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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14화 (115/222)

114. 구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게르하르트는 미련 없이 몸을 던졌다.

이안은 중얼거렸다.

“저거 완전히 미친놈 아니야.”

왜 개복치라고 불리는지 대충은 이해했다.

게르하르트는 마음속에 자기만의 정의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의를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안은 일순간 고민했다.

게르하르트는 분명 살리는 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에이씨! 릭! 배낭!”

“예? 예!”

릭이 서둘러 자기 배낭을 건네주었다.

이 배낭은 이안이 싸주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다 꿰고 있었다.

이안은 배낭의 주머니를 열어 손을 쑥 집어넣고, 그 안에서 튼튼한 밧줄을 꺼냈다.

밧줄을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 끝에 단단히 묶은 이안이 외쳤다.

“혹시라도 안 부러지게 단단히 붙잡고 있어?”

“예? 설마…… 이안 님!”

이안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저 아래서 떨어져 가는 불쌍한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게르하르트는 아이들을 양팔로 붙잡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절벽에 틈이나 삐죽 튀어나온 나무들에 발을 걸려고 애쓰고 있었다.

팔에 여유가 있었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발로만 성공하기에는 너무나 무모했다.

벽 틈에 발을 박아 넣으려다 시도하던 게르하르트의 오른쪽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 버렸다.

“끄윽!”

“게르하르트 경!”

“저희를 버리세요! 게르하르트 경이라도 사셔야 해요!”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게르하르트의 행동도 의미는 있었다.

낙하속도를 조금이라도 줄였으니까.

이안은 손에 잡은 밧줄을 허리에 묶은 뒤, 잠깐 숨을 들이켰다.

‘후우. 이 짓거리를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래를 보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겠네요.]

떠오른 건 코헨의 지하 감옥.

그 깎아내리는 절벽을 오를 때의 기억이다.

그때는 위쪽으로 오르는 거라, 아래쪽을 볼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다.

내려가야 하기에 깊디깊은 저 절벽 아래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이안은 짝―하고 뺨을 한 대 쳤다.

그러고는 가파른 벽을 발로 박차 낙하하는 속도를 가속했다.

‘그때의 감각을 되새긴다. 더 어렵겠지만, 신체 능력이 오른 지금이라면 할 수 있어.’

땅을 밟아 가속하되, 각도를 최대한 아래쪽으로 조절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벽에서 너무 멀리 튀어나가 버린다.

이안은 허리를 숙여, 거의 벽에 바짝 붙은 느낌으로 빠르게 달렸다.

그제야 아래쪽에 있던 게르하르트도 누군가 위에서 내려오는 걸 알아챘다,

게르하르트와 두 아이 모두 입을 크게 벌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와, 와아…….”

벽을 거꾸로 타고 내려오다니.

물 위를 사뿐히 걸었다는 옛 성인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이안은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위험해지니,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밧줄 여유가 없어. 곧 있으면 끝이 날 거야.’

애초에 다용도용으로 챙겨준 밧줄이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이안이 내려갈 수 있는 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게르하르트와 이안 사이의 거리도 거의 좁혀졌다는 것.

이안이 외쳤다.

“게으하으트으!”

얼굴에 불어닥치는 엄청난 공기 저항에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게르하르트는 알아들었다.

“우선 아이들을 받아라!”

“으, 으아악!”

게르하르트는 양팔에 든 아이들을 절묘하게 위로 던졌다.

아이들의 몸이 붕 떠올랐지만, 이안은 어렵지 않게 그 둘을 잡아챘다.

그 모습을 확인한 게르하르트가 안심했다.

“후우. 고맙다. 악귀. 덕분에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어.”

그리 말하며 게르하르트는 몸에서 힘을 뺐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아이 둘에다가 자기까지 붙잡고 올라가는 건 말이 안 됐다.

특히나 안 그래도 건장한 게르하르트는 지금,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는 짐작할 만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한 번 더 벽을 박찬 이안은 양다리를 벌린 뒤, 뱀처럼 게르하르트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딱 그 순간 밧줄의 길이가 다했다.

팽팽해진 밧줄이 떨어지는 속도에 대한 반발력으로 한번 퉁― 튀어오른 뒤, 이내 안정을 찾았다.

‘미리 튼튼한 밧줄을 구해와서 다행이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안에게 게르하르트가 믿기 어렵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허벅지 힘만으로 내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건가?”

“보면 모르냐?”

“허. 정말 지옥에서 올라온 전사란 말인가…….”

“너의 수행이 부족한 거겠지.”

이안의 핀잔에 게르하르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옳다. 나는 나 정도면 뛰어난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난 내 무력함을 여실히 체감했다. 수행이 부족해. 한참이나.”

“자기 성찰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올라가자. 다리가 부러진 거 같은데. 올라갈 수 있겠어? 원한다면 업어줄 수 있는데.”

“네놈에게 업힐 수는 없지. 아직 팔은 멀쩡하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한 아이를 등에 업히게 한 뒤, 한쪽 팔만으로 밧줄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서 게르하르트도 따라서 올라왔다.

내려올 때는 순식간이었지만 올라갈 때는 아니었다.

이안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이따금 바람이 세게 불어 몸이 휘청거리거나, 다리의 잔해물이 후두둑 떨어져 급히 피하기도 해야 했다.

하지만 긴 시간 끝에 결국 이안은 절벽 위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줄이 끊어질까, 다 같이 밧줄을 쥐고 있던 소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 돌아오셨다!”

“대체 어떻게…….”

“이안 님!”

릭은 곧바로 이안에게 달려와 기적을 일으켜주었다.

몸속의 피로가 조금은 해소되고, 체력도 조금이나마 차올랐다.

릭은 소년의 특유의 들뜬 눈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대단했어요! 마치 이야기 속 영웅들 같았어요! 선조님의 동료였던 프리츠 님께서 이러셨을까요?”

“저런 검은 머리와 감히 프리츠 대제를 비교하다니. 평소였다면 그분을 모독하지 말라고 꾸짖었겠지만…… 인정하지. 이번엔 빚을 져 버렸다.”

게르하르트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악귀여. 너의 이름을 말해라. 이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긍지와 신앙을 걸고, 목숨을 구해준 이 빚은 갚도록 하겠다.”

“이안이다. 그리고 악귀 아니다.”

“……그 머리 색은 혹시 염색한 건가?”

“그럴 리가 있겠냐?”

게르하르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검은 머리와 눈은 악마의 상징. 놈들은 사악하고 교활하며, 무능한 게 당연할 터인데…….”

게르하르트의 믿음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안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싸움에 함께했고,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 안에 어떤 타산적인 계산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는 게르하르트가 보기에는 참으로 숭고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안의 능력은 어떠한가.

게르하르트는 이안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막연히 자기보다는 뛰어나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

믿음의 충돌에 끙끙거리던 게르하르트가 문득, 답을 찾은 듯.

측은한 얼굴로 이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렇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뭐가.”

“검은 머리만 아니었다면, 분명 대륙을 이끌어갈 뛰어난 인재가 되었을 텐데. 그래도 너무 낙심하지 말고, 부디 그 힘을 옳은 일에 사용하도록 하라. 아. 이참에 교에 입단하도록. 내가 성기사 자리를 추천해주겠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르하르트 딴에는 엄청나게 좋은 제안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혼자서 뿌듯해하고 있었다.

‘강철기사단 들어가는 것도 거절했는데, 성기사가 되겠냐고.’

“하겠냐?”

하지만 이안이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게르하르트는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거절한다고? 혹시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건가?”

“대체 뭔 자신감이야. 그것보다 빨리 다리나 치료해.”

“아. 그렇군.”

게르하르트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벗었다.

다리에는 꺾이거나 부은 곳이 여러 군데였는데, 한눈에 봐도 더럽게 아파 보였다.

하지만 게르하르트는 내색하나 하지 않고 다리를 어루만졌다.

“흠. 우선 뼈를 제대로 맞추고 치유 기적을 사용해야겠군. 이보게들! 도와주게!”

“예!”

살아남은 성기사들이 게르하르트에게 다가왔다.

성기사들은 기본적으로 야전 치료에 능통하다.

우득 하는 뼈 맞추는 소리와 함께 수술이 시작됐다.

아플 만도 하건만.

입을 꾹 다문 게르하르트는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뼈를 가지런히 맞추고, 부목을 댄 뒤, 치유 기적을 외자 그걸로 수술은 끝이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게르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아프냐?”

“이 정도는 믿음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왜 습격을 했는지부터 알아봐야겠지. 사로잡은 포로가 있나?”

“예!”

빠릿빠릿하게 대답한 성기사가 밧줄에 묶인 한 사내를 데려왔다.

혹시라도 자결하는 걸 막기 위해,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게르하르트는 지극히 차가운 얼굴로 포로의 자갈을 빼냈다.

“반갑다. 나는 게르하르트라 한다. 이름은?”

“반갑소. 게르하르트 경의 위명은 익히 들어왔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어 유감이지만, 영광이오.”

의외로 포로는 호의적으로 대답했다. 평소에도 게르하르트을 동경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다.

“나를 좋아해 주니 고맙군. 하지만 더더욱 이해가 안 되는데? 대체 왜 우리를 죽이려 했던 건가?”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저희는 절대 나쁜 뜻으로 한 게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저는 게르하르트 경과 이 소년들이 부럽습니다! 천국을 위한 제물이 될 영광이라니!”

게르하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천국을 위한 제물이라니.

분명, 천사들도 그 비슷한 말을 내뱉곤 했었다.

“자세히 설명해라! 어서!”

“흐. 흐흐. 모두가 천국에 이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그 위업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뜬구름 잡는 소리는 하지 마라. 내 검이 그대의 살을 헤집는 걸 원치 않는다면.”

“푸하하!”

포로가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게르하르트 경의 믿음은, 고작 검에 찔리는 것이 무서워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르하르트는 깨달았다.

그 어떤 고문에도 이 포로는 그가 원하는 것들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게르하르트도 그랬을 거니까.

애초에 말단으로 보이는 자다.

강제로 입을 열게 한다고 해도 별 쓸모는 없겠지.

게르하르트는 검을 휘둘러 포로의 목을 깔끔히 베었다.

그 길은 조금 다르나, 같은 신앙을 믿는 자에 대한 예우였다.

“이번 습격에는 고위 사제들도 연관되어 있었다. 어두운 음모의 냄새가 난다. 대체 성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지…….”

한숨을 푹 내쉰 게르하르트가 말했다.

“아무래도 한시라도 빨리 성도로 가 이 소식을 전해야겠다. 신경 쓰이는 계시가 있기도 하고…….”

“계시?”

이안이 되묻자 게르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외부인에게는 말해줄 수 없다. 이해해다오.”

“아. 그래.”

“성도까지 함께하지 않겠나? 병력을 많이 잃어, 네가 함께해주면 든든할 텐데.”

“뭐. 거절할…….”

선뜻 대답하려던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잊고 있던 게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다.

‘스텔. 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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