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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16화 (117/222)

116. 성도

이안은 멍하니 있는 스텔의 팔을 붙잡아 끌어올렸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스텔의 몸은 저 나락으로 빨려들어 갔을 거다.

그렇게 되면 이안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안은 널빤지 위에 주저앉은 스텔에게 물었다.

“후우. 많이 놀랐냐?”

“…….”

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씨익 웃었다.

“나밖에 없지?”

잠깐 멈칫하던 스텔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는데, 역시나 반응이 재미없다.

“크르르.”

스텔을 쫓던 늑대들은 이안의 등장에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동물 특유의 무언가를 느낀 듯.

찔끔한 표정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안은 거의 스텔을 업다시피 해서 절벽 건너편으로 되돌아갔다.

다행히 오래된 다리는 더 끊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후우.”

이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호크를 조종하며 정신력을 쏟아붓느라 어찌나 고생했던지.

몸 안에 진이 쏙 빠진 느낌이다.

그나마도 스텔이 살아남은 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교단 신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께서 도와주셨다고밖에.

‘뭐. 진짜로 그럴 수도 있겠죠. 신이 실존하는 세계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텔은 신실한 신자니까.’

오우거에 대한 미신으로 시작한 사건이 구르고 굴러 여기까지 오다니.

참 얄궂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우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단 세력이고. 근데 진짜 오우거가 나왔고. 덕분에 스텔은 죽을 뻔하고. 우연이 이렇게 이어질 수 있는 건가요.’

[글쎄요. 저는 우연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라서요. 오우거가 하필 그때 나타난 것도, 소문이 힘 때문일 수도 있겠죠.]

믿음이 힘을 발휘하는 세계다.

거짓된 소문이라도, 여러 사람이 믿으면 힘을 얻게 된다.

겨울잠을 자던 오우거가 튀어나온 것도 그런 믿음의 영향일 수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불을 땠기 때문에 연기가 생긴 게 아니라, 그 연기가 도리어 불을 일으킨 셈.

그렇기 때문에 교단에서는 언제나 소문과 정보에 민감하다.

언제 어떤 소문이, 치명적인 사건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천사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에요. 원래는 성도에서 배교자랑 싸울 때 나타나는 적인데…….’

그런 적이 순례자의 길에 등장했다.

이건 예상외의 사건.

게다가 그 천사를 목격한 게르하르트가 성도에 소식을 전할 것이다.

다른 이라면 거짓말로 치부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난 성기사의 말은 그만큼의 무게와 권위가 있다.

성도에서도 허투루 얘기를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적이 외부 세력이 아니라, 성도 내부에 이미 침투해 있다는 건데…….’

당장 이번 습격도 고위 사제들이 연루되어 있지 않은가.

페텔의 주교까지 연관되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의 마수는 교단의 깊숙한 곳까지 뻗어 있는 듯했다.

그런 상태에서 게르하르트가 그들의 계획에 대한 실마리를 들고 성도로 온다면, 게르하르트와 목격자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어쩌면 계획을 앞당길 수도 있고.’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성도에 갈 필요가 있다.

이안이 없는 사이, 배교자가 성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려 교단이 힘을 크게 잃는다면 큰일이었다.

다만…….

‘오늘은 좀 쉬고.’

힘을 너무 많이 써 버렸다.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한계에 다다라, 몸이 노곤한 느낌이었다.

당장 스텔도 힘들어 보이는 것 같고.

힐끔 스텔을 보자, 살짝 절뚝이며 걷는 걸 알아챘다.

본인은 티를 안 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안의 눈에는 전부 보였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그리고 발 줘봐.”

“……?”

이해를 못 해 의아해하는 스텔을 앉힌 뒤, 억지로 다리를 잡아당겨 부츠를 벗겼다.

당황했는지 스텔의 눈이 동그래졌다.

“물집이 잡혔다가, 터졌다가, 또 잡힌 건가? 대체 이런 발로 어떻게 걷고 있던 거야.”

이안은 주머니를 뒤져 연고 약을 꺼냈다.

코헨에서 떠날 때 선물 받은 약 중 하나였다.

이안은 수통 속 물을 발 위에 부은 뒤, 연고를 덜어내 스텔의 상처에 발라주었다.

아마 꽤 아플 테지만 스텔은 살짝 눈가를 떨 뿐,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 면이 조금 불쌍하기도 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게 평범한 건데.

조금 호들갑을 떠는 것 같기는 해도, 붕대까지 꼼꼼하게 감아준 이안이 말했다.

“조심히 걸어. 안 그러면 상처 덧난다.”

스텔은 멍하니 이안을 쳐다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의 위기까지 겪었건만,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태평한 건지…….’

이안은 습관적으로 눈을 집중해 스텔의 영혼을 보았다.

사실 스텔은 다른 누구보다 그 감정을 읽어내기 힘든 사람이었다.

공허하고 흐릿한 스텔의 영혼은 아무것도 비춰주질 않았다.

하지만 그 공허하던 영혼에도 무언가가 채워지고 있었다.

분명 변화하고 있다.

너무 느릿하고 미세해 이안은 기분 탓으로 여겼지만 말이다,

***

순례자의 길이 끝을 보였다.

높게 솟은 산 중턱을 깎아 만든 웅장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성도.

산속을 방황하던 최초의 선지자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교단의 성지.

다른 무엇보다 도시의 중심에 우뚝 솟은 첨탑이 눈에 띄었다.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은 첨탑은 대체 무슨 재질로 지어졌는지, 태양 빛을 흠뻑 머금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교단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화려한지, 순례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 감격에 겨워 눈물을 쏟아낼 정도였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과 사람을 들여 지어진 건물이죠. 그 돈과 인력이면 훨씬 훌륭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을 텐데요. 참으로 위대하셔라.]

이네스는 뾰족한 말로 교단을 비꼬았다.

그녀의 눈에는 성도도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이네스님도 성도에 와보셨죠?’

[예. 계시가 저를 가리켰다는 이유로, 코르디스에서 이곳까지 반쯤 끌려가듯 와야 했죠. 그러고는 다짜고짜 성검을 쥐여주면서 악마를 토벌하라는데…… 어휴.]

그때가 생각나는지 이네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시를 받은 그날, 아직 어렸던 이네스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뭐. 영웅이니 뭐니 띄워주면서, 엄청 잘 대접해주긴 했지만요. 하지만 그 기대하는 눈빛은 정말이지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망치고 싶었나요?’

[예. 하지만 도망쳐도 의미 없는 일이죠. 게다가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고요.]

그게 바로 이네스의 강함이다.

만약 어떻게든 도망칠 방법이 있었다면, 아마 이안은 무조건 도망쳤을 것이다.

조금 더 걷자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상업 거리가 나타났다.

하나 같이 교단의 상징인 원 두 개를 가게 간판에 새겨넣은 상점들은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향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자! 우리 신실한 형제자매 여러분들! 저희 여관은 매출의 절반을 교단에 기부하는 곳입니다! 마음껏 찾아와주시고, 믿음 가득한 하루 되십시오!”

[절반을 기부해도 엄청나게 남을 정도로 숙박비를 비싸게 받지만 말이에요.]

“교단의 사제님께서 직접 인정하신 이 은고리! 오직 이곳에서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말단 사제 하나가 괜찮다고 말한 거겠죠.]

“우리의 위대하신 영웅이자 성자. 에릭 그린께서도 즐겨 먹었다는 이 별가루 비스킷 한번 맛보지 않으시렵니까!”

[에릭은 단 맛 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굳이 따지면 고기류를 더 좋아했죠.]

‘아, 예.’

이네스는 상인들의 호객에 일일이 딴지를 걸었다.

아마도 성도에 얽힌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이렇게 뾰족한 이네스는 참으로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상인에게 돈을 건넸다.

“별가루 비스킷 한 봉지만 주세요.”

“예입! 여기 있습니다!”

상인은 프로였다.

이안의 외모를 보고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묘하게 만족하며, 이안은 비스킷을 스텔의 손에 쥐여주었다.

“……?”

“먹고 싶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잖아.”

“…….”

고개를 끄덕인 스텔은 오물오물 비스킷을 씹었다.

이안도 비스킷을 한 웅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말이 별가루지, 그냥 설탕 팍팍 뿌린 과자잖아.’

하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좋았다.

이렇게 주위를 구경하며 인파 속에 스며들다 보면, 골치 아픈 일들은 다 머릿속에서 떠나간다.

이안은 이제는 완연히 찾아온 봄기운을 실컷 즐기며, 성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게임에서는 성도에 가까워질수록 스텔을 노리는 사람이 늘어났어. 우리에게는 성도가 가장 위험할 수도 있어.’

지금 이 많은 인파에서도 수많은 시선이 느껴진다.

대부분은 이안을 쳐다보았지만, 개중에는 스텔을 주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습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다.

물론, 대낮에 성도의 코앞에 펼쳐진 상업지구에서 습격하는 건 미친 짓이다.

하지만 이안은 더는 상식이니 그런 것들에 안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곳.

그게 바로 이 망겜이니까.

“게르하르트가 찾아오라 했으니까, 일단 성도로 가보자. 그래도 은혜를 내팽개칠 인물은 아니니, 요청하면 우리를 보호해줄 거야.”

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계속 걸으면서 물었다.

“그래. 처음 목적대로 성도에 도착했는데, 이제 뭐 할 거야. 너도 뭐 생각이 있을 거 아니야.”

스텔을 길러주던 사제들이 어떻게든 그녀를 이곳에 보낸 건 짐작할 만하다.

강한 신성을 지닌 그녀를 보여줘, 종파의 위신과 입지를 올리려던 것일 터.

하지만 지금 그녀는 모든 신성을 잃었다.

종파의 위신이고 뭐고,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상태다.

한참을 고민하던 스텔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어.”

“그래?”

“너는?”

스텔이 고개를 들어 이안과 눈을 맞췄다.

성도에서 뭘 할 거냐는 질문에 이안은 간단히 답했다.

“나는 내가 할 일 해야지. 언제나 그랬듯이.”

“나도…….”

“응?”

무언가 말하려던 스텔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드문 일이다.

스텔이 말을 안 하는 경우는 많지만, 중간에 말을 하다 고민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스텔이 마음속으로 혼란스러워한다 여긴 이안이 말했다.

“그래. 뭐. 천천히 고민하자. 다른 사제들과 대화하다가 뭔가 깨달을 수도 있는 거고.”

“응…….”

성도 주위에 펼쳐진 상업지구와 주거촌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다 빠져나가는 데에 한참이 걸릴 정도였다.

그렇게 거리를 벗어나자, 비로소 흔히들 성도 하면 떠올리는 곳에 도달했다.

덕 높고 신앙 깊은 사제들이 머무르는 장소이자 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

화려한 건물들이 여러 개 모여, 마치 하나의 궁전처럼 어우러지는 이곳이 바로 성도.

대륙에 구석구석까지 퍼진 교단의 총본산이다.

그 압도적인 자태에 감탄하기에 앞서, 일단 이안은 신분을 증명해야 했다.

주위를 순찰하는 성기사 둘이 이안을 노려보며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를 것 같은 태세였기 때문이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아니. 일단 잡아 들이겠다. 신분 확인은 나중에 천천히 하면 되겠지.”

사람이 몰리는 축제 기간. 바짝 신경이 곤두선 성기사들이 다짜고짜 이안을 잡으려고 했다.

걷는 모습만 봐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과연 성도. 순찰 돌리는 성기사들이 이 정도 수준인가.’

이대로면 싸움이 날 수 있다.

이기든 지든, 무조건 이안이 손해 보는 싸움이다.

이안은 황급히 말했다.

“게르하르트 경을 불러주세요. 이안이 왔다고 하면 알 겁니다.”

“게르하르트 경을……?”

성기사가 미심쩍은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은 듯, 비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게르하르트 경의 이름을 대, 게르하르트 경의 얼굴을 가까이 보려는 속셈이구나. 너 같은 놈이 한둘인 줄 아나?”

“뭐?”

단단히 오해를 산 것 같다.

이안이 더 말을 하려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내 이름이 들리는군!”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는지, 게르하르트가 이쪽에 다가왔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성기사는 게르하르트가 오자,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

“이놈들이 감히 게르하르트 경의 이름을 대고, 이곳에 들어오려 했기에 구속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내 이름을?”

게르하르트가 시선을 돌려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은 눈짓을 하며, 빨리 성기사에게 해명하라고 지시를 보냈다.

하지만 게르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놈이다. 이렇게 불길하게 생긴 놈이 나와 무슨 연이 있겠는가.”

“역시.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게르하르트의 말에 성기사가 흉흉하게 눈을 빛내며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황당해진 이안은 중얼거렸다.

“이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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