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변하는 것
이안은 건너편 절벽을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스텔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말 하나는 잘 들어요.’
이안은 스텔에게 가만히 숨어 있으라고 했었다.
소란이 끝난 지금도 스텔은 혼자서 바위틈에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왜 그러나? 저쪽에 뭐라도 있나?”
이안이 갑자기 절벽을 살피자, 의아하게 생각한 게르하르트가 물었다.
영리한 릭은 이안이 왜 그런지 이미 알아챈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스텔 님을…….”
이안은 미련이 남은 눈으로 잠시 릭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히고는 말했다.
“저 쪽에 동료를 두고 왔다. 데리러 가야겠어.”
“흠…… 그러면 여기서 갈라져야겠군. 우리는 조금이라도 빨리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해야 한다.”
“그래.”
“저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과거에 사용하던 다리가 아직 남아 있을 거다. 그걸 이용하면 될 거야.”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은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알았어. 다리가 멀쩡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보긴 해야지.”
“성도로 오면 나를 찾아라. 편의를 봐주겠다.”
“이안 님! 부디 몸조심하셔야 해요!”
“그래. 너도 건강히 지내고.”
“에이. 뭘 작별하는 사람처럼 말씀하세요. 섭섭하게. 성도에서 다시 볼 거잖아요?”
이안은 피식 웃으며 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래. 그때 가서 보자.”
“스텔 님도 함께요!”
인사를 남긴 게르하르트와 나머지 인원들은 다시 순례자의 길을 따라 행군을 시작했다.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은 몸을 돌렸다.
“자. 그럼 우선 스텔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게 문제네요. 문제는 그 방법인데…….”
호크가 편지라도 옮길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아직 거기까지 정령술에 숙달되지 않았기에 너무나 아쉬웠다.
[그래도 일단 호크밖에는 없어요. 영리한 아이니까, 아마 이안의 의도를 잘 전달해줄 거예요.]
“예. 일단 해봐야죠.”
루크는 손을 벌려 그 위에 호크를 소환했다.
반짝이는 매가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불렀냐는 듯.
“핍?”
“내가 지정한 곳으로 가서 스텔 좀 데려와 봐. 할 수 있겠지?”
“핍!”
호크가 하늘로 날아올라 쏜살같이 스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안은 호크와 감각을 공유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스텔은 아까 이안이 숨어 있으라고 한 곳에 양 무릎을 팔로 감싸고,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거나 미동조차 하지 않는 걸 보면, 만약 이안이 찾으러 오지 않으면 영원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이안을 신뢰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이 없는 거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핍!”
호크가 스텔의 눈앞에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멍하니 있던 스텔이 고개를 들었다.
호크는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계속 어딘가로 날아가는 시늉을 했다.
“핍!”
“……?”
“핍핍!”
“…….”
“피입! 핍핍!”
“…….”
스텔이 고개만 갸웃거리자 열심히 몸짓하던 호크도 답답하지, 날개로 자기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답답하기는 이안도 매한가지.
그 뒤로 스텔이 일어난 건, 호크가 부리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고 나서였다.
스텔은 호크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고, 이내 절벽에 다다랐다.
이안은 팔을 흔들며 외쳤다.
“여기야! 보여?”
스텔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안은 호크를 통해 시야를 보고 있었기에 그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쪽에! 다리가! 있어! 거기까지! 걸어와!”
“…….”
이번에도 스텔은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괜찮으려나.”
길 안내는 호크가 있으니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이 험준한 바위산에서 위험한 건 오우거뿐만은 아니다.
언제 머리 위로 굴러떨어질지 모르는 돌무더기. 포악한 괴수. 그리고 늑대 같은 비교적 평범한 맹수들까지.
특히 지금 스텔은 신성력도 사용하지 못해, 그저 연약한 소녀일 뿐이다.
맹수들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일 터.
새삼 스텔의 안위에 걱정이 들었다.
‘게임에서 스텔은 가만히 내버려 둬도 성도까지는 알아서 찾아오는 캐릭터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신성을 못 쓰니…….’
[걱정이 많이 되나 보네요.]
‘같이 다니던 사람이 죽으면 꿈자리가 사나울 테니까요. 예비 동료를 잃는 건 엄청 큰일이기도 하고요.’
퉁명스럽게 말하는 이안에게 이네스는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이안이 물었다.
‘……왜요.’
[그러고 보니 아직 말 안 했었죠. 아이들과 게르하르트를 구하기 위해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린 것, 멋있었어요.]
‘해볼 만하니까 한 거고. 게르하르트를 살리면 나중에 도움이 되니까 한 거예요.’
[흠…… 글쎄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이네스가 말했다.
[언제나 명심하세요. 이안은 이안이 생각하기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
[그리고, 자신을 믿는 사람만이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거예요. 자신을 믿는다는 건, 곧. 자신을 사랑한다는 거겠죠.]
자신을 믿는 다라…….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우선 스텔을 무사히 이곳에 오게끔 돕는 게 우선이에요.’
[아. 또 말 돌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이안은 절벽 건너편을 보았다.
호크와 함께 멍하니 걷고 있는 스텔은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서, 불안할 따름이었다.
***
스텔은 호크를 따라 걸었다.
언제 맹수가 튀어나올까 걱정하는 이안과 달리, 정작 스텔은 본인의 위험에 대해 큰 자각이 없었다.
그저 주위 풍경을 눈에 담으며, 부지런히 걸었다.
이안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핍!”
앞서가던 호크는 연신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스텔이 따라오는지를 확인했다.
정령은 결국 정령사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법.
그런 호크의 움직임에서 스텔은 이안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반짝거려.’
스텔은 호크의 꽁지깃을 보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걷다가 옆을 보았다.
문득 이안이 어딨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
없었다.
다시 바위산에 있는 길을 들어선 터라, 반대편 절벽이 보이지 않았다.
스텔은 잠시 멈춰 서서 애꿎은 바위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 너머에 있을 이안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 마냥.
“핍!”
“…….”
한참이나 이어진 바위와의 눈 씨름은 호크가 짜증을 냈기에, 어쩔 수 없이 무승부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스텔은 호크가 더 화를 내기 전에 다시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긴 그림자가 앞에 드리웠다.
아무래도 이안이 말한 다리라는 게 예상보다 먼 곳에 있던 모양이었다.
날개를 퍼덕이던 호크도 바닥에 내려선 뒤. 부리로 바닥을 콕콕 찔렀다.
그러고는 날개를 열심히 퍼덕이며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마치 이성에게 구애하는 새가 춤을 추는 것 같이 보여 귀여울 따름이었지만.
“…….”
“핍!”
마치 알아들었냐는 듯, 호크가 울자 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계속 목적지까지 걸어가자는 뜻 같았다.
밤에 산행하는 건 분명 위험한 일이지만, 스텔 혼자서 야영하는 것도 그만큼 위험했다.
애초에 스텔은 야영을 준비할 줄도 몰랐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호크가 다시 날개를 퍼덕이며 앞서나갔다.
스텔도 일어나려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에 멈칫했다.
물집이 잡힌 것 같았다.
“…….”
원래 이안은 체력이 약한 스텔을 배려해서 걷는 거리를 조절하거나 말을 구해주거나 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스텔은 그 배려를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스텔은 험한 산을 헤쳐나가느라 발바닥이 욱신거려오는 걸 느꼈지만, 평생을 고통에 무감각해지도록 훈련받아온 그녀다.
스텔은 말없이 걸음을 옮겨 호크를 뒤따랐다.
“…….”
조용히 걷던 스텔은 문득 생각했다.
이안과 함께 여정을 시작하고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스텔은 괜스레 옆을 힐끔거렸다.
언제나 이안은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함께 걸어주곤 했다.
그리 생각하니 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할까.
허전함?
한참을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스텔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종류의 고민이었다.
스텔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밝은 보름달이 그곳에 떠 있었다.
예쁘다거나 멋있다거나 하는 감상은 스텔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엄격히 감정을 절제 당해온 스텔에게 세상은 언제나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부스럭.
“핍!”
근처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호크가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짐승일까?
머릿속에 떠오른 건 순례자의 길에 오르기 전. 방생했던 늙은 말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스텔은 그 늙은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말이 냄새를 맡고 쫓아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들은 영리하니까.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건 흉포한 늑대였다.
“크르르르.”
“…….”
“핍!”
당연한 일이었다.
늙은 말이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는 늑대가 튀어나오는 게 더 현실적이었으니까.
당황한 호크는 그대로 늑대에게 달려들어 그 눈에 밝은 빛을 흩뿌렸다.
“캥!”
고통스럽게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던 늑대가 주둥이를 하늘로 향하고 길게 울었다.
“아우우우!”
동료를 부르는 하울링.
호크가 다급하게 울었다.
“핍! 핍핍!”
빨리 뛰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스텔이 뛰기 시작했다.
어느새 양옆 바위산 위에 늑대의 형체가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 숫자만 무려 10마리가 넘었다.
늑대들은 함께 달리며 점점 스텔을 궁지로 몰았다.
“하아. 하아.”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점점 숨이 차기 시작했다.
원래도 그리 빠르지 않던 스텔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 틈을 포착한 늑대들은 스텔을 공격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호크의 몸이 환히 빛났다.
단순히 눈부신 것만은 아니었다.
호크에게서는 꽤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짐승을 움츠러들게 하기에는 충분한 열기였다.
하지만 스텔은 안다.
저 열기를 뿜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신력이 필요한지.
더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과 함께 스텔은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잡고 팔을 앞으로 뻗었다.
“아…….”
신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달리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행히도 바위로 울퉁불퉁한 지형이 끝이 나고, 다시 반대편 절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크를 다루는 데 많은 신경을 쏟아야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달려가던 스텔은 주위를 둘러봐 다리를 찾았다.
밧줄로 나무판자를 묶어둔 낡고 허름해 보이는 다리가 두 절벽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다.
문제는 긴 시간 동안 보수도 하지 않고 방치된 다리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느냐다.
평소였다면 스텔은 걱정 없이 발을 디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스텔은 이내, 이게 바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두려움이라는 건 대부분 죽음과 관련이 있다.
세상에 미련이 남는 사람만이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의 종파에서 늘 가르친다.
현세에서의 삶은 하찮으며 잠시 거쳐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라고.
육신은 추악한 것이고, 영혼은 고결한 것이니.
일생을 육신이 영혼을 타락시키지 않기 위해 금욕적으로 살다, 죽으면 천국으로 올라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왜인지 지금, 그녀는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이 하찮은 현세를 포기하기가 꺼려졌다.
그녀는 자기 마음속의 중요한 무언가가, 완전히 변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크르르.”
“컹컹!”
늑대들이 다가와 스텔을 포위하듯이 점점 다가왔다.
뒤에는 절벽과 낡은 다리뿐.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스텔은 줄에 연결되어있는 낡아빠진 나무판자에 걸음을 옮겼다.
끼익.
오래된 나무가 삐그덕거렸다.
절벽의 저 아래 펼쳐진 어둠은 마치 거대한 괴물이 아가리를 벌린 것처럼 보여, 사람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스텔은 다시 한번 걸음을 옮겼다.
만약 살아 돌아간다면.
어떻게든 살아 돌아간다면.
오늘의 작은 사건이, 그녀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살아 돌아간다면…….
스텔이 세 번째 걸음을 옮겼다.
빠각!
그녀가 밟은 나무판자가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몸이 그대로 아래로 향해 쑥 빠진다. 괴물의 아가리 같은 심연을 향해.
“……아!”
스텔은 반사적으로 손을 위로 뻗었다.
어떻게든 다리의 줄을 잡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손은 간발의 차이로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온몸에 느껴지는 부유감.
마치 새가 되기라도 한 듯 느껴지는 기묘한 해방감.
스텔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마도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자유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스텔의 몸은 저 나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세이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텔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다시 눈을 떴다.
어느새 다가온 이안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온몸에 흥건한 땀은 이안이 얼마나 힘들게 이곳까지 당도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땀방울들은 환한 달빛을 반사해 반짝이고 있었다.
스텔은 그 모습을 넋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휴. 하마터면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무리 너라도 이럴 때는 좀 쫄리긴 하나 보네. 눈이 그렇게 휘둥그레져서는.”
아마도 스텔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텔은 그저 멍하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많이 놀랐나? 대답도 안 하네. 괜찮아?”
“…….”
그 물음에 스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