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배교자
“이네스 님이…… 없다고?”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은 많았다.
이네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악마를 토벌해낸 장본인.
결사대를 이끌던 영웅이다.
그렇다면 엄청난 명성과 인기를 누리는 게 당연하다.
이네스의 외모는 누가 보더라도 놀랄 정도로 아름다우니까.
악을 무찌른 강하고 아름다운 영웅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생각해 보니 이안이 대륙의 이곳저곳을 여행 다녔지만, 그녀의 이름이나 이야기에 대해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다못해 코르디스에는 배니아 로웰의 동상이 이곳저곳에 세워져 있었다.
똑같이 코르디스 출신인 이네스를 기리는 동상이 없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언가의 사건으로. 혹은 어떤 정치적인 이유로. 아니면 그녀가 어떤 실수를 저질러서.
사람들이 이네스를 꺼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이네스는 분명, 과거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섣불리 발을 들여놓기 어려운 그런 복잡함이었다.
특히 동료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렇기에 이안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안의 과거를 함부로 파고들지 않은 이네스처럼.
이안도 그저 기다렸다.
이네스가 감추고 있는 무언가를 스스로 털어놓을 때까지.
최근 들어, 이네스는 자신의 과거를 하나씩 풀어놓고는 했다.
분명 그랬었는데…….
지금은 대답조차 없었다.
“이안. 왜 그러시죠? 동공이 막 엄청 흔들리는데. 그 이네스인지 뭔지 때문인가요?”
“……그래.”
다 알겠다는 듯, 복면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종종 있는 일이죠. 이야기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변질되는 거요. 그 지역의 토속 신의 이름을 끼워 넣어, 사실은 우리 신도 영웅의 일원이었다! 하는 이야기는 흔히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이네스 님이 거짓이라는 거냐?”
“윽.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정사는 이쪽이라는 거예요. 예.”
이안의 서슬에 복면인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안은 짜증스럽게 이마를 쓸어내렸다.
이럴 때 이네스가 자기가 맞다고. 진실이라고 말만 해준다면 안심하고 믿을 텐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저 이안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듯이.
‘나쁜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야.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해. 하지만 만약 진짜라면…….’
만약에.
진짜 아주 만약에. 이네스란 존재가 원래 없었다면?
그렇다면 이안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가르침을 주고, 언제나 조언을 건네주던 존재는 대체 누구인가?
그녀가 가끔은 슬프게. 가끔은 그리운 듯이 얘기하던 동료들의 기억은?
이안은 저도 모르게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사용자에게 강한 힘을 전수해주는 전설의 검.
하지만 이안은 이와 비슷한 검을 본 적이 있었다.
코헨에서.
시장, 윌리엄 아만은 막강한 검으로 이안과 부딪혀왔다.
그들은 그 검을 마검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성검과 마검 사이에는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거지?
이안은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점점 더 지끈거려왔다.
이상하게도, 지끈거림은 이안 혼자 느끼는 게 아닌지 복면인도 이마를 짚었다.
“이상하네. 컨디션이 안 좋…… 어?”
무언갈 느꼈는지.
복면인이 허겁지겁 어디론 가로 달려갔다.
이안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냐는 듯, 스텔도 총총 뒤따랐다.
복면인이 향한 곳은 휑한 방에, 화려하게 장식된 타원형 거울이 놓여 있었다.
복면인이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계, 계시가 바뀌었어요!”
“계시?”
“신께서 가끔 저희를 위해 말씀을 내려주시거든요. 원래는 앞의 문장밖에 없었는데…….”
이안은 거울에 쓰인 글자를 읽어내렸다.
“은빛 성녀가 성도에 당도하면 거대한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그와 함께 재앙을 종식 시킬 영웅도 함께하리라.”
뒤이어 계시를 읽은 복면인에게 이안이 물었다.
“은빛 성녀면 역시 스텔을 말하는 거고.”
“예. 첫 번째 문장은 여러 종파에도 내려온 계시에요.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지금 처음 내려온 거예요!”
스텔이 성도에 오면 재앙이 찾아온다.
그렇기에 사제들이 더더욱 스텔을 죽이려고 든 것인가?
이안이 물었다.
“그런데 너는 용케 우리를 보호하려고 찾아왔네. 계시가 이런데.”
“예? 아. 스텔 님에 대한 계시가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어떤 종파에는 꼭 보호하라고 한 곳도 있을 정도고요.”
“원래 계시라는 게 다 다르게 내려오는 거야?”
“그럴 리가요! 더 많은 말이 내려오는 경우는 있어도, 완전히 다른 계시는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뭔가 커다란 문제가 생긴 거예요.”
중얼거리듯이 말한 복면인이 다시 활기차게 말했다.
“어쨌든, 헷갈릴 때는 죽이기보다 살리고 보는 게 저희 전통이거든요! 그래서 지켜드린 거고요!”
“그것참 고마운 일이군.”
이안은 건성으로 답하며 거울을 살폈다.
무언가 일어나려고 하는 건 확실했다.
그때.
이안은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중력이 약해진 것처럼, 몸이 하늘로 올라가 버릴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아니면 누군가 하늘에서 몸을 잡아당기고 있거나.
하지만 고개를 내려도 발은 땅에 잘 붙어 있다.
‘뭐야.’
이안은 눈에 신경을 집중해 월안으로 주위를 보았다.
어느샌가 천장에서부터 뻗어 나온 사슬 같은 게 이안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사슬에 실체는 없었다.
검을 뽑아 베어내려 했지만, 성검은 그저 허공을 갈랐다.
‘물리적인 힘은 없어. 이건 몸을 묶어두는 게 아니라…… 영혼.’
이안은 황급히 스텔과 복면인을 살폈다.
시름시름 앓던 복면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안은 그 영혼을 살폈다.
천장에서 뻗어 나온 사슬이 복면인의 영혼을 옭아매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하늘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시작됐다.’
배교자가 드디어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안은 곧장 성검을 뽑았다.
‘배교자가 있는 곳은 첨탑. 그곳에 가야 해.’
이안은 바닥에 쓰러진 복면인을 억지로 일으키며 말했다.
“밖으로 안내해. 곧장 나가봐야겠다.”
“모, 몸이.”
“지도라도 줘. 빨리!”
“……네.”
복면인은 품을 뒤지더니 자그마한 종이를 이안에게 건네주었다.
비밀 통로의 아주 중요한 길들만 표시된 약도였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스텔을 살폈다.
다행히 스텔은 조금 머리 아파할 뿐, 멀쩡히 서 있었다.
이안은 스텔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여기서 가만히 있어. 밖은 위험하니까. 알겠지?”
“…….”
스텔은 손가락으로 이안을 가리켰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스텔은 눈빛으로 말했다.
이안은 답했다.
“해야 할 일 하는 거지. 늘 똑같이”
하지만 그 표정에는 그림자가 져 있다.
언제나 짓던 미소도 없다.
그게 스텔의 마음에 걸렸다.
스텔은 이안의 소매를 붙잡았다.
“……나도 갈 거야.”
“아니. 네가 가서…….”
이안은 뒷말을 삼켰다.
스텔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설득이 통할 눈빛이 아니다.
한숨을 내쉰 이안이 말했다.
“조심해야 해. 특히 정신 꽉 붙잡고 있어. 알겠지?”
배교자는 일격 하나하나가 강력한 적은 아니다.
배교자의 까다로움은 바로 정신에 간섭해온다는 것.
게임에서는 게임 캐릭터가 플레이어의 지시를 반대로 따르거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구현되곤 했었다.
하지만 정신에 간섭한다는 건, 곧 정신만 똑바로 붙들고 있으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배교자를 상대로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은 스텔을 데리고 좁은 비밀 통로를 지나쳐, 곧장 밖으로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첨탑까지 가고 싶었지만, 약도에는 거기까지 나와 있지 않았다.
‘여긴…….’
빠져나온 곳은 상업지구에 있는 비스킷 가게였다.
열심히 과자를 굽던 주인은 들고 있던 쟁반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영혼이 벌써 반쯤 빠져나왔어. 약한 사람들부터 더 빠르게 빠져나가는 건가.’
그렇다면 시간이 없다.
이안은 배교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걷잡을 수 없어진다는 건 안다.
비록 지금은 이네스가 없어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해내야 했다.
이안은 가게를 나섰다.
거리의 상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광객과 순례자들, 주민 할 거 없이 모조리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하늘에는 진한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붉은 번개가 이따금 번쩍였다.
유일하게 구름 없이 맑은 곳은 바로 첨탑 위.
높이 솟은 첨탑에서는 무수한 사슬이 하늘로 뻗어 나가, 무언가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게 뭔지, 이안은 몰랐다.
하지만 그게 가까워질수록, 머리가 더 지끈거리고 있었다.
“스텔. 괜찮아?”
“……응.”
“그러면 이제부터 서두른다.”
이안은 속도를 높였다.
거리에는 쓰러진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에, 부득이하게도 이안은 그들을 밟고 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세게 밟아도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시체처럼 말이다.
이안은 더 속도를 높였다.
앞쪽에서 창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지금 뭣들 하는 건가! 이런 불경을 저지르고도 신의 천벌이 두렵지 않은가!”
“불경? 아직도 거짓된 믿음에 빠져 있구나! 입을 함부로 놀린 죄는 죽음으로 갚아라!”
사제들은 두 파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숫자는 이단 쪽이 우세했지만, 이쪽도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고 있었다.
신성이라는 비슷한 힘끼리의 대결인지라, 전투는 한 번에 결착이 안 나고 지지부진하게 장기화되는 감이 있었다.
그러다 돌연. 사제 하나의 몸이 쑥하고 위로 사라져 버렸다.
이단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천사다!”
“천사가 우리와 함께한다!”
하늘에 족히 백은 넘어 보이는 천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분전하던 사제들도 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게, 천사가 적을 도와주면 자기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신성은 믿음의 힘.
믿음이 흔들리면 약해진다.
아군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안 돼. 뚫어야겠어.’
지금도 천사들은 하늘을 비행하다, 기회가 되면 사제들을 낚아채 하늘로 올라갔다.
마치 먹이를 사냥하는 맹수 같은 모습이었다.
더 숫자가 줄기 전에 가세해야 했다.
그러기 전에 이안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상황이 혼란스러우면 내가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어. 그래도 계속 따라올 거야?”
“응.”
이번에는 고민 없는 즉답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되도록 천사 눈에 띄지 않게, 지붕이 있는 곳으로 숨어다녀. 알았지?”
이안은 스텔의 대답도 하기 전에 땅을 박찼다.
검을 들어 빠르게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뺨을 스치는 산뜻한 공기.
바람처럼 달려간 이안의 성검이 적들에게 폭풍우처럼 불어닥쳤다.
“끄아악!”
“뭐, 뭐야!”
“악귀! 악귀다!”
순식간에 허공에 검을 흩뿌려 적 셋의 목을 꿰뚫은 이안을 보며, 적군이고 아군이고 할 거 없이 겁에 질렸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좋다.
공포와 경악이 눈을 가려 조금이라도 대응이 늦어진다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촤악!
가로로 휘둘러진 성검이 사제의 목을 베었다.
그다음은 심장.
그다음은 머리.
일부러 급소만을 노렸다.
아무리 뛰어난 기적이라도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는 법이니.
그제야 적측에서도 제대로 대응에 나섰다.
“놈을 몰아세워라!”
“물러서지 마라! 놈을 가두어라!”
“천사님들을 불러!”
다종다양한 기적들이 이안에게 집중되었다.
그대로 맞았다가는 한순간에 가루가 될 정도로 강력한 화력이었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뛰어난 눈이 있다.
이미 기적을 완성했을 때는 앞으로 굴러 공격을 피해내고, 동시에 성검을 상대의 급소에 찔렀다.
검을 빼낸 이안은 곧바로 뒤로 빠지며 생각했다.
‘상대할 만은 한데, 숫자가 너무 많아. 이러다가는 끝도 없겠어.’
단칼에 죽이지 못하면 다시 회복된다는 건 큰 부담이었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좋아졌어도, 서서히 깎여나간다면 언젠가 체력은 동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이안의 고민을 날려 버리듯,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길을 뚫어라! 악귀를 도와 이단을 물리쳐라!”
쩌렁쩌렁한 고함을 내지르며 게르하르트와 성기사들이 기마 돌격을 감행했다.
한순간 얼굴에 화색을 띄웠던 이안은 급하게 옆으로 굴러야 했다.
이안이 서 있던 바닥을 하얀 말들이 힘껏 밟고 지나갔다.
비키지 않았다면 밟히는 건 이안이었을 것이다.
“악귀가 뭐야. 악귀가. 하여튼 맘에 안 드는 새끼.”
작게 툴툴거린 이안은 곧바로 게르하르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