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여정의 중간 결산
선대 황제는 원인 모를 병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황태자가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은 사실일 확률이 높다.
황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 황태자는 반대 세력을 하나씩 숙청하며 서서히 권력을 장악해 나갔을 터.
그렇기에 지금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의미하는 건 하나다.
‘황태자가 완전히 제국을 휘어잡았다는 거군.’
적대하는 귀족들과 황실 내 세력들을 모두 찍어 누른 뒤 이어지는 깔끔한 권력 승계.
황태자의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순 나쁜 놈에, 여자나 밝히는 놈이라서 문제지.’
게임에서 황태자는 군사를 일으키며 대륙을 지배할 야망을 불태웠다.
실제로 제국에는 그걸 실현할 힘이 있다.
단지 왕국들과 약소국들도 힘을 합치면 제국도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할 뿐이다.
그에 대비해 황태자는 악마의 힘에 눈을 들였다.
전국에 있는 악마 숭배자들을 불러 모아, 군대를 강화한다.
그에 맞서 플레이어가 연합군과 함께 황태자를 막아 내는 게 ‘크레이 사가’의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다.
‘한 반년간은 황태자도 막 나가기는 힘들겠지.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바뀌면 한동안은 처리할 게 많으니.’
하지만 반년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게임에서라면 황태자가 군사를 일으키는 건 내년이며, 본격적으로 전쟁이 격화되는 건 그 후년이다.
하지만 이미 흐름이 많이 꼬였다.
어떤 식으로 일이 흘러갈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겨울에 굳이 전쟁을 벌이지는 않겠지. 황태자가 미치……. 아니. 가능하려나?’
직접 만나 본 황태자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느긋이 수련이나 할까 생각했더만, 또 여행 계획을 짜야겠네. 여기서 일을 다 마쳐야겠지만.’
“저기…….”
이안이 갑작스레 말없이 생각에 잠기자, 앞에 있던 사제가 당황했다.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난 이안이 말했다.
“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유독 시끄럽더니,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네. 황제의 장례식이나 즉위식이나 저희가 준비할 게 많거든요. 아마 교황 성하께서 직접 가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네. 그럼.”
다시 문을 닫으려는 이안을 사제가 급히 막아섰다.
“아! 이안과 스텔 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이렇게 될 줄 믿고 있었지만요!”
“……혹시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너무해요! 저 기억 안 나세요?”
이안은 그제야 사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직 젖살이 남아 있어 앳된 구석이 있지만, 꽤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기억에 남아 있는 얼굴은 아니다.
‘아니지. 이 목소리. 왠지 낯이 익은데. 그러고 보니 체형도 좀…….’
그제야 이안은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챘다.
“아, 그 복면……?”
“맞아요! 이제야 알아봐 주시다니, 정말이지. 메리라고 합니다.”
“아니. 보통 복면을 쓰고 있으면 못 알아보지. 어쨌든 지금이 훨씬 보기 좋네. 우중충한 복면 뒤집어쓰고 있는 거보다는.”
“그런가요? 헤헤.”
메리가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왜 찾아온 거야?”
“아. 건강하신지 보려고요. 겸사겸사 아부도 하고요.”
“아부?”
“이제 곧 대륙의 영웅이 되실 분인데 당연히 잘 보여야죠! 모쪼록, 저희 종파가 도움을 드렸다는 것! 잊지 말아 주시길! 아! 스텔 님도 일어나셨군요!”
어느새 스텔의 이안의 뒤쪽에 다가와 메리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불만이 담긴 시선이었다.
“제, 제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
“……시끄러워.”
“네?”
쿵.
스텔은 그대로 문을 닫아 버린 뒤,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대화 소리에 깨서 기분이 나빴던 건가? 별일이네. 자기 생각도 솔직히 표현하고.’
이번 일로 스텔도 여러모로 바뀐 걸 것이다. 분명.
이안이 물었다.
“안 자? 다시 자도 되는데. 깨워서 미안.”
스텔은 붕붕 고개를 저었다.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거면 메리와 좀 더 대화를 나누어도 좋았을 텐데.
‘뭐. 스텔에게도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스텔.”
이안은 스텔과 눈을 맞췄다.
어제나 무기질적이고 공허하던 눈동자에도 희미한 빛이 엿보였다.
물론 그 영혼 역시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은 말했다.
“말해 둘 게 있어.”
이안은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텔에게 일부러 접근했다는 걸 인정했으며, 앞으로 자기가 무엇을 할지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스텔이 그 여정에 함께해 줬으면 좋겠다고 솔직히 말했다.
악마 토벌을 위한 결사대.
그게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이안은 이제 알았다.
그렇기에 앞으로 함께할 동료에게는 숨기거나 속이는 것 없이, 모든 걸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여겼다.
“나와 함께 해 주겠어?”
왠지 로맨틱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무게는 가볍지 않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이안은 내심 긴장했다.
만약 스텔이 거절한다면 큰일이다.
‘아니. 스텔 정도 신성이면 교단에서도 한자리해 먹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텐데, 굳이 개고생을 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성도에서 좀 멀리까지 데려가고 말하는 건데!’
결심을 세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후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텔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눈을 한두 차례 깜빡인 뒤, 조그맣게 말했다.
“……응.”
너무나 간단한 수긍.
맥이 빠진 이안이 되물었다.
“진짜로? 엄청 위험하고 힘들 텐데?”
“상관없어.”
시원스러운 대답에 이안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스텔의 입가도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언뜻 알아차리기 힘든 변화지만 이안은 안다.
그게 스텔의 미소라는 걸.
“후. 좋아. 이제 뭐가 좀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네.”
목을 뚜둑―하고 푼 이안이 가볍게 말했다.
“그러면 이제 영웅으로서의 업무를 좀 보낼까?”
***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의 목소리’의 총책임자를 맡고 있는 아비게일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소개한 이는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낀 중년 여성이었다.
움푹 팬 눈두덩과 날카로운 눈빛은 성직자라기보다는 노련한 비서나 변호인에 더 가까운 인상을 풍기게 했다.
“제 얼굴이 무언가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피로가 누적됐던지라.”
“이해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우선 교단의 모두를 대신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아비게일은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한 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다시 앉았다.
“우선 저희들 신의 목소리가 어떤 곳인지 들어 보셨습니까?”
“이름 정도는 들어 봤습니다.”
“그렇군요. 쉽게 말하면 교단 내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기관입니다. 소문을 수집하고 진위를 판별해, 유용한 정보로써 가공하는 게 저희의 일이죠. 업무의 특성상 누군가를 심문하는 일도 많으니, 혹여라도 제 어조가 불쾌하게 느껴지신다면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교단의 정보기관.
신의 목소리는 당연히 교단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힘을 가진 세력이었다.
게다가 여러모로 악평도 자자한 곳이다.
이네스는 설명했다.
[특히나 이단과 악마 숭배자들에 대한 정보에 민감한 곳이에요. 단순히 심문이라고는 했지만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요. 고문이라거나 약이라거나……. 때로는 이단심문관들보다 더 두려움 받는 단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일까?
아비게일의 눈에서 발하는 저 날카로운 빛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딱히 잘못해서 이곳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위축되었다.
“제가 하려는 일은 이안 님의 소문을 적절히 가공하고 각색해, 대륙에 퍼트리는 겁니다. 영웅이란 스스로 뛰어나기에 영웅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에 영웅이기도 하니까요.”
고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영웅으로서는 실격이라는 걸까?
하지만 아비게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안경을 추켜올리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저희의 손을 거치면 문제 될 게 전혀 없습니다. 저희가 소문을 어떻게 퍼트리냐에 따라 명망 높던 귀족도 버러지 같은 작자로. 답 없는 망나니도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뭔가 무서운데. 그보다 멕이는 거 맞죠?’
이안은 아비게일의 서슬에 조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런 위압감 역시 아비게일의 의도일 것이다.
적절하게 상대를 압박하고 은근슬쩍 기분을 건드려 여유를 잃게 한다.
그리하면 단단하던 마음의 방벽도 조금씩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과연 대륙을 아우르는 정보기관의 장을 맡고 있는 여인다운 노련함이다.
물론, 지금 이안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심문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이 정도는 직업병이라 봐야겠지.’
아비게일이 말했다.
“무릇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서려면 좋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힘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죠. 그러니 이안 님께서는 저에게 모든 걸 솔직히 얘기해 주셔야 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아시겠나요?”
“예. 걱정 마세요. 웬만한 건 다 말씀드릴 테니.”
“그럼 우선 기본적인 것부터 짚고 넘어가죠. 이름은 이안. 성은 없음. 맞나요?”
“성은……. 뭐. 이곳에서는 그렇죠.”
“이곳에서는요?”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국 성을 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비게일이 미간을 좁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부 솔직하게 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옙.”
“그럼 시작하죠. 우선 어린 시절 얘기를 좀 해 주시겠어요?”
“고아로 태어나 이곳저곳에서 굴렀죠. 그러다가 우연히 이네스 님을 만나 검을 배웠고요.”
미리 준비해 둔 거짓말이었다.
당장 이네스가 어떤 사람인지 목 아프게 외쳐 봤자 믿어 줄 리가 없었다.
일단은 어렸을 때 우연히 만났던 스승이라는 것으로 해 두었다.
아비게일은 두꺼운 수첩을 꺼내 이안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다.
“좋아요. 이네스 클로딘이라 자칭하는 사람 밑에서 검을 수련했다 이거군요? 요즘 시대에도 황족을 사칭하는 괴짜가 있다니, 다른 의미로는 놀랍네요.”
“사칭이라. 일단은 그런 거로 하죠.”
“끄응. 좀 더 진지하게 임해 주지 않으실래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지금 굉장히 진지합니다.”
이안이 한마디도 지지 않자 아비게일은 신경질적으로 펜으로 머리를 긁었다.
“좋아요. 불우한 과거를 지닌 영웅은 언제나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법이죠. 그 이후에 행적에 대해서도 쭉 말씀해 주세요.”
“예. 일단 마을에 칼날 형제들이라는 조직에 잠시 붙잡혔었는데, 깔끔히 복수해 줬습니다. 그게 벌써 2년 전 일이네요.”
“어린 나이에 악의 조직을 박살 내는 영웅이라. 상당히 괜찮군요. 그리고요?”
“코르디스에 갔죠. 엄청 높은 성적으로 어퍼 클래스에 입학했어요.”
“오. 그건 좋네요. 언제나 사람들은 높은 학벌을 동경하는 법이죠. 게다가 평민 출신이 그런 귀족 학교에……. 잠시만. 코르디스? 그것도 평민이 어퍼클래스?”
아비게일이 멈칫했다.
분명 이런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다.
굉장히 흥미롭게 여겼던 사건인데…….
아비게일이 기억을 더듬는 와중에도 이안은 계속 말했다.
“그때 하필 코르디스에 악마가 강림하더라고요. 이야. 큰일이었죠. 그때 레아와 플로라,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 다 같이 악마를 막아 냈죠. 성검이 큰 힘을 발휘했어요.”
“잠깐잠깐잠깐! 그러고 보니 악마를 상대한 사내의 이름도 이안이었는데…….”
혼자서 정보를 취합하던 아비게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설마 죽었다고 여겼던 그 사람이?”
“예. 제가 맞습니다.”
아비게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요. 평민에 검은 머리, 검은 눈. 게다가 뛰어난 검술. 그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 흔하지 않을 텐데,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요.”
“사람은 한 가지에 집중하면, 주변 것들은 쉽게 놓쳐 버리니까요. 그럴 수 있죠.”
마른침을 삼킨 아비게일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더더욱 공손해진 태도로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들을 얘기가 아주 많을 것 같군요.”
아비게일의 두 눈동자는 이안에 대한 경외와 희열로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