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17화 (118/222)

117. 성도(2)

“하하! 농담이야, 농담.”

사람 좋게 웃어 보인 게르하르트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 손님들이 맞다. 그만 가보도록.”

“아. 그렇습니까. 몰라뵈었습니다.”

“아뇨…….”

정중하게 사죄한 성기사들은 다시 순찰을 위해 사라졌다.

이안은 게르하르트를 흘겨보았다.

“재밌냐?”

“재미없었나? 팍팍한 인생을 산 이들은 유머 감각이 떨어지는 법이지. 이해한다.”

또다시 게르하르트는 허허 웃으며 이안의 속을 박박 긁어댔다.

더 얘기해봤자 자기만 손해라는 걸 깨달은 이안은 화제를 돌렸다.

“릭이랑, 애들은?”

“잘 보호하고 있다. 겸사겸사 이것저것 가르치고 있고. 릭은 특히 뛰어나더군. 꼭 신성이 아니라도, 무예에도 재능이 있다. 성기사가 될 재목이다.”

“본인은 나중에 대륙을 여행하고 싶어 하던데. 에릭 그린이 그랬던 것처럼.”

“성기사가 되면 원치 않아도 대륙을 떠돌아다녀야 한다. 그리고 에릭 그린이 아니라, 에릭 그린께서다. 존칭을 붙이도록.”

게르하르트의 말에 이안은 아차 했다.

그동안 에릭 그린을 이네스의 이야기를 통해 접해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말한 것.

이곳은 교단의 중심, 성도다.

교단의 성자를 함부로 말했다가는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알 수 없다.

“실수했군.”

“딱히. 신앙이 없는 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은 안 좋게 생각할 수 있으니, 주의하도록.”

“……내가 내 종교에 대해 말했던가?”

게르하르트가 이안을 흘끗 쳐다보았다.

“일정 경지에 오른 사제나 성기사들은 대강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저 자매님에게서는 강한 신성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게르하르트는 스텔을 가리켰다.

“하지만 왜인지 지금은 신성을 사용할 수 없는 듯하군. 맞나?”

“……귀신 같네. 전부 정답이야.”

“뭐. 자랑은 아니다만 내가 유달리 눈썰미가 좋은 편이긴 하다.”

그렇게 말하는 게르하르트의 어깨가 조금 올라갔다.

어지간히 뿌듯한 모양이었다.

뭔가 칭찬을 바라는 눈빛이었지만 이안은 깔끔히 무시해 버렸다.

“그것보다 부탁이 있어.”

“흠흠. 말해보도록. 전부 들어주겠다.”

“나랑 얘를 좀 보호해줘.”

게르하르트가 스텔을 흘끗 쳐다보더니, 이안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얘를 처음 만난 건 초원에서였는데, 그때 습격이 여러 번 있었어. 사제들과 초원 부족이 결탁했었지. 그때 얘 동료들은 모두 죽었어.”

이안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잦은 습격과 도시 내에서 이따금 느껴지는 시선.

신심이 깊은 게르하르트에게 교단의 악행을 고발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고민했지만, 게르하르트는 스스로의 정의를 간직한 인물이다.

얘기해도 괜찮을 거라는 계산이 섰다.

한참을 듣던 게르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떤 사정인지 알겠다.”

“성직자들이 왜 공격해오는지, 그 이유가 짐작이 가기는 하지만. 전문가인 너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

잠깐 기억을 되짚던 게르하르트가 말했다.

“한때 남부 변방에서 소문이 돌았었다. 어린 나이에 아주 강력한 기적을 부리는 소녀가 있다는 소문이었지.”

성녀의 재목. 스텔.

소문에서는 그렇게 칭했었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성도에서 직접 사제단을 보냈지.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증언했다. 소문은 결코 과장이 아니며, 오히려 축소된 것에 가깝다고.”

그만큼 스텔에게는 재능이 넘쳤다. 다른 이들을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10년마다 교단에서는 대회의를 거쳐 교리에 대한 해석을 일부 수정하거나 삭제, 첨언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그 논쟁의 진위를 판별하는 방법은…….”

“신성을 확인하는 거군.”

“그렇다.”

신성이란 신에 대한 믿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척도.

그런 신성을 겨루는 건 무식하고 단순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대회의는 중요한 행사다. 논쟁에서 패한 종파가 이단으로 몰리기도 하고, 이단으로 몰렸던 종파가 다시 편입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단으로 몰린 이들은…… 많은 피를 흘리게 되지.”

교단의 어두운 부분.

설명하는 게르하르트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이제 알겠나? 왜 그들이 스텔 양을 노리는지.”

“스텔이 너무나 강력한 신성을 가졌으니까. 스텔의 종파가 정식 교리에 편입되면, 자기들 종파가 이단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거고.”

“그래.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뭐?”

게르하르트가 말을 흐렸다. 이안이 곧바로 되물었지만, 그는 모른 체했다.

“어쨌든! 교단은 그런 식으로 긴 시간을 살아남아 왔네. 이제 와서 고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한 게르하르트가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걱정 마라! 너와 스텔 양은 내가 책임지고 보호하도록 하겠다!”

“……스텔은 신성을 잃었는데, 여전히 위험하려나.”

“잃었던 믿음은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약해진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겠지. 네가 꼭 옆에 붙어서 스텔 양을 지켜주도록.”

게르하르트가 힘을 써준다면 일단은 안심이다.

이안은 주제를 돌렸다.

“순례자의 길에서 있었던 일들은 보고했냐? 그건 단순한 종파 싸움은 아닌 것 같았는데…….”

“아…… 일단 교황 성하께 직접 보고드렸다. 성하께서도 심각하게 여기시고는 즉각 조사반을 꾸렸다.”

“하긴. 천사까지 만들어내는 거 보면 만만치 않은 놈들인데.”

게르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교단의 탈을 쓰고 있지만, 명백히 이교도다. 강한 기사와 순수한 소년의 영혼을 노리다니. 악마를 숭배하는 놈들과 같은 수법이야. 문제는…… 그 뿌리가 교단의 어디까지 박혀 있는지가 문제다.”

페텔의 고위 사제들까지 가담한 일이다.

페텔은 성도를 지키는 방패와 같은 도시.

그 도시에서 일하는 사제들은 교단에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뿐이다.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말했다.

“대비하는 게 좋을 거야.”

“뭐?”

“나라면, 이번 축제 때 일을 터뜨릴 거거든.”

딱히 근거는 없다.

그저 게임에서 그랬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짐작할 뿐.

다만. 원래 게임에서는 순례자의 길에서처럼 직접적인 증거가 드러난 일은 없었다.

이단의 실마리를 잡은 지금, 교단에서는 대비할 여유가 주어졌다.

“일리가 있군. 성하께 진언을 올리지.”

“안 되면 너라도 단단히 준비해. 네 말에 귀 기울이는 세력도 작지는 않을 거잖아.”

“하하…… 충고 고맙게 듣지. 만약 무슨 일이 터지면, 그때는 네 도움을 다시 좀 받으마.”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 일이 터질 걸 대비하기 위해 이곳 성도에 온 게 아닌가.

껄껄 웃던 게르하르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올해는 소란스럽겠어. 어느새 이단이 뿌리를 내리고, 날은 추워지는 데다, 왕국들의 전쟁은 드디어 전면전으로 치달았다는군. 게다가 계시가…… 어쨌든. 세상이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내뱉은 게르하르트는 강직한 얼굴로 주먹을 굳게 쥐었다.

그러고는 할 일이 많은지. 이안과 스텔을 웬 예배당에 데려다주고는 빠르게 말했다.

“내 이름을 대라. 미리 말해놨으니 극진히 대접해 줄 것이다. 그리고 스텔 양에 대한 것도 상담을 받아보도록.”

그러고는 이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바쁜데도 굳이 시간을 내서 대화한 건가.’

게르하르트 나름의 고마움 표시일 것이다.

이안은 게르하르트가 안내해준 예배당의 문을 두드렸다.

성도에 위치한 건물답게 웅장하고 경건한 예배당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인자한 인상의 나이 든 사제가 이안을 맞았다.

“아. 게르하르트 경께서 말 하신 손님이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시지요.”

이안은 노인의 영혼을 살폈다.

깨끗하고 경건한 빛을 내는 영혼.

안심한 이안은 스텔과 함께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

그날은 아주 화창한 봄날이었다.

코르디스에서 성도까지 먼 거리를 끌려오느라 이네스는 몹시 지쳐 있었다.

이네스의 오라버니. 프리츠는 이네스를 걱정하며 물었다.

“힘들어? 좀 쉬어가자고 말할까?”

“으응. 아니. 저기까지만 가면 되는데 뭘.”

저 앞에 삐죽 솟은 성도 건물들이 보였다.

불과 바로 앞이건만.

휴식을 취하자고 권유하는 프리츠는 조금 이네스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조금 더 이동한 뒤.

마차에서 내리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사제들과 교황이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이네스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대륙을 지켜낼 영웅이시여.”

아직 어린 이네스는 교황이라는 이름에 눌려,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이네스 클로딘이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교황 성하.”

“하하. 너무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네스 님. 계시에 선택받은 영웅은 언젠가 천국으로 올라 신의 옆자리에 서실 몸. 그때가 되면, 이 늙은이를 잘 좀 봐주십시오. 허허.”

교황 나름의 농담이었는지 옆에 있던 사제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네스와 프리츠도 억지로 웃으며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그럼 바로 가시지요. 의식 준비는 이미 끝내두었습니다.”

교황은 뭐가 그리 급한지, 서둘러 의식을 진행하려 했다.

이네스는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을 때 곤란해할 사람들이 생각나 피로한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예나 지금이나, 이네스는 사람이 너무 좋았다.

의식은 교단의 창시자가 처음으로 계시를 받았다는 성소에서 치러졌다.

교황은 온갖 미사여구와 복잡한 수사로 꾸며진 연설문을 읊었는데,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하품하려다 그만 옆에 있던 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분명 이름이…… 에릭 그린이었던가?’

초롱초롱한 녹색 눈이 인상적인, 그 개구쟁이 같은 소년도 이네스와 마찬가지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네스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둘러 그만두었다면, 에릭은 대놓고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는 것.

열변을 토하던 교황이 얼굴을 찡그리고, 이네스와 프리츠는 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신께서 이들의 여정을 가호하시길.”

마침내 연설이 끝났다.

교황은 화려한 검집에 쌓인 검 한 자루를 이네스에게 건넸다.

“역대의 영웅들이 악마와 싸우기 위해 사용한 무구. 성검입니다.”

이네스는 조심스레 검집을 분리했다.

검집을 벗겨내자 드러난 건 이름에 걸맞지 않은 너무나 투박한 검이었다.

옆에서 잔뜩 기대한 채 보고 있던 사제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교황이 재빨리 설명했다.

“성검은 저희 같은 범인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무기입니다. 오로지 악마와 싸울 때 그 진가를 드러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선택받은 영웅이신 이네스 님이라면,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이네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이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네스는 이 검에 매료되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이 검을.

수많은 선대 영웅들의 괴로움과 고뇌, 그리고 희생이 깃든 이 검을 손에 쥐니 절로 마음이 경건해졌다.

그리고 그때 이네스는 마음을 굳혔다. 괴로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내가 하겠어.’

배니아 로웰. 칼 호프만. 에밀리아 화이트.

선대 영웅들 역시 원해서 이 운명을 받아들인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고난을 이겨내고, 자기 역할을 다 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역시 선택받은 사람은 다르네요. 방금, 의지를 굳힌 거 맞죠?”

에릭 그린은 순수하게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나 같았으면 그냥 도망쳐 버렸을 텐데.”

“그린 님도 여정에 함께하시잖아요?”

“에릭이라 불러요. 그리고 저랑 클로딘 님이랑 짊어진 책임감이 다르다고요. 만약 뭔가 잘못되면, 사람들은 다 클로딘 님 탓을 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이네스는 성검의 검신을 손가락으로 스윽 훑은 뒤,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선대 영웅들의 감정이 느껴지기라도 하는 듯.

“상관없어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면, 기꺼이요. 그리고 이네스라 불러요.”

“허. 이거 대단하신 양반이네. 솔직히 영 시원찮으면 그냥 도망갈 생각이었는데…….”

에릭이 소년처럼 웃으며 말했다.

“이네스랑 함께면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부탁해요. 에릭.”

“예. 마음껏 싸워주세요. 제가 책임지고 이네스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드릴 테니. 설령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요.”

“그런 건 부담스러우니까 목숨은 다른 소중한 데에 쓰세요.”

둘은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이네스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 만났을 뿐이지만, 이네스는 에릭이 괜찮은 사람이란 걸 느꼈다.

마음에 맞는 동료가 생기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인 법.

한창 좋은 분위기에서 돌연, 에릭 그린이 물었다.

“근데 이네스. 혹시 애인 있나요?”

뒤에서 흐뭇하게 보고 있던 프리츠의 잘생긴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뒤늦게 프리츠의 얼굴을 본 에릭이 농담이었다고 열심히 변명했다.

프리츠는 그 모습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이네스는 그 광경을 보며 맑게 미소지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에릭의 말마따나,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실제로 그들은 수많은 시련을 넘어 끝끝내 악마를 토벌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네스의 예감은 맞았던 셈이었다.

***

이네스는 정신을 차렸다.

자꾸 옛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단순히 추억이 깃든 장소이기 때문인가.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이네스는 하늘을 보았다.

분명 성도의 하늘은 맑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먹구름이 보이는 듯했다.

불안하다.

무언가 일어나서는 안 될 게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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