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여정의 중간결산(2)
“그래요. 피에람 님과 황녀 저하께서 함께하셨군요. 그곳에서 악마가 강림할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아차리셨죠?”
“굳이 말하자면 감이죠. 머릿속에 번뜩였다 해야 하나.”
“신께서 알려 주셨나봅니다.”
아비게일은 분주히 펜을 놀려 빠르게 적어 내려가면서도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굳이 죽은 척하신 이유는요?”
“아무래도 교단에 잡히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요. 제 머리카락 색과 눈 색 때문에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고요.”
“확실히. 일리는 있군요.”
“그러니 제가 죽었다고 증언한 레아 님과 플로라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 부분은 확실히 해야 했다.
이안 때문에 괜히 그들에게 피해가 가면 그것만큼 미안한 일도 없으니까.
아비게일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도 딱히 추궁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두 분은 쉽게 건드릴 수 없기도 하고요. 어쨌든 친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거짓말은 했다라…… 좋아요. 훌륭한 우정이에요. 인망이 높은 것도 영웅에게는 필수 덕목이지요.”
아비게일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코르디스에서의 악마를 저지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업적이다.
벌써 수첩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아비게일은 즐거운 듯이 자기 생각을 늘어놓았다.
“이미 한 번 죽었다 여겨졌다는 걸 이용하죠. 죽음에서 돌아온 불사신. 어때요?”
“뭐. 알아서 잘해 주세요. 전 그쪽으로는 잘 몰라서요.”
“좋아요. 이안 님의 협조에 감사드리며, 저는 이만 어서 일을 보러…….”
어서 빨리 작업에 착수하고 싶어 몸이 달아올랐는지, 서둘러 일어서는 아비게일을 이안이 붙잡았다.
“어디 가세요.”
“예?”
“제 얘기는 아직 안 끝났는데요?”
아비게일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악마를 한 번 막았으면 됐지, 또 다른 일이 있었다고?
그런 아비게일에게 이안이 차례로 자기가 겪은 일을 설명했고, 아비게일은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네. 네. 그렇군요. 아. 코헨. 분명 작년 여름쯤에 시청이 붕괴해서 난리였죠. 네? 그게 이안 님이 벌인 짓이라고요? 확실히 검을 잘 쓰는 검은 머리에 대한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시청 아래에 멸망한 고대 제국의 유적이 있었다고요? 그 활은 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유물이고요?”
아비게일의 눈동자가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직업병인지, 손만은 계속 움직이며 기록을 하고 있었다.
“좋아요. 이건 또 엄청난 얘기네요. 확실히 대단하군요. 예? 또 있다고요? 대칸의 시련? 하늘을 나는 괴조? 대초원의 부족과 성소? 마녀들의 어머니? 아니 아니 아니. 대체 이안 님께서는 얼마나 분주히 돌아다니신 겁니까.”
이안은 그 이후에 초원에서 성도로 가는 길에서 겪었던 일들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다리 위에서 벌였던 이단과 천사, 게르하르트와 병사들, 그리고 오우거의 삼파전이나 성도에서 벌어졌던 에릭 그린의 음모까지.
말할 수 있는 건 거진 다 말했다 볼 수 있다.
이안의 얘기를 모두 들은 아비게일이 침음을 흘렸다.
“끄응.”
“왜 그러시죠? 아직 부족한가요?”
“그 반댑니다! 남들은 평생에 걸쳐도 겪어 보지 못할 모험을 대체 얼마나 해낸 겁니까!”
아비게일은 단정히 묶어 놓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 트렷다.
“다른 영웅들은 대부분 업적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야기를 부풀리거나, 아예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이안 님은…… 오히려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요?”
“보이십니까?”
아비게일은 자기 수첩을 이안에게 촤르륵 펼쳐 보였다.
수첩의 절반가량이 딱딱한 필체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모든 일을 혼자서 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 그렇구나, 하고 믿겠습니까? 아니면 교단에서 허풍을 부렸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음.”
업적이 너무 많아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얘기였다.
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뭐, 이미 해 버린 건 어쩔 수 없죠. 전부 사실이기도 하고요.”
“압니다. 저도 각지에서 들어오는 소문 정도는 다 파악하고 있으니. 그게 설마 한 사람이 벌인 짓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어쨌든. 이 일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안 님이 명성이 쌓이고, 하나씩 퍼트리는 것으로 하죠.”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역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제일이었다.
아비게일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어서 결사대의 동료들을 모아 주십시오. 결사대는 언제나 다섯 명인 게 규칙이니까요. 대충 생각해 두신 인물은 있으신가요? 없으면 교단에서 물색해 드리겠습니다.”
“있어요. 다섯 명 다.”
“호오.”
아비게일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흥미를 보였다.
“누군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일단 스텔은 확정이에요. 함께해 준다네요. 고맙게도.”
“아. 스텔 님이라면 분명 부족함이 없죠. 신성도 뛰어나시고, 외모도 출중하시고. 사람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아요.”
“나머지는 아직 확정이 아니라서요. 성도를 떠나면 설득하러 갈 생각이에요.”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일단 결사대에 함께한다고 미리 소문을 퍼뜨린 뒤, 뒤늦게 들어오라고 통보해도 문제없을 겁니다. 특히 귀족이라면 질질 짜면서도 승낙하겠죠.”
결사대는 대륙을 악마에게서 구해 내는 명예롭고 숭고한 이들.
그런 결사대의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평생을 넘어, 역사서에도 겁쟁이 가문이라는 오명이 남을 것이다.
귀족이라면 아무리 싫어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비게일의 섬뜩한 말에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 하고 싶지는 않네요. 한번 잘 설득해보겠습니다.”
“영웅님께서 그리 말하신다면야. 저희는 기다릴 뿐입니다. 하지만 모쪼록, 결사대에 걸맞은 인물을 맞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뒤가 구린 인물을 동료로 들이면……. 세탁하느라 고생하는 건 저희 몫이니까요.”
“뭐.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신분 하나는 확실한 친구들이니까.”
***
이안이 나가자 스텔이 들어왔다.
아비게일은 이 무표정한 소녀에게 이안과 마찬가지로 기선 제압을 시도했다.
“그러니 심문은 제 직업병과도 같으니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랍니다. 스텔 님.”
“…….”
스텔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비게일이 무슨 말을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듣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아비게일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어. 대단한 포커페이스다.’
여태껏 수많은 사람을 심문해 왔다.
나름 감정을 잘 숨긴다 하는 사람들도 결국 눈에는 생각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비게일은 스텔에게서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처음 느껴 보는 당혹감이었다.
“그, 그럼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스텔은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말해, 귀찮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문을 열고 나가고 싶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오기 전, 이안이 어깨를 두드리며 ‘성실히 답해라.’라고 말한 게 기억났다.
그러면 따르는 수밖에.
아비게일을 만나고 처음으로 스텔의 입이 열렸다.
“아침을 먹어.”
“예?”
“예배를 올린 뒤 성서를 읽어. 그다음에 잠에 들어.”
“어, 음. 스텔 님. 무언가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 같군요. 저는 스텔 님의 일과를, 아니. 정말 일과가 저것뿐인 게 맞긴 한가요? 어쨌든 제가 듣고 9살 때는 뭘 했고, 15살 때는 어디에서 일했고 이런 얘기를 듣고 싶은 겁니다.”
스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비게일의 말이 잘 이해가 안 됐다.
그도 그럴 게, 그녀가 말한 일과를 십수 년 동안 반복한 게 그녀의 인생인데.
그런 스텔의 반응을 읽었는지, 아비게일이 눈을 부릅떴다.
눈가에서 돋보기안경이 조금 흘러내렸다.
“그게 답니까? 정말로?”
“……응.”
“그래도 뭔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을 것 아닌가요!”
스텔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기억에 남는 일이 그녀의 인생에 있을 리가…… 아. 딱 하나 있었다.
스텔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이안을 만났어.”
“……그게 끝?”
“……?”
스텔이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뭐가 더 필요하냐고 묻는 듯한 동작에 아비게일은 이마를 짚었다.
그녀 인생 최대의 난적을 지금 만나 버리고 말았다.
***
교황은 사람을 보내, 이안에게 한동안 더 성도에 머물라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준비할 게 생각보다 더 많은 모양이었다.
이 여유 시간을 이용해 이안은 새 능력을 수련했다.
‘천둥 거인의 포효’
천둥 부족 거인들의 목소리에는 영혼을 뒤흔드는 힘이 있다.
그 거인의 발성을 흉내 내는 게 바로 ‘천둥 거인의 포효’지만…….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았다.
[온몸을 다해 말한다는 느낌이 들어야 해요. 발끝부터 시작한 힘이 머리끝까지 전달되게. 이안도 이미 깨달은 감각이죠?]
‘예. 근데 고함을 지를 때는 어찌어찌하겠는데…….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하라니까 영 감이 안 잡히네요.’
수련 첫날.
이네스는 앞으로 이안에게 소곤거리듯이 말하라고 지시했다.
자그마한 고함을 질러라.
이 모순적인 말에 통달했을 때, 비로소 천둥 거인의 포효를 습득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거인의 목소리는 영혼을 뒤흔드는 힘이에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죠.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모두의 주목을 살 수도 있고, 대화 상대의 마음을 안정시키거나 신뢰감을 주는 것도 가능해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네스의 말은 유독 신뢰감과 믿음을 주는 감이 있었다.
또한 그녀의 목소리는 위험한 순간, 이안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기도 했다.
이네스의 말마따나 천둥 거인의 포효를 일상에서도 활용한 사례였다.
[특히 이안은 신뢰감을 주기 힘든 외모이기 때문에 열심히 배워야 해요. 검으로 사람들을 굴복하는 것보다는 말로써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게 제일이니까요.]
‘……신랄하시네요.’
하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한숨을 한번 푹 내쉰 이안은 다시 수련에 들어갔다.
[자. 종이를 입에 붙여서 조그맣게 얘기해 보세요. 종이가 떨리지 않을 정도로요. 그렇게 해서 멀리 있는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걸 1차 목표로 하죠.]
‘옙.’
이안은 작은 종이를 입가에 붙인 뒤, 속삭이듯이 말을 내뱉었다.
“아. 아. 아.”
그런 이안을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스텔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아니니까.”
스텔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방금 속삭임에는 특별한 힘 같은 건 실리지 않았다.
‘어렵네.’
다른 무엇보다, 몸을 배배 꼬아 힘을 잔뜩 주었는데, 정작 목소리로 나와야 하는 건 속삭임이라 몸에 힘이 겉도는 느낌이 이상했다.
불완전 연소라 해야 할까.
이네스는 그 속삭임에 모든 힘을 소모해야 한다고 조언을 건넸다.
당연히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렇게 반나절간의 수련을 거친 이안은 침대에 드러누워 괴성을 질렀다.
“끄아아악! 너무 어렵잖아!”
스텔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걱정의 기색이 얼굴에 떠올랐다.
“……어디 아파? 치료해 줄까?”
그 순수한 걱정에 민망해진 이안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아니. 괜찮아. 마음은 고맙다.”
다시 안심한 스텔이 고개를 내렸다. 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잘 안 되네요.’
이네스도 반나절간의 수련에도 아무 진척이 없자,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네요. 저는 1시간 수련하고 깨우친 건데. 왜 안 되는 걸까요?]
‘그건 이네스 님이…… 에휴. 됐습니다.’
[흐음. 제 생각에는 아무 의미 없는 말만 계속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긴 하네요. 좀 더 마음을 담을 만한 대화가…….]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메리가 들어왔다.
“아! 이안 님! 스텔 님! 계셨군요!”
메리의 등장에 이안은 시큰둥하게 쳐다봤고 스텔은 왜인지 눈매를 좁혔다.
이 냉정한 반응에 잠시 멈칫한 메리가 다시 활기차게 말했다.
“저녁 메뉴를 물어보러 왔습니다!”
“굳이?”
“주방장님께서 영웅께 최고의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런 거라면…….”
그때. 이네스가 이안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이안. 이안은 싫어하는 음식이 있나요? 이것만은 먹기 싫다거나.]
‘음. 민물고기로 만든 음식은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죠. 특히 탕이나 찜 종류는 입에도 못 대고요.’
[좋네요. 민물고기 탕과 찜, 볶음요리로 차려 달라고 부탁하세요.]
‘예?’
[어서요!]
이네스의 박력에 이안은 시키는 대로 메리에게 부탁했다.
작은 종이에 이안이 말한 내용을 적은 메리가 미묘한 얼굴로 말했다.
“으엑. 민물고기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그것만 주문하시고……. 어쨌든! 주방장님께는 잘 전해 둘게요!”
메리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이네스가 이안에게 말했다.
[자. 이제 메리에게 메뉴를 취소해 달라고 말하죠. 아까 연습한 걸 활용해서요.]
‘예?’
[대신. 실패하면 오늘 나온 저녁은 이안이 전부 먹어야 해요. 알겠어요? 전부요.]
그제야 이네스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놀랄 틈은 없다.
메리는 지금도 시시각각 멀어지고 있다.
성공 확률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실패한다면 그 끔찍한 음식들을 혼자서 다 먹어야 한다.
기회는 단 한 번뿐.
이안은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말했다.
“메리. 돌아와.”
잠깐의 침묵.
멀어져 가던 발자국이 다시 다가오더니 메리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혹시 부르셨나요?”
“좋았어!”
이안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제대로 마음이 실린, 고요한 포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