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외전). 최후의 결전
얼음 계단을 모두 오르니 거대한 옥좌에 악마가 앉아 있었다.
마치 인간의 두려움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처럼 생긴 악마는 혼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옥의 밤하늘에도 별은 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악마가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세상의 끝에 온 걸 환영한다, 영웅들아.”
죽음, 허무, 두려움의 대악마는 결사대를 환영했다.
그리고 찬사를 보냈다.
숱한 시련을 뚫고 마침내 종착지에 도착한 이 영웅들에게.
악마는 대화를 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선두에 선 이네스는 성검을 뽑아드는 것으로 의지를 표했다.
“악마와 나눌 말은 없다.”
새하얀 검광이 성검을 뒤덮었다.
악마의 눈이 놀라움으로 빛났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와 많은 걸 보았지만, 이렇게 선명하고, 크고, 또 고결한 검광은 처음이었다.
악마는 놀라운 구경거리를 보여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선수를 양보했다.
관대하게도.
이네스는 거절하지 않았다.
곧장 땅을 밟았다.
빠득!
어찌나 강하게 밟았는지, 이네스가 서 있던 자리가 움푹 내려앉았다.
동시에 이네스의 몸이 흐릿해졌다.
그녀의 몸이 다시 선명해졌을 때, 이네스는 이미 악마의 코앞에 당도해 있었다.
공간 이동에 가까운 초고속의 움직임에 그 악마조차도 대응이 늦었다.
촤악!
새하얀 검광이 악마의 불길한 몸을 베어냈다.
동시에 동료들도 움직였다.
에릭 그린이 기도를 읊었다.
“신이시여, 그대의 자식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용기를. 지치지 않는 발을. 강해진 몸을. 뚫리지 않는 방패를.”
순식간에 네 가지의 기적이 동료들을 감쌌다.
보호막, 정신 방어, 신체 능력 향상, 그리고 체력 보조.
빠르게 일으킨 기적이지만 결과물은 놀라울 정도다.
안 그래도 빠르던 이네스의 속도가 눈으로 채 읽기도 힘들 정도로 가속했다.
프리츠는 악마의 뒤쪽으로 달려갔다.
앞쪽은 이미 이네스의 영역이다.
끼어봤자 괜히 방해만 될 뿐이었다.
프리츠는 이네스를 막아내는 데에 급급한 악마가 빈틈을 보인 사이, 검광을 입힌 대검으로 바닥을 힘껏 내리찍었다.
쾅!
얼음 바닥이 쩌저적 갈라졌다 악마의 바로 아래 지면에서 거대한 충격파가 솟구쳐 올랐다.
악마는 예상하였다는 듯 하늘로 솟구쳤다.
이네스도 그에 맞춰 땅을 박찼다.
그녀의 뒤에는 거대한 매의 형상을 한 빛의 정령이 달라붙어 날개가 되어주었다.
악마와 이네스는 공중에서 찰나의 시간 동안 수십 합을 나누었다.
간소한 차이지만 이네스가 조금씩 악마를 압박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그 눈. 거슬려.”
악마가 입을 오므려 입김을 불었다. 거무튀튀한 감정들이 순식간에 주위 일대를 뒤덮었다.
하지만 이네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소용없어.”
한마디.
단지 그 한마디에 퍼져나갔던 감정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다.
목소리에 실린 힘은 사이한 것들이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제야 악마는 근접전은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무리해서라도 이네스를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이네스는 요리조리 몸을 뒤틀며 절대 악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그때.
로잘리아가 외쳤다.
“준비해요!”
그와 함께 파란색 불덩어리가 악마를 향해 쏘아졌다.
그 비현실적인 초고열의 불덩이가 뿜어내는 압박감은 엄청났다.
주위에 느껴지는 열기만으로 초인인 동료들의 살갗을 태울 정도였으니.
악마는 그 불덩어리를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 빠르지 않아 피하기는 쉽지만, 문제는 이네스가 달라붙어 물러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네스도 함께 휘말려들 터.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망칠 생각인 걸까?
그렇다면 자신도 그 타이밍에 피해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악마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날아온 불덩이는 그대로 악마와 이네스를 동시에 삼켜, 폭발을 일으켰다.
자기 몸을 미끼로 동귀어진?
아니. 결사대의 눈에 그런 낌새는 없었다.
온몸이 불살라지면서도 악마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뭘까.
불꽃이 걷힌 악마는 우선 이네스를 살폈다.
아무리 에릭 그린의 방벽이 있어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네스는 멀쩡했다.
피해 없이 건재한 수준이 아닌, 오히려 더 강력한 기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불꽃을 흡수한 건가. 이런 재주라면 고룡 정도려나.”
“내 불꽃을 맞고도 저렇게 멀쩡하다니!”
악마 역시 금방 몸을 수복하자 로잘리아는 분한 듯,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그 모습을 흘끗 살핀 악마가 억누르고 있던 힘을 폭발시켰다.
“적당히는 안 되겠군.”
파아아!
검은색 기운이 악마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이네스를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이네스는 날아가는 와중에도 활을 꺼내 화살 세 개를 동시에 날려댔다.
악마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이네스는 독하게 싸웠으며, 전투의 전문가였다.
“아무래도 지금까지는 힘을 억누르고 있던 모양이에요.”
“애초에 이 정도일 거라 기대도 안 했다.”
나바혼은 손에 든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드드득.
땅에서 자라난 거대한 나무줄기가 위로 뻗어 나가 악마를 휘감았다.
악마는 손짓 한 번만으로 나무줄기를 간단히 베어 버렸지만, 문제는 그 숫자였다.
나무줄기가 끝도 없이 솟아올랐다.
악마조차 귀찮게 할 정도로.
그렇게 시간이 끌리는 사이, 이네스가 다시 거리를 좁혔다.
성검을 뽑았다.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이네스의 검격은 점점 날카로움을 더해가고 있었다.
악마와 짧은 공방에서 상대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순식간에 파훼법까지 떠올린 것이다.
악마의 일격 하나하나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전투를 거쳐 축적되어온 싸움의 정수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천재.
이 단어에 이보다 더 적합한 인재가 따로 있을까?
많은 재주를 수준급으로 갖춘 데다가, 검술에 있어서는 악마조차 엿보지 못할 영역에 닿아 있었다.
마치 불공평할 정도로 신의 편애를 받는 것만 같다.
게다가 그녀의 동료들은 또 어떠한가.
프리츠. 로잘리아. 아타바. 에릭.
하나 같이 역사에 기록되어 오래도록 회자될 걸출한 영웅들이다.
많은 영웅들을 보고 많은 싸움을 겪어본 악마조차 이렇게 강력한 결사대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들 사이의 유대는 실로 끈끈하다.
마치 서로의 영혼이 함께 이어진 것처럼 손발이 잘 맞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했다.
악마에게 그들은 반짝임으로 보였다.
저 밤하늘에 있는 별들보다도 더 강한 빛을 내뿜는 인간들.
그렇기에 기쁘다.
이들의 반짝임을 자신이 거두어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기쁘다.
악마는 온몸으로 웃으며 폭발적인 힘을 이네스에게 쏟아냈다.
탐색전은 끝이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싸울 때다.
악마의 변한 분위기에 이네스 역시 전투의 박자를 올렸다.
동료들 역시 그런 이네스에게 맞춰 더욱 분주히 움직였다.
악마는 강하다.
혼자서 결사대를 상대하면서도 호각의 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조금씩이지만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결사대가 몰아붙이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결사대의 얼굴에 조금씩 희열이 떠올랐다.
‘이길 수 있다!’
이른 희망이 마음속에 퍼져나갔다.
악마 역시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다.
그 누구보다 감정에 민감한 존재이기에 영웅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곧바로 알아챘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건 오로지 이네스 뿐이다.
이네스는 마치 싸우기 위해 강림한 천사처럼, 처음부터 끌까지 변함없이 검을 놀렸다.
악마는 못내 아쉬웠다.
이네스의 마음도 느슨해졌다면, 좀 더 재밌는 상황을 선사할 수 있었을 텐데.
악마는 입맛을 다셨다.
좀 더 뜸을 들이고 싶지만 자칫하다가는 ‘요리’를 망쳐 버릴 것만 같았다.
판단을 내린 악마는 감정의 덩어리를 한데로 뭉쳐 터트려 강한 충격을 일으켰다.
잠깐의 소강상태를 만든 악마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가 메인 요리였다.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다섯 명이 필요하다. 다섯 명이 가면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 오랜 법칙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이네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지금껏 이어져 온 수많은 싸움에서 과거의 영웅들은 언제나 희생을 치러왔다.
때론 격전 끝에 간신히 한 명이 살아남은 적도. 훌륭한 싸움 끝에 네 명이 살아남은 적도 있다.
하지만 다섯이 모두 살아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걸 악마의 저주라 불렀다.
프리츠가 외쳤다.
“저주를 걸 셈이냐!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다!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우리를 얕보지 마!”
이어서 동료들이 호응했다.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진짜로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만약 그래야 할 상황이 온다면, 동료들을 대신 자기가 먼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참으로 찬란한 감정. 아름다운 반짝임.
악마는 흡족해하며 말했다.
“너희들을 모욕할 생각은 없다. 그래. 죽음 따위는 너희의 의지를 꺾을 수 없겠지.”
악마가 손장난이라도 치듯, 느릿하게 팔을 흐느적거렸다.
마치 춤처럼 보이는 그 동작은 원형을 그렸다.
이네스는 미간을 좁혔다.
뭔가 위험하다.
이제껏 느껴봤던 그 어떤 위기보다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끝내야 해!”
발작하듯이 외친 이네스가 크게 성검을 휘둘렀다.
악마의 몸이 반토막이 났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악마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원을 그려나갔다.
원안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여들었다.
분노, 절망, 탐욕, 공포, 질투, 광기, 불신.
그 감정이 한데 모여 덩어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덩어리가 커질수록 악마의 힘이 빠르게 줄었다.
그 덩어리에 악마 자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제야 똑같이 위기감을 느낀 동료들도 공격에 가세했다.
로잘리아의 불꽃이, 프리츠의 대검이, 아타바의 도끼가, 에릭의 기적이, 그리고 이네스의 성검이 동시에 내질러졌다.
모두 강력한 일격들이다.
악마에게도 확실히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마무리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마는 계속 춤을 추었다.
덩어리는 마침내 악마보다도 더 커져, 마치 악마가 양팔을 위로 들어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듯이 보일 정도였다.
그때 되어서는 일행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저 덩어리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그 모습에 비웃음을 흘린 악마는 한 차례 더 춤을 추었다.
그러자 덩어리가 조그맣게 압축되기 시작했다.
집채만 하던 덩어리가 종국에는 작은 구슬 크기까지 작아졌다.
하지만 부피가 줄었다는 게 그 안에 든 힘마저 줄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하게 변질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저도 모르게 내뱉은 로잘리아를 향해 악마가 비열하게 말했다.
“분명 너희들은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겠지. 하지만 영혼 그 자체가 소멸한다면 어떻게 될까? 천국에도 갈 수 없고,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과 기록마저 사라져 그 누구도 거룩한 희생을 기억해주지 못한다면?”
로잘리아가 즉시 반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영혼은 절대 부서지지 않아. 그리고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로잘리아. 악마와 말을 섞지 마세요.”
이네스가 제지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악마가 비웃는듯한 얼굴로 답했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질문이군, 로잘리아 피에람. 영혼이 부서지지 않는다는 건 누가 정한 거지? 기억이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건 또 누가 정한 거지? 힘만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손 위에는 너희 세대 인간들이 저질러온 죄악이 한군데에 뭉쳐 있지.”
감정이란 영혼의 부스러기.
그 부스러기를 전부 그러모아 뭉쳐낸 저 덩어리는, 분명 그 어떤 영혼보다도 강력할 터.
악마가 덩어리를 한 손으로 들며 외쳤다.
“마지막 시련이다! 너희들 중 하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래! 흔적도 없이! 나머지는 돌아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자! 누가 희생할 것인가!”
악마는 주저 없이 덩어리를 던졌다.
덩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불길함이 일행의 등을 타고 흘렀다.
“저, 저건…….”
프리츠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동료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오히려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하지만 저건 다르다.
모두가 느꼈다.
악마의 말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한 소멸.
천국도, 윤회도, 내생도 없다.
모두가 나를 잊는다.
가족도, 동료도, 모든 소중한 사람들도.
내가 어떤 희생을 해도 알아주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며 대륙에 남긴 발자국이 모조리 흩어진다.
“아아…….”
순식간에 공포가 마음을 지배한다.
사람은 수세에 몰리면 본성을 드러내는 법이다.
제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소멸해주기를.
제발 나만 아니기를.
이기심이 깃든 눈으로 동료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유일하게 이성을 붙잡고 있던 이네스만이 상황을 파악하고 외쳤다.
“안 돼요! 우리끼리 싸웠다가는 악마가 결국에는 승리…… 컥!”
푹.
가슴에 단검이 박혔다.
이네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뒤를 쳐다보았다.
프리츠가 울 듯한 얼굴로 단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무리 이네스라 해도 그토록 신뢰하는 가족이 뒤에서 찌르는 것 까지는 반응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
“미, 미안! 미안해 이네스! 하지만 나는 사라지고 싶지 않아! 설령 온 세상이 파괴돼도, 내 영혼만은……!”
이네스는 다른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나바혼이 지팡이를 내리찍자 나무 줄기가 자라나 이네스의 다리를 옭아맸다.
위에는 불덩이가.
좌우에는 신성의 벽이 단단히 세워져 있었다.
동료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악마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하하하! 마지막에는 결국 배신인가. 실로 보잘것없는 우정이구나! 이 절망감! 이 좌절감! 이보다 더한 진미가 또 있을까!”
상처에서 피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역시 프리츠다. 심장을 정확히 찔렀다.
아무리 이네스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다.
놀라움과 슬픔을 느끼던 이네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음을 진정시켰고.
이내 의지를 다잡았다.
이네스가 말했다.
“그게 여러분들의 뜻이라면.”
이네스는 성검을 휘둘러 동료들의 공세를 모조리 뚫어내었다.
동료들은 당황했다.
이네스가 공격해 올 거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이네스는 비척비척 악마에게 다가갔다.
이네스는 성검을 굳게 쥐었다.
아마도 마지막 검격. 이네스 역시 이 검에 모든 걸 담기로 했다.
검을 들어 올렸다.
부드럽게 아래로 내리쳤다.
가장 기초적인 내려 베기.
성검과 덩어리가 부딪혔다.
까가가가각!
그 단단하던 성검에 금이 갔다.
“그래. 수천 년이나 번거롭게 했던 성검아. 너도 이제 수명을 다했…….”
미소 짓던 악마의 표정이 굳었다.
그대로 이네스는 덩어리와 함께 소멸해 버릴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이네스의 몸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네스는 멈추지 않았다.
숭고한 감정과 강하게 빛나는 영혼을 지닌 채, 한 걸음씩 다가왔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로.
악마는 순수한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다가올 수 있는 거지? 이건 인간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격일 텐데.”
“너를 베어야 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힘들어지니까.”
“대체 왜? 저들은 널 배신했다. 그리고 너에 대한 모든 기억들은 소멸하겠지. 네 희생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거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들을 위한다고?”
이네스는 도리어 악마를 비웃어주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은 내가 할 뿐이야. 내 동료들은 잠깐의 두려움에 실수를 한 것뿐이고. 꼬드기지 마. 나를 죽게 만든 건 내 동료들이 아니라, 악마. 바로 너야.”
“정말이지 터무니없군.”
“얕보지 마. 인간의 마음은 네 생각보다 강해.”
몸이 완전히 소멸하는 와중에도 이네스는 끝끝내 악마의 앞에 당도했다.
악마는 멍하니 이네스를 보았다.
너무나 강대한 영혼이 그곳에 있었다.
“이거 원. 웬만한 영혼은 산산이 조각낼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인간이 맞는 건가?”
이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힘을 담아, 성검을 아래로 내리쳤다.
악마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악마의 몸 역시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악마는 사라지는 와중에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저주의 말을 외쳤다.
“좋다! 놀라운 걸 봤다! 실로 만족스러워!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한 건 아쉽지만, 쪼개놓는 데에는 성공했다. 순순히 천국으로 보낼 수는 없지. 너의 영혼은 성검의 파편 속에 갇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대륙의 곳곳에 흩어질지어다!”
악마의 저주대로 쪼개진 성검 속에 이네스의 영혼이 깃들었다.
성검 조각들은 하늘에 날아오르더니, 이내 각각의 목적지로 흩어져 버렸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확인한 악마도 이내 공기 중에 흩어져 버렸다.
“……내가 무슨 짓을.”
프리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아타바도, 로잘리아도, 에릭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침묵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
그렇게 결사대의 활약으로 악마는 토벌되었다.
대륙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하나의 전설이 새로 탄생했으며, 하나의 전설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