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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04화 (105/222)

104. 얻은 것, 읽어 버린 것(3)

샤카자이의 성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칸은 헬렝게의 족장과.

이안은 마녀와.

전사들은 전사들끼리 칼을 맞대던 격전 속에서, 스텔을 찾아온 건 다른 두 종파의 사제들이었다.

한쪽은 머리를 빡빡 밀고, 다른 한쪽은 마치 다섯 쌍둥이라도 된 것마냥 동시에 행동하는 기묘한 이들이었다.

그 중, 민머리 사내가 앞으로 나와 스텔을 향해 소리쳤다.

“이단이여! 거기까지다!”

“……?”

이단이라는 말에 스텔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반응에 민머리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시치미 떼지 마라! 이미 조사는 끝났다! 네년이 따르는 종파가 사실 이전에 이단으로 규정되어 추방당한 곳이란 것을! 잘도 오지 한구석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구나!”

“……이단.”

“끝까지 모른 척할 셈이군. 오냐. 오늘 네 거짓된 믿음이 얼마나 얕은지, 손수 보여주마!”

곧이어 신성의 대결이 펼쳐졌다.

신성이란 곧 믿음의 힘.

더 강하게 신을 숭상하는 자가 누구인지 가릴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이었다.

번개와 장벽이 얽히고, 은은한 빛들이 어우러지는 싸움이었다.

결과적으로, 스텔에게 대결을 청한 열 명의 사제들은 그녀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이미 가슴이 움푹 내려앉아, 죽음을 앞에 둔 민머리 사내가 불러낸 벼락은 분명 강했다.

이전보다도 더.

그 벼락은 끝끝내 스텔의 장벽을 깨트리고 말았다.

“내가 이겼어! 내가 옳았다고…….”

그리 말한 민머리 사내는 기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스텔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말을 타고 1주일간을 서쪽으로 이동한 끝에, 둘은 대초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부터 또 한참을 북쪽으로 이동해야 성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텔에게는 그 사이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이건 무슨 나무야?”

“소나무.”

“왜 겨울에는 푸른 잎이 남아 있어?”

“나도 몰라.”

“왜?”

“…….”

말을 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 말 대부분은 질문이었다.

마치 갓 세상에 나온 어린아이처럼 스텔은 왕성한 호기심으로 이안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성실히 대답해 주세요 이안. 우리에게는 당연한 게, 이 아이에게는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니까요.]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이안이 답변을 못 하면, 또 스텔은 한참을 말없이 사색에 잠겼다. 마치 혼자 답을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이 과정이 신성을 되찾는 데에 도움이 되면 좋으련만.

아직 스텔에게는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더 가다, 땅거미가 질 즈음.

저 멀리 자그마한 마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몇십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시골 마을이었다.

추운 날씨라 거리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는데, 이안은 적당히 소리가 들려오는 건물을 향해 말을 몰았다.

마을의 하나뿐인 주점에 들어서자, 한가롭게 모여 앉아 술을 마시던 주민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런 시골 마을일수록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한 법.

의자에 앉아 접시를 닦던 주인이 시선을 힐끔 들었다.

“굳이 이 오지 마을에 들르는 여행자라니. 드문 일이군. 혹시 초원에서 왔소?”

“예. 성도로 향하는 길입니다.”

“아. 성도에서 열리는 축제를 보러 가는 것이었군!”

성도라는 말에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스텔의 복장을 보아, 사제와 호위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여관 주인의 말에 이안이 의문을 표했다.

“축제요?”

“몰랐소? 10년에 한 번 성도에서는 악마들을 사냥하신 영웅들을 기리며 축제를 열지. 그리고 올해가 영웅들이 제국으로 돌아와, 황위를 이어받은 지 200년이 되는 해라 의미가 깊다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축제라는 게 교단의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를 갖는 듯했다.

당장 스텔을 키운 사제의 일기에도 비장함이 가득했고 말이다.

‘혹시 이 축제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사제들에게 엄청 중요한 것 같은데.’

[글쎄요. 아무래도 제가 죽은 뒤에 생겨난 듯해서…….]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적당한 식탁에 가 앉았다.

그 사이, 흑마를 마구간에 매어놓고 온 주인이 물었다.

“식사랑 방은?”

“제일 좋은 음식으로 넉넉히 주시고, 방은 젤 비싼 곳으로.”

“통이 크신 분들이군.”

코헨에서 감사의 의미로 받은 돈은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반년 정도는 놀고먹어도 문제없을 정도로 말이다.

오랜만의 부유한 손님에 주인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점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이안의 생김새를 경계했지만, 결국 호기심이 이긴 건지 이쪽에 말을 걸어왔다.

“이봐요. 혹시 초원에서 오신 겁니까?”

“그렇죠.”

“요즘 그쪽이 하도 추워서 상인들도 잘 지나지 않는데, 용케 그곳을 뚫고 지나왔네요.”

“더럽게 춥긴 했죠.”

“하하. 초원 부족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몰라.”

이안은 말을 받아주면서도 주인들의 영혼을 살폈다.

특별히 모난 데 없는 둥그런 원.

평범한 크기, 평범한 색깔.

일단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들도 아니었지만.

경계를 내려놓은 이안 앞에 곧 술과 음식이 나왔고. 이안은 기꺼이 술을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기분 좋게 취한 주민 하나가 이안에게 물었다.

“하하하! 이렇게 돈도 많고. 어디 귀족 집이라도 되는 것이오? 아름다운 은색 머리 여인과 검은 머리 남자가 같이 다니니…… 이거 그림이군.”

주민들은 동의하듯, 이안과 스텔에게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확실히. 이안과 스텔은 여러모로 신기한 조합이긴 했다.

[앞으로 성도에 가까워질수록, 이런 시선이 더 심해질 거예요. 교단의 영역에서는 특히 더 신앙심도 깊고 믿음에 민감하니까요.]

저들에게 무언가 나쁜 의도가 있는 게 아니기에 이안은 대충 웃어준 뒤,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술도 얻어먹으셨는데, 얘기나 좀 해주시죠. 주위에 도는 소문이라거나.”

“소문? 아. 마침 따끈따끈한 얘기가 있지. 한번 들어보시겠소?”

술에 취한 주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주정쟁이는 원래도 얘기 하는 걸 좋아하는지, 옆에 있던 주민들이 ‘못 말리는군’ 이라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 축제 때문에 각 지방의 여행자부터, 순례자들까지 성도로 향하고 있단 말이오. 당신들처럼. 게다가 때에 맞춰서 한몫 잡으려고 떠나는 상단 행렬도 아주 많지.”

“그런데요?”

“먹잇감이 많아지면 맹수도 많아지는 법! 언젠가부터 여행자들이 자꾸만 실종되니, 교단에서는 성기사 셋과 병사들을 보내 조사를 했다고 하오.”

성기사는 기사의 무력을 지니면서도, 신성까지 다룰 수 있는 고급 전력이다.

그런 성기사가 셋에 훈련받은 병사까지 딸려 있으면 도적들 나부랭이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대였을 터.

“그런데 그 성기사들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단 것이오!”

“……무언가 일이 생겼군요.”

“그렇소! 교단에서는 곧바로 조사관을 파견했고 곧 그들의 흔적을 발견했다오.”

주정뱅이가 촛불 하나를 들어 자기 얼굴 아래에 가져다 댔다.

일부러 그림자를 이용해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해보려는 듯했다.

하지만 듣고 있던 스텔과 이안이 별 반응이 없자, 살짝 실망한 그가 이어 말했다.

“무언가 거대한 것에 얻어맞은 듯, 형편없이 짓이겨진 상처와 커다란 아가리로 시체를 베어먹은 흔적! 교단에서는 괴수의 소행이라 뭉뚱그려 말했지만, 듣는 모두가 그 정체를 알 수 있었지…… 오우거요!”

‘오우거’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주어 말했지만, 이번에도 둘이 놀라지 않자, 김이 팍 샌 듯.

주민은 흐지부지 이야기를 마쳤다.

“어쨌든. 요즘 오우거가 나온다는 소문으로 저 윗동네가 떠들썩하다오. 한번 성기사를 잃은 교단도 좀 쉬쉬하는 모양이고.”

‘오우거란 말이지…….’

오우거도 분명 크레이 사가 내에 존재하는 괴수다. 그리고 꽤 강력하다.

주로 험난한 바위산 깊숙한 곳에 살아가는 이들은 가끔 뜬금없이 플레이어들 앞에 나타나 지옥을 선사한다.

언제나 방심은 금물! 이라고 개발사가 말하는 듯한 존재였다.

‘하지만 나타날 확률은 엄청나게 낮은데.’

어디까지나 운이 지지리도 없는 이들이 마주치는 게 오우거고, 이안도 해봤자 게임에서는 두 번 정도 마주쳐봤을 뿐이다.

두 번 다 끔찍하게 살해당했지만.

‘게임에서 마주칠 확률이 낮다는 건 아마, 개체 수가 엄청 적다는 것. 혹은 엄청나게 깊은 곳에 산다는 것.’

그런 오우거가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지나다니는 여행객들을 습격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성기사 셋이 모두 죽었다는 것도 미묘하네. 첫 기습에 셋 다 죽은 게 아니라면 하나둘쯤은 살아남았을 법한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단순히 오우거의 소행일 가능성은 낮았다.

이 소문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저 위쪽 지방을 갈 때는 조심하시오. 돈 많은 여행자를 털어먹으려는 도적 떼는 흔하니.”

마지막 술을 쭉 들이켠 주민들이 해산했다.

이제 겨우 해가 진 시간이었지만 농민들은 언제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법이다.

둘이 남게 된 이안은 남은 음식을 해치웠다.

옆에서 아직 음식을 먹는 행위에 거부감이 있는지, 수프나 좀 깨작거리며 먹고만 스텔이 이안을 쳐다봤다.

“왜. 뭐 할 말 있어?”

스텔은 턱짓으로 이안의 잔을 가리켰다.

“술? 마셔보고 싶다고?”

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그녀의 종파에 술은 엄청난 죄악일 터.

그녀 나름으로는 엄청나게 큰 결심을 한 셈이다.

‘얘도 신성을 되찾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는 건가. 하긴, 신성을 잃어서 나보다 초조한 건 얘니까…….’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 선뜻 술잔을 내밀었다.

“뭐. 한잔쯤은 괜찮겠지.”

스텔은 벌꿀주를 꿀꺽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쾅!

곧바로 탁상에 이마를 박았다.

***

“설마 한잔 먹고 기절할 줄이야.”

“처음 마시는 거니, 어쩔 수 없겠죠.”

기절한 스텔을 침대에 눕히고. 이안도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1주간 머릿속으로만 정리하던 깨달음을 이제 몸으로 체득해보고 싶었다.

이안과 이네스는 가볍게 검을 맞댔다가, 이내 동시에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기분 탓인지 이안의 정신 속 공간은 이전보다 좀 더 넓어져 있었다.

“바로 오시겠어요?”

“네. 일단 내려 베기부터.”

“기초부터인가요? 좋네요.”

이안은 쉬지 않고 발을 움직이면서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이전과 같은 동작. 같은 호흡.

하지만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캉!

검이 맞부딪히고 주위에 불티가 튀었다. 막아낸 이네스의 입이 벌어졌다.

“와아…… 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어때요?”

“단순히 기술로써의 동작이 아니라, 의지를 담았군요?”

아리송한 표현이었다.

이안의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에 이네스가 이어 말했다.

“최적의 효율. 최적의 경로로만 검을 내뻗는다면 분명 상대를 베고 찌른다는 목적에는 더 빨리 다다르겠죠. 하지만 각 동작에 의지를 싣고. 그 의지를 끝없이 두드리고 깎아낸다면…….”

이네스의 손에 들린 검에서 환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눈부시게 화려하고, 경건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빛.

대칸과 헬렝게 족장이 피워내던 검광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고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빛이었다.

“이렇게 기적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거죠.”

“……언제봐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빛이네요.”

“아직 이 경지에 이르려면 한참 멀었어요. 이제 의지를 담기 시작한 참이니까요. 하지만 조급해하면 안 돼요. 검에 담긴 의지가 어긋나면, 본인의 마음도 다칠 수 있으니까요.”

“검광이라…….”

이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네스의 검광을 보노라면 황홀한 감각과 함께, 욕심이 생겼다.

자신도 저런 걸 만들어내고 싶다는 검사로서의 순수한 욕심이.

하지만 이안은 안다.

지구인이라는 벽에 막혀, 초급 마법조차 배우지 못한 그가 검광을 배우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걸.

특히 검광은 자신을 믿고, 검을 믿어야 하는데 이안은…….

그때였다.

이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불청객이 온 듯하네요.”

“……예.”

“분명 아까 살폈을 때는, 딱히 악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는데…… 쯧.”

하필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다니.

뭐가 됐든, 일단은 잠에서 깨어야 했다.

이안은 조금 화가 난 채, 눈을 감았다.

***

“정말이지?”

“그래! 아빠 말로는 돈이 엄청 많은 것 같다 했어.”

“그, 그리고 여자애가 엄청 예쁘다 했어.”

“쉿! 조용히 해. 셋 세면 동시에 들어가는 거야? 하나. 둘. 세…….”

빡!

갑자기 열린 문짝과 함께 숫자를 세던 청년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문을 연 이안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셋. 자 이제. 어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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