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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24화 (125/222)

124. 배교자(5)

아무것도 없다.

감정도, 즐거움도, 쾌락도,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건 오직 사명뿐.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세계.

그게 스텔의 인생이었다.

스텔은 고민하지 않았다.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똑같은 하루하루를 태워 나갈 뿐이었다.

사제들은 그런 그녀의 상태를 ‘행복’이라 불렀다.

속세의 사람들은 언제나 탐욕에 물들어 있다.

언제나 더 많은 걸 가지기 위해 고민하고, 걱정하고, 죄악을 저지른다.

물질을 가지면 가질수록 사람은 불행해진다. 사람의 욕심은 무한하며, 완전히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텔은 수긍했다.

그녀의 단순하고 건조한 세계야말로 어찌 보면 가장 완벽에 가까운 형태일 수도 있었으니까.

단순할지언정 그 벽은 견고하다.

벽이 단단하기에 신성을 담아두는 그릇으로서는 최고다.

덕분에 스텔은 누구보다 강력한 기적을 부릴 수 있었다.

사제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스텔이 무언가를 바꿔줄 거라 꿈꾸고 있었다.

스텔에게는 잘 이해도 안 되고 별로 관심도 없는 꿈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들이 기뻐하면 그걸로 된 거라며 내심 만족했다.

하지만 그 사제들은 여정의 중간에 처참히 살해당했다.

그토록 원하던 꿈에 다가서지도 못하고 말이다.

슬프지는 않았다.

애초에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가 스텔에게는 존재치 않았다.

현세에서의 삶은 거쳐 가는 것.

그들은 더러운 육체에서 해방되어, 그토록 열망하던 천국에 들었을 것이다.

그때쯤 만난 게 이안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검은 머리 청년은 다짜고짜 동행을 제안했다.

멍해 보이는 스텔이지만 그녀에게는 사람을 가늠하는 감각이 있었다.

평생 금욕적으로 살며 오감을 억눌러 왔기에 생겨난 여섯 번째 감각이라 해야 할까.

그녀에게는 보였다.

이안은 순수한 의도로 자신과 동행하고 싶은 게 아니다.

분명 그녀가 다루는 신성과 기적이 탐나 함께하자는 것일 터.

하지만 스텔의 감각은 또 말했다.

그렇다 해도 지금 저 사내를 따라가야 한다는 걸.

그래서 함께했다.

중간에 딴 길로 셀 때도 함께했다.

덕분에 참으로 많은 걸 보고 배웠다. 많은 걸 깨닫고 경험했다.

겨울의 초원을 다니며 자연의 잔혹함과 세상의 끔찍한 일면을 보았다.

그곳에는 어떤 신의 자비도, 아름다움도 없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스텔의 세계가 조금씩 무너진 게.

이 단순하고 공허하던 세계가 조금씩 붕괴하던 게.

더는 기적을 부릴 수 없었다.

스텔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제가 신성을 다루지 못하게 된다는 건, 어느 날 갑자기 두 팔을 잃은 것과 비슷한 느낌.

갑작스럽게 어미를 잃은 오리 새끼와도 같은 기분.

늘 기대어 오던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그 기둥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던 스텔에게 이안은 직접 만든 수프 그릇을 내밀었다.

신성을 되찾기 위해 뭐라도 해봐야지 않겠냐는 논리였다.

고민하던 스텔은 한참 갈등하다 수프를 떠먹었다.

‘맛있다.’

스텔은 살면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평생을 무미한 음식만 먹어오던 그녀에게는 자극이 강한 맛이었다.

하지만 스텔은 멈추지 않고 수프를 먹었다.

단순히 혀에 전해지는 자극뿐만 아니라 몸에 퍼져나가는 따스한 온기를 즐겼다.

이거야말로 사제들이 말하던 행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스텔의 무채색 세계에 조금씩 색깔이 입혀지기 시작한 게.

단순하고 공허하던 마음속에 조금씩 다른 것들이 들어찬 게.

스텔은 다시 이안과 여행하며 많은 것을 구경했다.

많은 질문을 던졌고, 이안의 대답해주면 혼자서 사고했다.

마치 어린 딸을 다루는 아버지처럼 이안은 툴툴거리면서도 친절히 설명해주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스텔은 사라진 신성 대신으로 이안에게 기대었던 것 같다.

아니면 아버지, 혹은 친구라 생각하며 이안에게 의지하던가.

어느 쪽이든 스텔에게는 맺어본 적 없는 종류의 관계였다.

그렇게 스텔의 세계는 빠르게 넓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마음속 어딘가에는 신성이 남아 있었을 터다.

그녀는 여전히 신앙인이었으니.

하지만 도저히 그 신성을 끄집어내, 기적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결구에는 성도에 도착했고, 사건에 휘말렸다.

이안은 적들을 뚫고 첨탑으로 향한다고 했다.

스텔에게는 위험하니까 남아 있으라고.

하지만 스텔은 거부했다.

머리로는 안다.

지금 그녀가 같이 가봐야 방해밖에 안 될 거라는 걸.

하지만 왠지 여기서 이안을 놓치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떠오른 건, 순례자의 길에서 버려졌던 늙은 말.

애초에 이안은 스텔이 신성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녀를 데리고 다녔던 것일 터다.

신성을 잃은 스텔을 이안이 챙겨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초조함.

이안에게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처음 겪어보는 낯선 감정이다.

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도 잘 모른다.

하지만 스텔은 설령 민폐일지라도, 이안을 따라가고 싶었다.

어쩌면 스텔이 살면서 처음 부려본 고집일 수도 있었다.

콰광!

하늘에서 천사들이 날아다니며 지상을 폭격했다.

스텔은 때로는 요령으로. 때로는 운으로 공격들을 피해내며 첨탑의 계단 아래에 다다랐다.

왜인지 성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스텔은 혹시나 해 성기사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없어.”

이안은 없었다.

분명 계단을 올러 첨탑에 갔을 터다.

스텔도 주저 없이 계단에 발을 올렸다.

첨탑 위에는 먹구름이 끼지 않았다.

푸른 하늘에서 쨍한 햇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스텔은 무표정하게 계단을 올랐다. 위쪽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싸움이 시작된 듯하다.

스텔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마침내 계단을 모두 올라, 첨탑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파앙!

충격파가 스텔을 덮쳤다.

왜소한 스텔의 몸이 그대로 날아가 나뒹굴었다.

우드득.

“……윽!”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다.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고통이 퍼져나갔다.

고통이 어찌나 심한지 도저히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였다.

몇 번 끙끙거리던 스텔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머리를 바닥에 대고 눈을 감았다.

얼굴에 내리쬐는 햇볕이 퍽 기분 좋았다.

이대로 그냥 잠들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기를 쓰고 저곳으로 가봤자 스텔이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말이다.

“…….”

문득, 스텔은 다시 눈을 떴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지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저 혼자 고고히 빛나며 방관할 뿐이다.

하지만 그 무심한 모습을 보며 스텔의 마음속 한구석이 꿈틀거렸다.

‘예쁘다.’

사제들이 그토록 예찬하던 세상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조금뿐이지만 알 것 같았다.

머릿속이 탁 트이는 기분.

스텔의 마음속에 신성이 폭풍처럼 차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벽은 이미 구멍이 숭숭 뚫려 무너진 지 오래다.

맹목적으로 믿음을 가지던 스텔은 이제 이곳에 없었다.

의심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차오르던 신성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다.

지금 기회를 잡으면 스텔은 이전과 같이. 아니, 이전보다 더 강력한 신성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을 놓치면 영영 신성을 되찾을 수 없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얼마 전에 들었던 질문.

무엇을 위해 신성을 다루고 싶은가?

스텔은 힘겹게 몸을 일으킨 뒤, 비척비척 첨탑 안으로 걸어가며 그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에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굉음이 가까워지며 전투의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여덟 겹의 날개를 펼친 천사장이 양손에 거대한 창을 한 자루씩 쥐고 있었다.

그 창끝이 향하는 건 이안.

이안은 무언가에 뒤엉켜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게르하르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 얼마 후면 저 창이 이안의 몸을 꿰뚫겠지.

재주가 많은 이안이지만, 이번만큼은 힘들어 보였다.

결국. 여기서 이안을 도울 수 있는 건 스텔 혼자다.

스텔은 눈을 감고, 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신성을 느끼며 생각했다.

‘내가 신성을 다루고 싶은 이유.’

떠오르는 건 검은 머리를 한 사내다.

가끔 사납게 굴면서도 내심 마음은 따뜻하고,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필사적이며, 자신감이 넘쳐 보이면서도 반대로 자신감이 없는.

언제나 계산적으로 굴면서도 정작 짐 덩이인 자기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몇 번이나 지켜낸 사내를.

‘이안을 돕고 싶어.’

보잘것없는 이유일 수도 있다.

사제로서는 품어야 하지 말아야 할 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스텔은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던 신성이 질서를 갖추고 장벽의 형태로 현실에 발현되기 시작했다.

***

“흐음?”

배교자의 눈이 흥미를 띄었다.

이안의 몸 주위로 단단한 신성의 방벽이 펼쳐져 있었다.

얼떨떨하게 눈을 뜬 이안도 뒤쪽을 쳐다봤다.

언제나 무감정한 소녀가 팔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스텔…….”

배교자가 중얼거렸다.

“재밌을 것 같아서 조언을 좀 건넸는데, 설마 신성을 되찾을 줄이야. 그것도 더 강한 형태로. 오늘은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군요.”

스텔은 대답 없이 이안 쪽으로 걸었다.

파스스.

천사장의 손에 다시 전격의 창이 나타났다.

이번에 노리는 건 이안이 아닌 스텔이다.

천사장은 곧장 팔을 뻗어 창을 날렸다.

콰앙!

날아간 창은 채 반도 날아가지 못하고 공중에서 폭발했다.

스텔이 공중에 펼쳐놓은 방벽에 너무나 허무하게 막힌 것이다.

“……내가 지킬 거야.”

스텔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무감정하던 눈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이 이후에 펼쳐지는 어떤 공격이든, 전부 막아내겠다는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그런 스텔의 모습에 이안도 적지 않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스텔. 게임에서 방어력으로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캐릭터…….’

직접 그 위용을 체감하니, 이렇게 든든할 수도 없다.

신성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포기하려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스텔은 훌륭히 딛고 일어섰다.

‘결국. 또 이네스 님이 옳았다는 건가.’

모든 것은 믿음이다.

배교자가 저토록 강력한 힘을 다루는 건 믿음.

스텔이 일어선 것도 믿음.

이안의 발이 묶이고, 배교자와의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는 것도 믿음 탓이다.

“……어디 아파?”

스텔은 이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 속에는 대체 가만히 서서 뭘 하느냐는 순수한 의문이 깃들어있었다.

혹시 몸을 다쳐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치유 기적까지 준비하려 했다.

이안은 그 호의에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손은 다시 성검을 붙잡았다.

“잠시 멍청한 생각을 했어. 멘탈이 나가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투둑툭.

발을 얽매던 끈적한 물질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정작 당사자와는 한마디 말도 안 했는데 처음 보는 놈 말에 휘둘려서 말이야.”

배교자가 말을 받았다.

“비단 제 말 하나 때문에 의심한 건 아닐 텐데요? 당신은 그녀에 대한 기록을 봤을 겁니다. 세상 어디에도 그녀의 흔적은 없습니다.”

이안은 코웃음을 쳤다.

발을 얽매는 것을 점점 뜯어내며 말했다.

“어차피 다 모르는 사람일 뿐이야. 모르는 사람 천명 만 명의 말을 믿는 것보다, 내가 아는 사람 한 명의 말을 믿는 게 낫지 않겠어?”

“헛소리. 실로 비이성적이에요.”

“맞아. 근데 여기는 그런 세계야. 논리와 이성이 아닌 믿음이 힘을 가지는 세계. 그러니 나는 이네스 님을 믿겠어.”

툭!

이안을 옭아매던 것들이 마침내 전부 사라졌다.

이안은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토록 아득히 느껴지던 배교자와의 거리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안은 배교자의 표정을 살폈다.

당황했을까?

아니. 배교자는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정말로 만족한듯한 표정이었다.

“어이가 없군요. 결국에는 정답에 도달하다니.”

혼자서 중얼거리는 배교자를 향해 이안이 성검을 내질렀다.

어떤 수를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이안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배교자는 피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배교자가 양팔을 벌렸다.

이안은 배교자의 심장에 정확히 성검을 박아 넣었다.

둘의 몸이 겹쳐지자, 배교자는 팔을 부드럽게 그러모아 이안을 껴안았다.

“다행이에요. 이네스가 좋은 동료를 만났군요. 이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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