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영웅 탄생
교황의 눈가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그 누구보다 악마에 경각심을 가진 세력이 바로 교단이다.
대륙 각지에 속속들이 나타나는 불길한 징조들은 악마의 도래가 머지않았음을 경고했다.
또다시 북해를 건너 악마의 군세가 찾아온다면 대륙은 얼마만큼의 피를 흘려야 할 것인가.
악마는 강하다.
웬만한 인간들은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신은 언제나 지상의 인간들을 위해 계시를 내려 영웅을 지정해주었다.
교단에서는 그런 영웅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악마를 토벌하는 걸 도왔다.
사실, 도왔다기보다는 떠넘겼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사제들도 결국에는 인간.
두려움 그 자체인 대악마를 직접 상대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영웅에 대한 계시가 내려오지 않았다. 악마의 위협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데 말이다.
어떤 이들은 성검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주장했다.
또 어떤 이들은 신이 이미 인간을 버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들은 교황의 신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도 지껄였다.
그런 거대한 압박감 속에서 교황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참으로 필사적이었다.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대륙의 안정을 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생하던 와중.
배교자가 일을 벌였다.
그때는 모든 게 다 끝이라고 자포자기했었다.
하지만 계시가 내려졌다.
그리고 영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진 교단의 유물, 성검을 든 채.
교황은 그간의 설움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양팔을 벌렸다.
“아아…… 정말 잘 오셨습니다! 영웅이시여!”
이안은 슬쩍 몸을 움직여 포옹하려는 교황을 피해냈다.
굳이 이 늙은 사제랑 몸을 비비고 싶지 않았다.
“흠흠.”
민망함에 한차례 헛기침한 교황이 그제야 이안과 제대로 눈을 맞췄다.
이안의 모습에 교황은 조금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왜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게 영웅이라고? 머리랑 눈이 모두 검잖아.”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요 근래 계시가 좀 들쭉날쭉하긴 했잖아.”
“그 계시에 간섭하던 에릭 그린이 죽었잖아.”
“들고 있는 저게 성검이래.”
“진짜 성검 맞아? 너무 투박한데.”
사제들이 웅성거렸다.
이안의 모습은 그들이 원하던 영웅과는 거리가 있었다.
불길한 색의 눈과 머리.
어딘가 삐딱해 보이는 인상.
딱히 귀족이나 특별한 태생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뭐 어떤가.
이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믿든 믿지 않든 이건 성검이 맞고, 나 대신 누가 떠맡아주면 정말 좋겠지만 악마를 상대해야 하는 것도 내가 맞아.”
어느새 총총 다가온 스텔을 사제들에게서 보호하듯이 몸 뒤로 끌어당겼다.
건방진 태도에 고지식한 사제들이 와락 표정을 구겼다.
“증거를 보여라!”
“그래! 증거를 보여!”
“뭔 증거를 대라는 거야. 영웅은 신이 선택하는 거라며. 그걸 알아보지 못하는 당신들이 믿음이 부족한 거 아니야?”
“무, 무슨!”
그 둘 사이에서 곤란해진 건 교황이었다.
그는 영웅이 나타난다면 설령 그게 야만인이라도 두 팔 벌려 환영할 정도로 몰려 있던 사람이다.
교황이 외쳤다.
“진정들 하시오! 성도를 구해낸 은인께 대체 무슨 무례란 말이오! 그리고 새 계시가 내려왔다지 않소! 은의 성녀와 영웅! 무엇이 문제란 말이오!”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성하. 제가 알기로 싸움에는 게르하르트 경도 함께했다고 합니다. 게르하르트 경께서 해놓은 업적에 숟가락만 올렸을지 어떻게 압니까?”
사제의 말에 다른 사제들도 동의를 표했다.
잠시 그들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이안이 손가락을 퉁겼다.
“아. 알았다.”
“……?”
“따지고 보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이단에 넘어갔었던 거잖아. 모가지가 날아갈 거 같으니까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는 거구나. 이번 일을 별거 아닌 사소한 사건으로 남기면, 자기들 목은 안전하니까.”
정곡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제들의 얼굴이 저토록 새빨갛게 달아오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게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이안은 성검을 다시 뽑은 뒤 선언했다.
“과거에 세상을 구했던 에릭 그린은 내가 죽였다. 그가 타락했기 때문이지. 에릭 그린이 왜 타락했냐 묻는다면 그놈은 진정한 영웅이 아니었어.”
“무슨 불경한……!”
“믿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놈은 이 성도를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했어.”
이안은 고개를 돌려 사제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진정한 영웅은 누구냐고 한 명쯤은 물어줄 줄 알았는데.”
“설마 건방지게 그대라고 주장할 셈인가!”
“아니!”
야심 차게 미소지은 이안이 외쳤다.
“진정한 영웅은 오직 하나! 이네스! 이네스 클로딘 님님이다!”
[이안!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이네스가 기겁했지만 이안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과거를 보았다.
어떤 아픔을 겪었고, 어떤 결의를 가지고 악마와 싸웠는지도 보았다.
이안은 이네스를 단순히 신뢰하는 걸 넘어, 동경하게 되었다.
이네스가 그녀가 받아야 할 대우를 받기 원했다.
아마 에릭 그린도 그걸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네스 클로딘 님님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제자! 그런 사람을 의심하다니,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한지는 잘 알겠지?”
“이네스라니! 대체 누구야 그게!”
“클로딘 님? 감히 황가의 성씨를 갖다 붙이는 것이냐!”
“쯧쯧. 친절히 설명해줘도 못 알아듣는 한심한 사람들이네.”
이안은 몸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구경하고 있는 스텔에게 말했다.
“자. 실력 좀 보여줘.”
“……?”
의아해하는 스텔의 시선을 무시하고, 이안은 사제들에게 말했다.
“교단의 방식대로 하자. 신성을 겨뤄서 판단을 내리는 거. 한 명이라도 얘를 신성으로 꺾고서 개소리를 지껄이든 해.”
“이게……!”
발끈한 사제들은 곧바로 이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설령 의식을 진행하느라 힘이 많이 떨어졌다 해도 이쪽의 숫자가 훨씬 많다.
저런 애송이쯤 가뿐하게 찍어누를 것이라 생각했다.
한 사제가 팔을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하! 건방지군! 내가 상대하겠다!”
그 사제가 스텔의 신성에 눌려 기절하기까지는 단 3초도 걸리지 않았다.
***
“정말이지…… 대체 왜 그러셨나요?”
“아까 말했잖아요. 원래 이네스 님이 받아야 할 명예를 되찾고 싶은 것뿐이에요.”
오랜만에 마주한 이네스는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명예나 칭송을 듣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안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저들이 진심으로 저에 대해 감사해할까요? 이번 대 영웅은 망상병이 있다고 험담하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오랜만의 대화인 만큼, 이안과 이네스는 참으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이안의 과거.
이네스와 동료들의 관계.
에릭 그린의 마지막 말.
서로의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얘기들이었다.
그 모든 걸 서로에게 모두 밝힌 지금, 둘의 영혼은 그 이전보다도 더 가깝게 연결되어 가고 있었다.
이안은 자기 과거를 씁쓸하게 얘기했다.
“……그렇게 해서 제가 모든 걸 망치고 말았죠. 지금도 감독님과 동료들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동료한테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더라고요.”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안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이제야 전부 이해되는 느낌이에요.”
“저도요. 이네스 님이 왜 그토록 동료를 들이는 것에 대해 안 좋게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아요.”
잠시 이네스의 눈치를 살피던 이안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진짜로 동료들을 원망하지 않으시나요?”
이네스는 고민없이 답했다.
“예. 그들은 악마에게 잠깐 홀린 것뿐이에요. 만약 제게 악마마저도 단칼에 베어낼 만큼 강한 힘이 있었다면, 동료들이 그런 선택을 내리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애당초 처음부터 제가 희생할 생각이기도 했으니 결과에는 차이가 없는 거잖아요?”
어느새 끓였는지 찻잔을 내밀며 이네스는 맑게 웃었다.
이안도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인간답지 않은 영웅의 성정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이제 이안의 머릿속을 완전히 자기 집처럼 편하게 지내는 이네스를 보며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네스가 이어 말했다.
“이안의 동료에 대한 제 생각도 그대로에요. 이안은 더 강해져야 해요. 어떤 순간에라도 동료들이 신뢰할 수 있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도 최종 보스와 결전을 벌일 때, 이 망겜은 순순히 플레이어에게 승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동료 중 한 명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그 법칙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이안은 미리 영입할 동료까지 생각해 동선을 짰다.
그런 동료 중 누군가 한 명이 죽는다는 걸 알지만, 자기가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을 계기로 이안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떠오르는 건 스텔이다.
그 자그마한 소녀는 모든 힘을 잃었을 때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며 이안을 따라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신성을 되찾아 이안을 지켜주었다.
그런 스텔을 이안이 결정적인 순간, 희생시킬 수 있을까?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이안에게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단 하나.
모든 수를 다 발휘해 강해지고, 악마가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전에 단칼에 베어내는 것.
성공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그 이네스조차 결국 악마에게 고전했지 않나.
게임 속에서도 어떤 꼼수를 발휘해도, 그것만큼은 성공해낼 수 없기도 했고.
하지만 이곳이 게임이 아닌 현실이기에 오히려 가능성은 있었다.
피에람의 긍지. 태양의 활. 모두 원래라면 얻을 수 없었어야 할 보물들이다.
이안의 성장도 가팔라 이제는 활동 폭 자체도 크게 늘어났다.
모두의 앞에서 영웅임을 자칭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코르디스에서 굳이 악마 토벌을 숨긴 건 교단에 크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이안은 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때에 비해 이안은 놀랄 만큼 성장했다.
이제는 오히려 교단에 끌려다니는 게 아닌, 교단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잘 생각했어요. 영웅은 소문을 통해 강해진다는 말도 있으니. 하지만 이안. 그러니 더더욱 제 얘기는 빼는 게…….”
“그건 안 돼요. 영웅 이안은 언제나 이네스 님의 정식 제자. 그 타이틀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이지.”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 이네스가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만큼은 이안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안은 이네스가 더 항의하기 전에 적당히 주제를 돌렸다.
“뭐. 일단 당분간은 성도에서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자고요. 교황 아저씨도 뭔가 준비할 게 바쁜 모양이고.”
“혼란을 수습하지 않으면 교단이 여러 갈래로 분열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안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진짜로 그렇게 됐을 거고요. 정신없이 바쁘겠죠.”
이안이 알 바는 아니다.
애초에 혼란이 이렇게까지 커진 건 교단 윗선의 무능함 때문이었으니.
그렇게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낸 이안은 잠에서 깨어났다.
피로를 생각하면 더 자고 싶었는데 주위가 너무 시끄러웠다.
“얜 잘도 자네.”
옆 침대에서는 이불을 뒤집어쓴 스텔은 소란 속에서도 몸을 웅크려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사제들이 다른 방을 준비해주겠다고 했지만, 스텔 본인이 극구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거 원. 딸이라도 생긴 기분이네.’
늘어지게 하품한 이안은 문을 빼꼼 열었다.
“아……!”
“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마침 문 앞에 있던 사제에게 말을 걸자, 사제가 빠릿빠릿하게 답했다.
“예!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왜 이렇게 시끄럽죠? 뭔 일이라도 났나요?”
“아…… 다름이 아니라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어젯밤 승하하셨거든요. 그것 때문에 장례식이다, 즉위식이다 난리도 아니에요.”
“끙.”
절로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마침내 선대 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하나.
머지않은 시간 내에 대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