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배교자(4)
천사장의 등장은 배교자와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배교자와의 보스전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라면 시간제한이 있다는 것.
배교자는 계속 의식을 거행하려 하고, 플레이어는 천사장과 배교자의 공격을 뚫고 배교자를 죽여 의식을 막는 게 전투의 골자다.
게다가 배교자는 단 한 번.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쓰러진다.
그러니 어떻게든 배교자에게 접근해 공격만 날리면 이기는 거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지.’
여덟 겹의 날개를 펼쳐 보인 천사장은 곧장 이쪽을 향해 창을 겨냥하더니, 그대로 투척했다.
쎄에엑!
전격에 둘러싸인 창은 빛살이 되어 날아왔다.
무시무시한 속도.
이안은 월안으로 그 궤적을 읽은 뒤, 곧바로 외쳤다.
“피해!”
이안과 게르하르트가 동시에 땅을 굴렀다.
그들이 서 있던 땅에 전격의 창이 박혔다.
하지만 피한 것으로 끝이 아니다.
콰과광!
창이 부딪힌 곳에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평평하던 대리석 바닥에 반구형의 넓은 구멍이 생겨났다.
게르하르트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려댔다.
“이 무슨 위력인가…….”
“얼타지 마!”
어느새 창이 천사장의 손에 되돌아가 있었다.
천사장은 곧장 다음 투창을 준비했다.
게르하르트가 중얼거렸다.
“다, 당장 접근해서 저 괴물 같은 천사부터 죽이면 어떤가?”
“다가가기 힘들어. 다가갔다가는 곧장 저 창에 꽂혀 버릴 거야. 그리고 의미도 없고.”
손해를 무릅쓰고 다가가 힘겹게 천사장을 쓰러트린다고 해도 의미는 없다.
천사장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어, 금방 몸을 수복하고 말 것이다.
게임에서 숱하게 당해온 일이다.
굳이 지금 시험해볼 필요는 없다.
결국, 노려야 하는 건 배교자.
이안은 등에 걸어두었던 태양의 활을 꺼냈다.
‘그렇게 나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어차피 단 일격만 먹이면 배교자를 처치할 수 있다.
태양의 활이 가진 강력한 힘이라면 분명 천사장을 뚫고 배교자의 본체를 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빛을 모을 여유가 좀 필요했다.
“야. 천사장의 주의를 끌어.”
“어, 어떻게?”
“낸들 아냐. 신성이든 몸을 던지든, 어떻게든 해내. 실패하면 다 끝이야.”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군.”
이를 악문 게르하르트가 뛰쳐나갔다. 정말 천사장을 향해 몸이라도 던질 기세였다.
그 사이.
이안은 활의 시위를 잡아당겼다.
“호크.”
“핍!”
소환된 호크가 내뿜는 빛과 첨탑의 창문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이 활의 끝부분에 모이기 시작했다.
의식을 계속하던 배교자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왜인지 낡은 냄새도 나고요. 고대 제국의 유물이려나요?”
단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배교자는 순식간에 활의 정체를 꿰뚫어 보였다.
내심 피가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이안은 일부러 허세를 섞어 말했다.
“아는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어.”
“하하하. 흥미롭지만, 역시 그 활은 조금 위험하군요.”
혀를 찬 이안은 곧장 시위를 놓으려 했다.
아직 충분히 빛이 모이지 않지만, 배교자가 술수를 벌이기 전에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배교자가 발을 쿵― 하고 구르자, 주위에 퍼진 신성이 휘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이안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암전된 공간 속에서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런 걸 주마등이라 하던가?
짜증 나는 점은 그 기억들이 하나같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안의 아픈 부분이라는 거다.
폐인처럼 도박에 빠져 있던 때의 기억.
믿었던 동료에게 사기당하고 배신당했던 아픔.
그리고…….
“헙.”
이안은 어느새 그라운드 위에 서 있었다.
손에 든 건 흉측한 검이 아닌 야구 배트.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 떨어졌다는 걸, 이안은 깨달았다.
배교자가 보여주는 환상이라는 걸 안다.
알지만 도저히 깨트릴 수가 없다.
도망치려 했지만, 몸이 말을 안 들었다. 알아서 움직인다.
‘그만해.’
상대 투수와 눈이 마주쳤다.
중요한 시합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나가 있는 타자들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감독은 지시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안은 영웅이 되고 싶었다.
팀에 승리를 직접 선사하고 싶었다.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자기는 특별하니까.
‘그만…….’
이안의 팔이 저절로 움직인다.
온 힘을 다해 휘두른 배트가 공을 친다.
하지만 공을 친 각도가 좋지 않다.
낮게 날아간 공은 상대 수비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나가 있던 동료도 아웃. 이안도 아웃.
그렇게 시합은 끔찍하게 마무리되었다.
야유를 보내는 관중들.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의 질타와 욕설.
절대 이 판에 발 들이고 못살게 하겠다고 윽박지르던 감독님.
세상 모두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때 이안은 깨달았다.
자기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무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는 형편없는 놈이라는 걸.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때의 절망감. 비참한 감정이 마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이제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는데, 배교자의 공격은 실로 잔인했다.
이대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영원히 앉아 있고 싶었다.
‘너는 쓰레기야!’
아직도 사람들이 외쳐대던 비난과 욕설이 이안의 귓속을 맴돌았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안은 다시 일어섰다.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설령 이안 스스로를 믿지는 못할지언정, 강력히 신뢰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 사람이 말했다.
이안은 자기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설령 자신은 믿지 못하더라도, 이네스라면 믿을 수 있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이안은 눈을 떴다.
어느새 태양의 활에 모였던 빛은 흩어지고 없었다.
또다시 빛의 화살을 사용하려면 준비시간이 필요했다.
이안은 다시 성검을 붙잡았다.
배교자는 그런 이안을 보며 눈을 빛냈다.
“처음에는 즐거운 환상. 두 번째로는 괴로운 기억. 그 모두를 이겨내다니. 과연 영웅에 걸맞는 정신력이군요. 아니. 아니군.”
혼자서 중얼거리던 배교자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마음속에 강력한 지주가 있는 것이군. 나랑도 비슷하다 할 수 있는 건가.”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이런. 실례했군요. 생각할 게 있으면 넋을 잃고 잠겨 드는 게 오랜 버릇인지라.”
어깨를 으쓱이는 배교자를 향해 이안은 다시 달렸다.
방금 정신에 가해진 충격의 여파로 팔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억지로 잡아끌고 어떻게든 움직였다.
배교자는 왜인지 미소지었다.
“훌륭한 의지. 그럼 끝까지 가보도록 합시다.”
파스스스.
천사장의 손에 들린 전격의 창이 더 길어지고, 두꺼워졌다.
어찌나 두꺼운지 마치 자그마한 건물의 기둥이라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게르하르트도 그 모습에는 질렸는지 혈색이 파랗게 변했다.
“이, 이안! 대체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건가!”
“실패했으니까 너도 알아서 피해!”
“젠장! 빨리 말했어야지!”
후욱!
창을 든 천사의 팔이 일순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거대한 창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노리는 건 게르하르트가 아니라.
피할 방법은…….
‘없다!’
창 자체는 피해도 그 이후에 있을 폭발까지 회피할 수는 없다.
이안은 재빨리 목에 걸린 브로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곧바로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이안의 주위를 화염의 장막이 뒤덮었다.
장막과 부딪힌 창은 한차례 굉음과 주위 일대가 폭발에 휩쓸렸다.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게르하르트를 날려 버린 건 물론, 첨탑의 아래층이 휘말려 벽들이 허물어져 내렸다.
하지만 장막의 아래에 있던 이안은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어떤 공격이든 단 3초 정도는 막아낼 수 있는 ‘피에람의 긍지’의 위력이다.
‘문제는 이제는 진짜 몸뚱이랑 검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지.’
이제 여벌 목숨도 남지 않았다.
다음에 저런 공격이 또 온다면, 그때야말로 끝이다.
한시라도 빨리 달려 배교자를 처치해야 했다.
“이 불꽃은…… 그렇군. 피에람인가. 굉장히 그리운 느낌이군.”
불꽃이 남긴 잔향을 음미하던 배교자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와 이안 사이의 거리는 절반이나 줄어 있었다.
하지만 배교자는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정신적 충격도 버티게 하는 정신적 지주가 있다면 그걸 무너뜨리면 될 일!”
쿵!
배교자가 다시 한번 발을 굴렀다.
‘온다.’
또 한 번 정신 공격이 올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로 깨어날 수 있게, 이안은 일부러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하지만 예상한 것과 달리 주위 풍경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대로였다.
이안은 달리고 배교자는 서 있는다.
하지만 어째선지 배교자는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도 당신의 마음속을 지탱하는 존재는 스스로를 이네스라 칭했겠지요?”
배교자의 말에 이안이 우뚝 멈췄다.
멈추고 싶어서 멈춘 게 아니었다.
왜인지 발에 끈적이는 기운이 엉켜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안은 온 힘을 발에 집중하며 말했다.
“그래. 너와 함께 대악마를 토벌했던 영웅이다! 아마 지금 네 모습을 봤더라면 슬퍼했을 사람이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함께했던 동료 중에 이네스란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 말에 발을 움켜쥔 기운이 더더욱 강해졌다.
이미 한번 들었던 내용이다.
하지만 그걸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안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
“말 그대로입니다. 로잘리아, 프리츠, 아타바, 그리고 저. 이렇게 넷 뿐. 그곳에 이네스란 이름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왜 이네스란 이름을 알고 있을까요?”
저놈의 말을 더 들어선 안 돼.
머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안은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왜인데.”
“환영의 악마. 이네스. 유명한 이름입니다. 혹시 들어보지 못했나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듯한 아름다움을 지니며, 사람들의 꿈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몽마. 달콤한 말로 자기한테 의지하게 만들고, 싹수가 있는 사람은 완전히 홀려 권속으로 삼아 버리죠.”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야.”
“그런가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나요? 단 한 번도?”
이안은 멈칫했다.
자동으로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건 ‘마검’이라는 두 글자.
이안은 마검과 성검의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없었다.
의심이라고 하기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저 쓸데없는 생각이라 치부하고 넘겼었다.
하지만 영웅의 전당에서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듣고.
이네스가 말이 더 들리지 않자 마음속에서 의심의 씨앗이 발아했다.
그 씨앗에 배교자의 말이 더해지자,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없어.”
자기가 듣기에도 맥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배교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참고로 지금 제가 펼치고 있는 건 천국을 떨어트리는 의식입니다. 천국이 가까워질수록 악마는 버티기 힘든 법이지요. 묻겠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믿고 따르는 이네스는 이런 위기 속에서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죠?”
“…….”
그 말이 결정타가 되어 이안의 발을 완전히 묶어버렸다.
동시에 이안과 배교자의 거리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는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가만히 있는 배교자의 몸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기적인가.
당장 뿌리쳐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안의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 모습에 조금 흥이 식은 듯.
콧숨을 내쉰 배교자가 지시를 내렸다.
“끝내세요.”
파스스스.
천사장이 양팔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 생겨난 전격의 창은 무려 두 자루다.
천사장은 이번에는 확실히 끝장내기 위해 그 창끝을 이안에게 겨냥했다.
후욱.
천사장이 양팔을 번갈아 휘둘렀다.
연달아 날려진 거대한 창 두자루가 빗살이 되어 이안에게 향했다.
몸이 굳어 버린 이안은 더는 피할 수 없다.
죽음이 빠르게 다가왔지만 혼란스러워하던 이안은 눈을 감았다.
어쩌면 잘된 걸지도 모른다.
잇따른 배교자의 농간에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터였다.
그토록 믿고 따라왔던 이를 부정하는 말을 들었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안은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이듯, 두 눈을 감았다.
콰광!
날아온 창은 이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주위 모든 걸 삼켜 버렸다.
첨탑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다.
기둥을 잃은 첨탑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자욱하게 먼지가 퍼지고.
위에서 돌 부스러기며 장식물 따위가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배교자는 그저 제자리에 꼿꼿이 선 채, 폭발이 일어난 중심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먼지가 어느 정도 걷혔을 때, 배교자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표했다.
“흐음?”
그 무엇에도 깨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고 찬란한 은빛의 장벽이 이안의 주위에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