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06화 (107/222)

106. 페텔(2)

성문의 경비병은 스텔과 이안을 막아섰다.

“멈춰라. 오직 교의 사제님들만이 이 줄을 서지 않고 문을 통과할 수 있다.”

경비병은 잘 무장했고 그 눈빛은 흉흉히 빛나고 있었다.

제법 군기가 들어있는 모습.

페텔이라는 도시의 저력을 엿볼 수 있었다.

‘돈 한두 푼 찔러준다고 들여보내 주지는 않겠어.’

이안은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쓸데없는 인사는 됐다. 다시 말하지만 교의 사제님들만이…….”

그렇게 말하며 경비병은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안의 눈과 머리색 때문에 수상한 자라고 간주하는 듯했다.

이안이 황급히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교단의 사제!”

이안은 스텔에게 손을 가리켰다.

지금껏 이안의 인상이 너무 강해 알아채지 못했는데, 스텔의 모습에 경비병들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름답군.”

겉으로 보이는 스텔은 지극히도 아름다고 신실해 보였다.

마치 성서에 나오는 성녀가 이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신앙심 강한 페텔의 경비병들이 절로 고개를 조아렸다.

“사제님이셨군요. 어린 나이에 대단하십니다.”

“……일단 나이는 성인이지만. 그럼 지나가도 될까요?”

“네. 간단히 신성을 보여주시면 통과시켜 드리겠습니다.”

원래였다면 그냥도 통과시켜주겠지만, 스텔의 옆에 있는 이안의 인상이 너무 강렬하다.

스텔에 대한 호감이 중화될 정도로.

이안은 곤란한 듯이 스텔을 쳐다봤다.

“할 수 있겠어?”

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직 신성이 회복되지 않은 듯하다.

이안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사제님께서 피로한 여정길 동안 신성이 모두 고갈 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좀 곤란하겠는데요?”

“하지만 신성을 확인하는 게 원칙입니다. 가끔 사제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신성을 다루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자 경비병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그 마음에 깃든 건 의심.

이안과 스텔을 사기꾼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스텔도 목에 걸린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가죽 줄에 은색 고리가 매달려 있는 물건으로, 교단의 상징이었다.

스텔은 마치 이것으로 교단의 사제인 걸 증명하겠다는 듯, 경비병의 눈앞에 꾹꾹 들이밀었다.

“이 정도로는 증거가 될 수 있겠습니다.”

엄하게 말한 경비병은 눈매를 좁혔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의심이 아닌 확신.

‘역시 사기꾼들이었어.’

안 그래도 일 때문에 바쁜데, 사기꾼들까지 기성이라니. 경비병은

이참에 제대로 엿을 먹일 계획을 세웠다.

“잠시 이분들을 붙잡고 있어라. 사제님을 데려오겠다.”

“무슨…….”

“사제님들끼리는 종파가 달라도, 서로 알아볼 수 있지 않겠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도시 안으로 달려 들어간 경비병은 이내 사제 한 명을 데려왔다.

앳된 얼굴에 땡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청년이었는데, 아마도 사제 중에서도 말단에 위치한 사람 같았다.

갑자기 불려 나온 게 탐탁지 않은 듯, 사제는 안경을 스윽 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분이 교단의 사제인지 알아봐달라는 건가요?”

“예. 그, 대충 신학적인 대화를 몇 마디 하면 감이 오시지 않습니까.”

“하…….”

귀찮은 듯 머리를 긁적이던 사제가 스텔에게 시선을 보냈다.

‘겉으로는 꽤 그럴듯한데…….’

으레 사기꾼들이란 다 그럴듯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나른하게 하품한 사제가 성서를 펼쳤다.

“에…… 그럼. 사제님이라면 당연히 아실법한 질문을 몇 개 던져보겠습니다. 음. 뭐가 좋으려나. 성서의 11권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으신가요? 그 부분에 대해서 간단히 얘기를 나눠보죠.”

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제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사기꾼이면 11권을 읽었을 리가 없지.’

성서는 총 1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10권은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지만, 11권부터는 허락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당장 문제를 낸 사제도 불과 얼마 전에 11권을 허락받았을 정도다.

스텔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 모습을 보며 사제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어떻게든 지어내려 애쓰는군.’

그러고는 경비병에게 시선을 주었다. 잡아가라는 의미였다.

고개를 끄덕인 경비병이 이안과 스텔에게 다가오던 그때.

스텔이 입을 열었다.

“11권 1장 1절. 가이우스가 황제가 된 시대. 알프레드 그린의 아들, 에릭 그린에게 임하신 신께서 이르시되. 11권 1장 2절. 너에게 나의 힘을 나누어주었으니, 너의 두 손은 나의 아이들의 방패가 돼야 할지어다. 11권 1장. 3절…….”

스텔이 고민하던 부분은 사제가 말한 ‘기억에 남는 구절’ 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는 성서가 1권부터 13권까지 빠짐없이 들어가 있으니까.

사제는 인상 깊었던 부분을 말하라는 뜻에서 한 얘기지만, 스텔은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1권의 내용을 모조리 암송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적인 목소리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얘기를 듣던 사제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잠시 뒤.

사제는 상기된 얼굴로 이안과 스텔을 얼른 도시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이, 이거 실례했습니다. 성서를 모조리 암기하고 계시다니…… 새삼 제 배움이 얕아, 부끄러울 뿐입니다.”

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사제가 이리 호들갑을 떠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스텔은 이안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빨리 가자는 몸짓이었다.

“그럼.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만약 묵을 곳이 없다면, 예배당으로 찾아오십시오! 손님들이 묵을만한 숙소가 따로 있습니다.”

“아뇨. 감사하지만, 이미 정해둔 곳이 있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언젠가 다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스텔 님. 그리고…….”

“이안입니다.”

“예. 이안.”

젊은 사제는 그렇게 이안과 스텔이 사라질 때까지 그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 청년에 아름다운 사제.

이런 독특하고 기묘한 조합을 볼 수 있는 건 축제 기간의 소소한 재미였다.

문득, 사제는 생각했다.

‘스텔? 이안? 둘 다 낯이 익은데…….’

이안이라는 이름 자체는 흔하니 별로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스텔은…….

‘고위 사제님들이 간간이 입에 올리시던 이름인데. 우연인가?’

***

성도로 가는 주요 골목에 세워진 페텔은 원래도 부유하고 번화한 도시였다.

하지만 성도의 축제 기간이 다가오는 지금, 페텔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초원의 도시는 시골로 보일 정도였다.

“……!”

대로를 가득 채운 인파에 스텔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인생에서 사람이 이렇게 모여 있는 건 처음이었다.

이안도 스텔이 이만큼이나 놀라움을 표현한 건 처음이었기에 물었다.

“왜. 이렇게 북적이는 게 신기해?”

“세상에 사람…… 많아.”

미약하게 흔들리는 목소리.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안은 문득, 스텔의 말이 뜻하는 게 조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서 신기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게 신기한 건가?’

[사람 적은 변방에서. 그것도 평생을 수도원에 살았으니까요. 그녀가 상상하던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상상 속에서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었나 보네요.]

연신 놀라움을 느끼는 스텔을 데리고 둘은 부지런히 인파를 헤쳐나갔다.

사람이 워낙 많아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히거나 접촉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스텔은 그게 싫은지, 이안의 소매를 꼭 잡고 그의 바로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이안은 도시를 살피며 생각했다.

‘좀 분위기가 다르네요. 사람들 얼굴도 밝은 편이고요.’

페텔은 특유의 여유로움과 친절함이 있었다.

성도에 가까운 만큼 신실한 신자들이 많고.

일반적인 도시와 달리, 성도에서 파견한 주교가 직접 도시를 다스린다고 한다.

‘여러모로 살만하다는 건가.’

으레 친절함이란 여유로움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페텔의 신실함은 이안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었다.

신실할수록, 이안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에 대해서는 적대적이기 때문.

그걸 이안은 하룻밤 묵을 방을 구하면서 실감했다.

“썩 꺼져! 재수가 없으려니…….”

“남는 방? 저쪽 사제분의 호위라고? 사제님은 안에서 주무실 수 있어도, 그쪽은 마구간에서 자야겠는데?”

“그거에 스무 배 정도 더 내면 생각 정도는 해보지.”

이들은 통상적인 믿음에 다른 도시들보다도 훨씬 민감했다.

몇몇은 이안이 다가오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정도였다.

아무리 무뎌졌다 해도, 이렇게 극심하게 반응하면 이안이라도 열이 받기 마련이다.

“곤란하네…….”

차라리 이들의 생활이 궁핍하면 적당히 돈으로 구슬릴 수 있을 텐데.

안 그래도 여유로운 도시에 심지어 지금은 성수기다.

여관들이 오히려 갑이었다.

결국. 이안과 스텔은 해가 질쯤까지도 방을 구하지 못했다.

곤란해진 이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떻게 하지. 진짜 마구간에서라도 자야 하나. 너는 숙소에서 자고…….”

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는 자기도 싫다는 의미였다.

곤란해진 이안이 정 노숙이라도 해야 하나 하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묵을 곳이 없어 곤란하신 듯하오.”

순간 휙 고개를 돌렸던 이안은 긴장을 풀었다.

말을 건 건 낡은 옷을 입은 나이든 노인이었다.

노인은 궂은 삶을 산 듯, 구부정한 허리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그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하지만 눈. 보석처럼 녹색으로 빛나는 그 눈만큼은 소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노인은 하얀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대충 상황이 짐작되는구려. 아무도 여관에서 받아주지 않은 것이지. 그렇지 않소?”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누구신지……?”

이안의 떨떠름한 반응에 노인이 웃었다.

“허허. 이거 실례했군. 애덤 그린이라하오. 보잘것없는 늙은이지.”

이안은 눈을 집중해 애덤의 영혼을 살폈다.

티 없이 맑은 빛을 발하는 영혼. 특별히 나쁜 뜻으로 접근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애덤이 이어 말했다.

“지나가다가 곤란해 보이길래 말을 걸었다오. 혹시 묵을 곳이 없다면 나를 따라오시오. 나름 수레를 세워둘 곳도 마련되어 있다오.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면 미안하고.”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긴 한데…….”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마땅히 다른 좋은 대안도 없었다.

이안은 애덤의 친절을 기꺼이 받기로 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뿐이니 부담스러워하지 마시오.”

“저희는 여행자입니다만.”

“허허. 같은 대지를 밟고, 같은 하늘을 이고 있으면 그게 이웃이 아니고 뭐겠소? 으쌰.”

애덤은 바닥에 잠시 내려놓은 자루를 다시 짊어졌다.

이안이 들어주겠다 했지만, 애덤은 한사코 거절한 뒤, 지팡이를 짚고 앞서 나갔다.

나이든 노인답지 않게 무척이나 힘찬 발걸음이었다.

이안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모르는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줬던 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 그쵸?’

[…….]

실로 오랜만에 받아보는 대가 없는 호의.

하지만 이네스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안이 다시 물었다.

‘이네스 님?’

[아. 미안해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저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해보고 있었나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이네스가 말을 흐리고, 이안은 더 묻지 않았다.

노인이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여기라오. 누추하지만, 나름 아늑한 맛도 있는 곳이오.”

노인의 뒤에는 예배당처럼 생긴 건물이 있었다.

본래 흰 벽돌에는 금이 가거나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고, 흉하게 넝쿨이 자라난 담장.

노인이 아니었다면 흉가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공간이었다.

누추하다는 표현은 결코 겸손을 떤 게 아니었다.

“……혹시 사제신가요?”

“그렇소. 보시다시피 그닥 인기가 없는 종파라, 돈을 벌기 위해 낮에는 조각품을 만들어 파오.”

호의를 받는 마당에 불평하지는 않았다. 어디든 마구간보다는 낫다는 생각이기도 하고.

스텔 역시 큰 감흥은 없는 듯했다.

“말과 수레는 뒤편에 있는 마당에 매어두시고,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이안은 애덤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사이 완전히 해가 졌고.

램프를 들고 나온 애덤이 그들을 예배당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나마 안쪽은 바깥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어딘가 낡은 분위기는 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관리는 되어 있었다.

‘몰락한 종파와 가난해서 직접 일해야 하는 사제라…… 아마 신성을 잘 못 다루는 모양이네.’

신성을 잘 다뤘다면, 적어도 구부러진 허리를 이끌고 물건을 팔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안과 스텔은 말없이 예배당 안을 구경하며 복도를 걸었다.

한때는 그래도 융성했던 종파인지 그 규모가 제법 컸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창틀에 끼워진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아마 낮에 봤으면 꽤 화려한 광경을 보여주었을 그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공통적으로 한 인물이 새겨져 있었다.

기다랗고 칙칙한 회색 머리에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

어딘가 개구쟁이 소년 같은 느낌을 주는 그 사내는 때로는 기적을 부리고, 때로는 누군가랑 설전을 벌이고, 때로는 군중들에게 돈을 뿌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내는 언제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경건하면서도 어딘가 친숙한 느낌에 스텔과 이안은 눈을 떼지 못했다.

애덤은 그런 둘을 흐뭇하게 쳐다보았고, 이안은 자기도 모르게 물어보았다.

“대체 누구인가요? 엄청 훌륭한 사람 같은데.”

“훌륭한 사람이 맞소. 아마 당신도 알 거요. 에릭 그린, 200년 전에 대륙을 구해낸 위대한 영웅이자, 성자요.”

에릭 그린이라는 이름에 이안이 우뚝 멈춰 섰다.

그 반응을 놀라움이라 해석한 노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내 이름을 듣고 짐작했겠지만, 나는 그분의 후손이오.”

이안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의심하기에는 노인의 미소는 스테인드 글라스 속 사내의 웃음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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