은 하루. 일과가 십 년 동안 똑같이 유지되었으니까.
같이 일기를 읽은 이네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건…… 너무하잖아요.]
어린아이에게 가혹한 생활을 강요했다.
먹을 것도, 잠을 자는 시간도, 무언갈 보는 자유조차 빼앗기고, 좁은 방 안에 갇혀 살았다.
이안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노량진의 작은 방 안에 살던 그때를 떠올렸다.
3년. 3년을 사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보다 좁은 장소에서 평생을 살면 어떤 기분일까.
인간 같다기보다는 인형, 혹은 기계에 더 가깝게 느껴졌던 게 이제야 이해되었다.
실제로 그녀는 반쯤은 인형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감정이 없는 존재를 우리는 인간이라 부르지 않으니.
[스텔의 믿음의 근원을 알겠어요.]
‘…….뭐죠.’
[의심은 믿음을 좀먹는 법이에요. 그렇기에 저들은 애초에 의심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은 거예요. 모든 상황을 통제하며, 자신들의 가르침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거죠.]
그릇.
사제들은 그녀의 안에 믿음이라는 그릇을 만들었다.
어떤 의심도 없고, 부정도 없는 아주 단단한 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강한 신성으로 깨지지 않는 장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텅 빈 그릇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지만 그 그릇마저 지금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사제들은 그녀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예찬했어요. 이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실로 신의 증거라 떠들었죠.]
‘하지만 직접 보니 세상이 요지경 요 꼴이었고요?’
함께하던 사제들은 습격자들에게 모두 처참하게 죽었다.
종파는 다르다 해도 같은 신을 모시는 교단의 일원들에게.
가혹한 대초원의 자연을 보았다.
얼어 죽고 굶어 죽은 사람들을 보았다.
어린아이가 살기 위해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녀는 깨달았다.
어쩌면 사제들의 말이 틀린 걸 수도 있다는 걸.
의심이 씨앗이, 처음으로 그녀의 안에서 발아했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예요. 만약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영영 믿음을 잃게 되겠죠.]
‘근데 의심을 극복하는 게 맞을까요?’
[…….예?]
‘어쩌면 스텔의 종파가 틀린 걸 수도 있잖아요. 적어도 제 눈에는 틀린 거로 보이는데요.’
세뇌와 학대로 만들어진 믿음이 정상인 걸까.
어쩌면 이 세계 사람들은 그리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어쨌든. 세상이 얼마나 좋은 건지 보여주면 된다 이거죠?’
[일단 그것 외에는 딱히 생각나지 않네요.]
‘좋아요. 한번 해보죠. 스텔이 신성을 못 쓰면 여러모로 곤란하니까요.’
이안은 솥에 든 대충 끓인 죽을 미련 없이 버렸다.
스텔이 대체 뭐하냐는 듯, 지그시 노려보았다.
시선을 무시한 이안은 재료들을 꺼내 정성껏 요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배부르고 등이 따셔야 살맛이 나고, 세상이 막 예뻐 보이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설마…….]
‘일단 좀 뭐라도 먹여야죠.’
이안은 스텔이 먹던 비스킷을 떠올렸다. 최소한의 소금기와 영양분만 있는 맛 없는 보존식.
그런 걸 평생 먹었으니, 너무 자극적인 맛을 내서는 안 된다.
이안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을 끓였다.
‘어디 한 번 맛을 볼까. 음. 적당히 싱거우면서 조금 단 맛이 도네.’
꽤 괜찮은 요리가 되었다.
그때까지도 구경만 하는 스텔에게 이안이 말했다.
“자. 먹어.”
“……?”
“뭘 당황해. 어차피 네가 믿는 게 진짠지 아닌지 고민하고 있는 거잖아. 이참에 확 어겨봐. 하루 종일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답이 나올 확률이 높지 않겠어?”
이안의 언변에 스텔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스텔은 이안에게서 숟가락을 건네받고 한참을 갈등했다.
보다 못한 이안이 스텔에게 말했다.
“야. 입안에 확인할 게 있으니 아― 해봐.”
“……아.”
이런 쪽으로는 이상하리만치 순진하고, 말을 잘 듣는 스텔이다.
스텔이 조그만 입을 벌리자 이안은 숟가락을 잡은 스텔의 손을 입가로 밀었다.
숟가락이 그녀의 입에 쏙 들어갔다.
“……!”
속았다는 생각에 스텔의 눈가가 조금 올라갔다. 그녀 나름의 화났다는 표시인 것 같았다.
이안은 그 반응을 무시하며 물었다.
“맛은 어때.”
한참 동안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씹기만 하던 스텔이 짧게 답했다.
“……모르겠어.”
“그게 단맛이라는 거다.”
이안은 뿌듯하게 웃었다.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작지만 큰 한 걸음.
지금껏 많은 변수와 변화가 있었지만, 이안은 결국 잘 해결해냈다. 단순히 잘 해결하는 걸 넘어, 예상치 못한 것들을 얻어낸 적도 많다.
이번도 역시 그럴 거라고.
이안은 간절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