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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12화 (113/222)

112. 천사

침음을 흘리는 이안을 스텔이 올려다보았다.

마치 왜 그러냐고 말하는 듯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따라가자.”

“…….”

앞서가는 병사들과 너무 거리가 벌어지기 전에 이안과 스텔은 부지런히 나아갔다.

그리고 도달하게 된 암석지대의 초입에서 이안은 아차 싶었다.

‘여기서는 수레를 못 타겠는데.’

지형이 안 좋았다.

울퉁불퉁하고,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길에 수레를 끌기에는 쉽지 않았다.

결국, 이안은 수레와 늙은 말을 포기하고, 흑마만 따로 빼 올라탔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이안은 늙은 말의 엉덩이를 툭 첬다.

그러자 소스라치게 놀란 말이 길게 한번 울고는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스텔이 그 뒷모습을 보다 물었다.

“……늙은 말. 왜 버려?”

“데려가고 싶어도 너 말 못 타잖아. 짐 밖에 안 되니까 보내는 거지.”

“짐…….”

짐이라는 단어를 입안에서 한번 굴린 스텔이 또 물었다.

“……늙은 말. 어떻게 돼?”

“글쎄. 모르지. 괴수한테 잡아먹히든지, 아니면 지나가는 행인이 붙잡았을지, 알아서 잘 살 수도 있고. 왜? 걱정돼?”

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겨우 이 정도에 마음을 쓸 정도로 감성이 풍부한 소녀는 아니었다.

더 질문이 없자 이안은 고삐를 쥐었다.

스텔과 이안을 태운 흑마가 천천히 걸었다.

어차피 길이 험해서 뛸 수 없기도 하거니와 굳이 급하게 갈 필요도 없었다.

병사들의 뒤통수가 멀리서나마 보일 정도의 거리면 충분했다.

그렇게 병사들은 반나절을 행군했다.

산에서는 해가 빨리지는 법.

슬슬 어둑해지자, 병사들은 야영 준비를 위해 불을 피웠다.

이안도 멈춰 서서 솥을 꺼냈다.

요즘 스텔은 먹는 것에 맛을 들여, 이안은 다양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특히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이안이 솥에다 우유를 넣은 스튜를 끓이자, 스텔이 당연하다는 듯이 밥그릇을 내밀었다.

“얼마나 줘. 많이?”

“조금.”

여전히 입이 짧은 스텔이었지만, 그래도 이안의 해주는 음식은 군말 없이 깔끔하게 비웠다.

그리고 음식이 마음에 들면 조금이지만 눈이 동그래지는데, 그럴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게 엄마의 마음인가. 언제부터 내가 부모 노릇을 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쓴웃음을 지은 이안은 호크를 소환했다.

아무래도 밤에는 눈에 띄는 호크지만, 최대한 광량을 줄여 이 근처를 감시하게 하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수상한 놈들이 오면 바로 알리는 거야?”

“핍!”

“아.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계속 순찰 돌면 돼.”

“……핍.”

호크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도 묘하게 따갑다.

“……나중에 대낮에 햇빛 쐬어줄 테니까 좀만 힘내줘.”

“핍!”

그제야 호크는 쾌활하게 대답하고, 하늘에 날아올랐다.

이안은 볼을 긁적였다.

‘예전에는 그냥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사춘긴가?’

[좋은 현상이에요. 지능이 점점 발달하고 있다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요…….’

순수하던 호크가 조금 그리웠다.

이안은 눈을 감고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정령을 소환한 채로 깊게 수면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밤 내내 특별히 수상한 낌새가 발견되는 일은 없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별사건 없이 행군이 이어졌다.

‘벌써 순례자의 길 절반은 온 것 같은데.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네.’

사실 습격 같은 건 없는 게 아닐까?

고위 사제들의 영혼이 검게 물든 건 뭐…… 이상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그들의 앞에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이 나타났다.

대협곡이라 불리는 지형답게, 양 절벽 사이가 굉장히 멀었고, 아래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넓은 다리가 양측을 이어주고 있었다.

‘아 기억났다. 떨어지면 무조건 죽는 장소. 게다가 바람도 많이 불어대서 짜증 났지.’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딱히 보상이나 그런 것도 없고, 오직 플레이어를 짜증 나게 만들기 위한 지형.

동시에 이안은 깨달았다.

‘습격한다면 무조건 여기겠구나.’

주위에 바위도 많아 숨기도 좋고, 다리를 건널 때 습격하면 대처하기도 힘들다.

마치 습격하라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장소 같았다.

그 점을 잘 아는지, 선두에 선 게르하르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잔뜩 경계했다.

심지어 미리 다른 기사들과 함께 주위 바위산에 올라 주위를 꼼꼼히 둘러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별다른 낌새를 발견하지는 못한 듯했다.

안심한 게르하르트는 다리를 건너려다, 병사고 청년들이고 할 거 없이 겁에 질렸다는 걸 알아챘다.

게르하르트가 외쳤다.

“두려운 걸 안다 형제들! 바람은 거세고, 낭떠러지의 아래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건너라! 교단에서 직접 만든 이 순례자의 다리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알겠나!”

“예!”

게르하르트는 용기를 주기 위해 앞장서서 다리 위에 올라섰다.

다섯 열로 선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예전에는 밧줄로 만든 다리였는데, 세상 좋아지긴 했네요. 주위는 어땠나요?]

‘호크로 바위산을 빠르게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어요. 어쩌면 너무 과하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혹시나 해 반대편 절벽도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안은 한 시름 놓았다.

어쩌면 별일 없이 성도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 장서 걸어간 게르하르트는 이미 다리의 절반을 지나고 있었는데, 자기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괜스레 제자리에서 뛰었다 착지했다를 반복했다.

“하하! 봐라! 이래도 흔들리지조차 않지 않나!”

“그, 그만해주십시오. 게르하르트 경!”

“하하하! 두려운가? 그대도 함께 뛰어보게!”

게르하르트는 뭐랄까, 좀 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사색이 된 청년들은 게르하르트가 방방 뛰는 걸 보며 벌벌 떨었다.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 걸 머리로는 알아도, 거세게 부는 바람을 맞노라면 기분이 아찔했다.

아직 어린 소년 하나는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옆에 있던 릭이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자, 내 손 잡아.”

“으응. 고마워.”

일어서려던 소년은 문득, 다리가 조금씩 흔들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바람 때문인가?

아니. 그것과는 좀 다른 느낌.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점점 진동이 커지고 있었다.

소년은 울상을 지었다.

“흐, 흐엉. 다리가 무너지려나 봐!”

“뭐?”

소년의 절박한 외침에 방방 뛰던 게르하르트도, 당황한 릭도, 병사들과 사제들도 한순간이나마 멈춰 섰다.

한순간에 찾아온 고요.

잠깐 어리둥절해 있던 게르하르트가 돌연, 몸을 날렸다.

카가각!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간에 올라선 게르하르트가 어느새 갑작스럽게 나타난 존재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각진 얼굴에 동공이 없는 눈.

머리에 쓴 월계관.

나체인 몸은 마치 조각상같이 근육질이었는데, 그 피부가 회색이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 등에 돋아난 두 쌍의 날개.

한 소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천사다…….”

천사.

신의 하인들로, 천국과 지상을 오가며 전령의 역할도 겸한다는 전설상의 존재.

그 천사가 지금 게르하르트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이 무슨…… 정체가 뭐냐! 정녕 천사가 맞단 말이냐!”

상대하는 게르하르트도 혼란스러웠다.

만약 상대가 진짜 천사라면, 검을 맞대는 것도 불경한 일이 아닌가?

놀랍게도, 천사의 입에서 부드러운 미성이 흘러나왔다.

“천국을 위해 너희들의 영혼을 바쳐라.”

“뭣?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직 나는 신께서 내게 내려주신 위업의 절반도 달성하지 못했다! 벌써 나를 부르셨을 리 없다!”

“영혼을 바쳐라.”

“말이 안 통하는군!”

마음을 굳힌 게르하르트의 검이 은은한 빛에 휩싸였다.

신성 기적 ‘신념의 검’.

검광만큼은 아니어도 얕볼 수 없는 위력을 가진 기적이었다.

게르하르트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사와 호각으로 맞붙었다.

그의 실력에 대한 소문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문제가 생겼다면…… 천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두 기의 천사가 연달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나는 여성체였고 하나는 소년의 모습이었는데, 모두 몹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게다가 다리 아래에서는 회색 옷을 입은 괴한들까지 절벽을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위산이 아니라, 아예 다리 아래 협곡에 웅크리고 있었구나. 아니. 그나저나 만들어진 천사가 왜 여기서 나와. 저거 배교자가 다루는 애들인데!’

[이안! 도우러 가야 해요!]

만들어진 천사는 꽤 강한 괴수기도 하거니와 여러모로 성가신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지형이 너무 좋지 않았다.

“여기 가만히 있어. 알겠지?”

“……응.”

스텔을 바위틈에 숨겨놓은 이안은 곧장 태양의 활을 꺼내 상황을 살폈다.

날아오른 천사들이 다리 위를 이리저리 비행했는데, 그중 하나가 순간적으로 하강한 뒤, 소년을 붙잡고 있었다.

“히, 히익!”

“신실하고 깨끗한 영혼. 나와 하나가 되자.”

천사와 시선이 마주치자, 소년의 눈이 탁 풀렸다.

영혼이 빠져나와 천사에게로 흡수되기 시작하던 그때…….

“어림없는 짓이다!”

갑작스럽게 달려든 게르하르트가 검을 휘둘렀다.

싸우던 천사를 급히 떼어놓는 와중에 일격을 허용했는지, 견갑이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소년의 영혼을 탐하려던 천사는 미련 없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두려워 마라 소년들이여! 나는 그대들의 안전을 약속했다! 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성기사와 사제의 목소리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리게 하는 힘.

당황하던 청년들이 정신을 차리고, 병사들도 무기를 쥐고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적들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성기사 둘이 짝지어 천사를 하나씩 상대하고, 게르하르트그가 나머지 천사를 상대했지만 지형이 지형인지라 힘에 부쳤다.

그때쯤 이안이 유효한 사거리까지 도달했다.

활을 쥔 이안은 곧바로 날아다니는 천사에게 화살을 날렸다.

오래 조준하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마치 맞는 게 당연하다는 듯 가볍게 시위를 놓았을 뿐.

그리고 화살은 천사에게 명중했다.

퉁!

화살로 뚫기에는 천사의 몸이 너무 단단했다.

하지만 시선을 끄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일단 릭을 최우선으로 구한다. 나머지는 그 이후에!’

이안은 다음 화살을 준비했다.

목표는 고위 사제.

사제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눈치를 보다, 슬며시 공격형 기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기적이 향하는 곳은 바로 병사들의 뒤통수.

이안은 다시 한번 시위를 놓았다.

쐐액.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은 무방비하게 서 있던 사제의 가슴을 꿰뚫었다.

설마 자기가 공격당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사제는 부릅뜬 눈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화살을 쏜 게 이안이라는 걸 확인한 게르하르트가 고함을 질렀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이럴 줄 알았다! 사제님을 공격하다니!”

“멍청아! 그놈들이 배신자야!”

“뭣?”

한 명이 쓰러지고, 도리어 배신자로 지목당한 사제들은 크게 당황했다.

준비하던 기적을 어디로 사용할까 고민하다 결국, 원래의 목표를 향해 날렸다.

“끄아악!”

“뭐, 뭐야!”

빛으로 된 채찍이 병사들의 등을 강타했다.

얻어맞은 병사들이 끝도 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나갔다.

“무, 무슨!”

게르하르트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 역시 숱한 전장을 구른 성기사.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배신이다! 성기사들은 사제들을 죽여라!”

“그, 그럼 천사들이……!”

“내가 맡겠어!”

“이안 님!”

릭을 빠르게 지나친 이안이 성검을 뽑아 천사에게 휘둘렀다.

검을 들어 성검을 막아내려던 천사는 그대로 뒤로 주륵 밀렸다.

이안의 힘이 예상보다도 더 강했다.

천사가 말했다.

“강한 영혼. 천국을 위해 바쳐라.”

이안은 천사를 무시하며 게르하르트에게 외쳤다.

“야! 어서 내 검에도 기적 걸어!”

“나, 나한테 명령…….”

“빨리 병신아!”

“벼, 병신? 크윽! 어쩔 수 없지. 싸움이 끝나고 문책하겠다!”

성검에 하얀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검광은 아니지만 강한 파괴력을 가진 힘.

이안의 검이 천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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