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페텔(5)
예배당의 뒷뜰.
멍하니 한낮의 햇빛을 쐬던 이안이 릭에게 시선을 내렸다.
“그래서? 뭘 하면 되냐.”
수염도 나지 않은 턱을 매만지던 릭이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렇네요. 일단 시험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서 알아봐야죠. 제가 어렵게 구한 정보에 따르면, 교단에서 모집하는 병사의 시험방법은 각 지역별 재량에 따르고 있어요. 그래서 10년 전에 있었던 모집 시험과 32년 전에 있었던 모집 시험에 대해서 좀 알아왔어요.”
릭은 눈매를 좁힌 채, 싸구려 종에 적힌 글자를 읽어내렸다.
‘이런 정보를 언제 또 다 찾아온 거야.’
나이도 어린 게 야무진 구석이 있었다.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집안 사정이 어려우면 아이는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하는 법이니.
종이를 든 릭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32년 전에는 지원자들끼리 간단한 대련을 했네요. 대련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고, 과정을 주의 깊게 보는 것 같아요. 대련에서 이긴 쪽이 도리어 탈락한 경우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네요.”
“10년 전에는?”
“10년 전은 교단의 성기사님과 합을 한번 겨뤘었네요. 공격 한번, 방어 한 번. 통계적으로 창을 가지고 온 지원자가 합격하는 경우가 엄청 높아요. 어쩌면 교단에서는 즉시 전력으로 삼을 만한 사람을 우대할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검보다는 창이 다루기도 쉽고, 전장에서도 더 활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
이안은 조금 놀란 얼굴로 릭을 보았다.
구태여 이안이 도와주지 않아도 릭은 알아서 척척 시험을 분석하고 있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혜가 소년에게 있었다.
‘200년이 흘렀어도 핏줄은 못 속인다 이건가.’
“이안 님. 듣고 있으세요?”
“……물론이지.”
잠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던 릭이 검지를 척 올렸다.
“그리고 이번 시험은 평소랑 달리 아주 특별해요. 엄청난 사람이 오거든요!”
“……누군데?”
“게르하르트 경!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릭이 두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당연히 이안이 알아야 한다는 듯한 태도에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사실 이안도 게르하르트가 누군지 알았다.
‘교단 쪽 성기사였던가. 게임에서는 꽤 강했지.’
이안이 기억할 정도의 캐릭터는 대부분 강하거나 스토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게르하르트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분명 강한 것도 맞고, 스토리에 비중이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게 만든 건 바로 그의 별명이다.
‘개복치하르트.’
마주치는 이벤트마다 툭하면 죽어 버려서 붙은 멸칭.
분명 강하고 재능있는 성기사지만, 게르하르트는 이상할 정도로 쉽사리 목숨을 잃곤 했다.
그런 특징 때문에 게르하르트는 하나의 우스운 밈으로 인터넷에 떠돌았다.
그렇기에 열성적으로 게르하르트의 대단함을 외치는 릭 앞에서, 이안은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20년 안에는 반드시 초인의 영역에 들고, 교단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가 될 거라 칭송받는 분이에요! 그런 분이 페텔에 와서 직접 시험을 봐주신다니. 이만한 영광이 또 어디 있을까요!”
“페텔에 왔구나…… 아무래도 순례자의 길에서 있었던 습격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렇겠죠?”
교단에서 나름 중요한 인물인 게르하르트까지 보냈으니, 이번 사건도 어떻게든 해결될 터.
릭이 말했다.
“어쨌든! 시험까지는 일주일이에요. 평생 검 한번 못 쥐어본 제가 평범한 방법으로는 합격할 수 없겠죠!”
“……냉정하구나.”
“그러니 이안 님께 부탁하는 거예요! 이안 님이라면 뭔가 방법을 알고 있을 것 같거든요!”
이안에 대한 이 근거 없는 믿음은 뭘까.
어쨌든 릭의 판단은 실로 옳았다.
설령 릭의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 해도, 1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적다.
다른 수가 필요했다.
“교단에서는 즉시 도움이 될만한 병사를 원한다 이거지. 어렸을 때부터 이것저것 가르쳐서 병사로 쓰는 줄 알았더니.”
“이상적인 얘기죠. 보통 병사들을 모집한다는 건 그만큼 병사들이 줄었다는 거니, 느긋하게 가르치고 있을 시간이 어딨겠어요. 그렇다고 병사를 너무 많이 둘 수도 없고요.”
이안이 물었다.
“검은 무리고. 창? 창이 무난할 텐데. 혹시 무기에 제한은 없어?”
“네. 자기 재량껏 들고 오면 돼요. 안 그래도 무기를 사기 위해 모아 놓은 돈이 있어요. 갑옷은 무리지만…….”
“그렇단 말이지.”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결정을 내렸다.
“좋아. 무기는 포기다.”
“예?”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이안은 스텔과 함께 예배당을 급히 나섰다.
뒤따라갈 타이밍도 놓친 릭은 멍하니 기다렸다.
그리고 조금 후.
이안이 돌아왔다.
손에는 원형 방패가 하나 들려 있었다.
“자. 들어봐.”
“……네?”
릭은 얼떨결에 방패를 받아들었다.
상반신의 대부분을 가려주는 방패는 참나무를 깎아 만든 물건이었는데, 테두리에 철로 마감되어 있었고 겉은 소가죽이 씌워져 있었다.
이런 쪽은 잘 모르는 릭이 보기에도 상등품이었다.
“무겁지는 않지?”
“예. 견딜 만은 해요.”
“이제부터 네 생명줄이니 소중하게 다뤄.”
“……이렇게 비싼 걸 받을 수는 없어요.”
“숙박비 대용이야. 지금은 성수기니까 넉넉히 내야지.”
마음 같아서는 아티팩트라도 하나 구해다 주고 싶었다.
결국, 실력이 고만고만한 청년들끼리 시험을 본다면 좋은 장비가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은 아티팩트를 구할 여유가 없었다.
‘꽤나 비싼 방패니, 몇 년은 요긴하게 쓰겠죠.’
[이안…….]
이안은 이런 식으로라도 은혜를 갚고 싶었다.
비단 애덤과 릭이 이안에게 보여준 친절뿐만이 아니라 이네스에게 받은 너무나 많은 가르침도 포함해서.
힘들게 사는 에릭 그린의 후손을 보며 이네스는 계속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릭이 시험에 합격하게 도와준다면 이네스도 한 시름 덜 것이다.
얼떨떨하게 방패를 받아든 릭은 침을 꿀꺽 삼킨 뒤,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 주시는 거예요?”
“그래. 속고만 살았나. 이제부터 그걸 연습할 거야.”
“근데 방패만으로도 괜찮을까요?”
“아니. 오히려 좋아.”
방패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병사는 어디서든 대우받는다.
창과 방패는 군대 전술의 기본이니까.
하지만 당연한 얘기지만, 소년이나 젊은 청년들에게 방패는 인기가 없다.
이야기 속에 나와 활약하는 영웅들은 보통 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안이 설명했다.
“경쟁률이 낮은 곳으로 파고들어 합격 확률을 늘리는 거지. 내가 공무원 준비를 할 때도 사용했었던 전략이야. 나는 실패했지만.”
“……공무원?”
게다가 방패는 빠르게 배우기 좋다.
수준급으로 다루려면 다른 무기와 마찬가지로 많은 수련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1인분을 하게 만드는 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알겠냐? 목표는 네가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다른 꼬맹이들이 창이니 검이니 까불고 있을 때, 나는 오직 방패에만 집중했다! 이런 느낌을 팍팍 풍기도록 해.”
“……전 무기도 다뤄보고 싶기는 한데요.”
“지금은 합격하는 게 목표지 네 실력을 늘리는 게 목표가 아니잖아? 검은 합격하고 나서 가르쳐 달라고 해.”
릭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 면접관들이 왜 방패를 들고 있냐고 하면…… 동료를 지켜내고 싶어서라고 대충 대답해. 그럼 좋아 죽을 거다.”
군대에서 좋아하는 건 동료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전우애와 희생정신을 갖춘 병사다.
그런 부분을 잘 보여준다면, 합격률도 올라갈 터.
막연히 바라던 합격이 이제는 진짜로 눈에 보이자, 흥분한 릭이 콧김을 내뿜으며 외쳤다.
“이거라면 진짜 될 수도 있겠어요! 역시! 이안 님께 부탁드리길 잘했어요!”
“그래. 이제 실력을 끌어올리는 일만 남았지. 방패 들어.”
릭은 의욕 가득한 얼굴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이안은 그런 릭의 자세를 세세하게 교정해주었다.
방패는 이안의 전문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좋아. 발 좀 더 벌리고. 아직 체력이 부족하니까 양손으로 방패를 잡아. 허리를 살짝 뒤로 빼주고.”
“이렇게요?”
“좋아. 잘 배우네.”
의외로 릭은 재능이 있는지, 금방 이안이 알려준 자세를 터득했다.
이안은 설명했다.
“방패의 활용법은 여러 가지야. 힘껏 밀쳐서 상대의 머리를 타격하거나, 방패 끝에 날을 달아서 무기로 활용할 수도 있지. 힘만 좀 세다면…… 누구처럼 투척 무기로 쓸 수 있고. 하지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활용이고, 결국 중요한 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지.”
릭이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이어 설명했다.
“방패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첫째. 절대 방패에서 손을 놓지 말 것.”
“두 번째는요?”
“첫 번째를 잊지 말 것.”
“…….”
“방패는 들고만 있어도 1인분이야. 하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지.”
깡!
이안은 미리 구해온 몽둥이로 릭이 든 방패를 느닷없이 후려쳤다.
릭의 몸이 뒤로 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끄악!”
“봐. 벌써 놓쳐 버렸잖아.”
“하지만 손이 엄청 아팠어요…….”
“손이 잘려나가는 한이 있어도 놓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해. 놓치면 바로 죽음이거든. 자. 다시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릭은 다시 방패를 쥐었다.
녹색 눈이 투지로 빛났다.
“방금은 방심해서 그랬어요. 이번에는 조금 다를 거예요.”
“그래?”
이안은 다시 몽둥이를 내리쳤다.
아까와 비슷한 속도.
하지만 그 안에 깃든 힘은 아까보다도 더 강했다.
쾅!
“끄으으윽!”
릭이 연거푸 뒤로 밀려나다, 바닥에 나뒹굴었다.
방패를 잡은 손이 까져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상처를 내고 치유하고를 반복해, 굳은살을 배기게 해야 했다.
‘그래도 제법 배짱이 있네.’
릭은 몽둥이가 방패를 후려치는 그 순간까지 눈을 감거나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점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1주일간 내가 때리면, 너가 막는 걸 반복할 거야. 잘만 배우면 합격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어?”
“……그렇군요. 그나저나 이안 님, 더럽게 힘이 세시네요. 좀만 살살하면 안 될까요?”
“음. 일단 지금 내 목표는 누가 때리든 일격 정도는 막아내게 하는 거거든? 너가 말했던 게르하르트가 공격해도 말이야.”
“터무니없는 목표네요.”
“원래 목표는 크게 잡는 거야.”
이안은 다시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적당히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어찌 릭이 합격해 교단의 병사가 된다면, 언젠가는 힘든 전투에 내몰릴 일도 있을 것이다.
그때 지금의 훈련은 목숨을 지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될 터.
그렇기에 이안은 릭을 혹독히 수련시킬 거다.
이네스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훈련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쾅!
“끄윽!”
릭의 손에서 피가 후두둑 흘러내렸다.
손바닥 가죽이 완전히 찢어진 듯했다.
엉망진창인 손 상태에 이안은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도저히 뭘 들만한 상태가 아니네.”
“……아뇨. 더 할 수 있어요.”
“고집부려도 안 될 텐데.”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릭은 품을 뒤져 은색 고리가 걸린 목걸이를 꺼냈다.
릭이 작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 하긴. 그래도 신성을 조금쯤은 다루는 건가.’
그 에릭 그린의 후손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
하지만 그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뛰어난 신성을 가졌으면, 이렇게 허름하게 살지는 않았을 테니.
하지만 기도를 마친 릭의 손에서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오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파앗!
“후. 말끔하죠?”
릭은 웃으며 양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흉하게 찢어져 있던 피부가 깔끔히 아물었다.
기적 자체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치유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흔치 않았다.
‘스텔만큼은 아니지만…….’
이안은 슬쩍 마당 한 켠에 있는 스텔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릭에게 시선을 옮겼다.
순식간에 상처를 치유하다니, 정말로 뛰어난 기적이었다.
동료로 들이고 싶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