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30화 (131/222)

130. 선언

수련은 순조로웠다.

이안은 이제 원할 때면 언제라도 천둥 거인의 포효를 활용할 수 있었다.

“이안 님! 이안 님을 뵙고 싶어 하는 고위 사제님들이 찾아왔습니다. 벌써 다섯 번이나 미루셨는데, 이번에는 진짜로…….”

“나중으로 미뤄줘. 지금은 아주 중요한 수련을 하고 있거든.”

“아. 그렇군요. 그럼 그리 전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설득당한 메리가 방문을 열고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끌고 나오겠다 다짐했었는데, 이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설득당해 버렸다.

‘뭐지?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네.’

찝찝한 얼굴로 서 있던 메리는 이내 머리를 붕붕 흔든 뒤, 방에서 멀어졌다.

그 모습을 살핀 이안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이거. 설득할 때 아주 요긴해요. 만약 사기를 친다면 전부 속여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어요.’

[이안.]

‘어디까지나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쨌든 천둥 거인의 포효는 숙달되면 마법조차 물리칠 수 있는 유용한 능력이다.

이안은 다른 수련은 최소한도로 하며, 목소리를 내는 훈련에 집중했다.

그때. 나갔던 메리가 헐레벌떡 다시 돌아왔다. 어지간히 급하게 뛰었는지 땀이 흥건했다.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나중에 만난다…….”

“의식! 의식 준비가 모두 끝났대요!”

***

교단의 수장인 교황이 신에게 선택받은 영웅과 그 동료들을 축복하는 의식.

수백 년 전의 이네스도 강제로 참여했었던 이 행사는 종교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신에게 선택받은 영웅이 반대로 하늘에 대고 자기의 의지를 밝히는 자리기 때문이다.

다만, 성대하게 벌어졌던 역대의 의식과 달리, 이번에는 최소한의 인원들만 참석해 비밀스럽게 행해졌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비게일이 설명했다.

“정세가 좋지 않아요. 왕국들끼리는 전쟁이 한창이고, 제국에서는 황제 폐하께서 서거해 혼란스럽죠. 게다가 황태자는 악마 숭배자들과 함께한다는 의혹이 있어요.”

“그렇군요.”

“……놀라지 않으시군요.”

“딱히요.”

그게 의혹이 아닌 사실임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어쩐지 조금 실망한 표정을 한 아비게일이 다시 안경을 고쳐 올리며 말했다.

“만약 진짜로 황태자가 악마 숭배자와 연관이 있다면, 당연히 이안 님을 좋게 보지는 않을 거예요. 악인은 영웅의 적인 법이니.”

“그래서 이렇게 몰래 하는 건가요?”

“이안 님에 대한 정보는 천천히 하나씩 풀기로 했어요. 이안 님에 대해 특정할 수 없게 교묘하게 이야기를 짜 맞출 거예요. 그러다 나중에 그 모든 게 이안 님의 이야기라는 걸 짠! 하고 밝히는 거죠.”

이안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 황태자를 상대로 이런 전략이 먹혀들까?

시간을 버는 정도로는 몰라도, 결국에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비게일도 그 점을 잘 아는 듯했다.

“표정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네요. 저희도 압니다. 그저 시간 벌이라는 것을. 결국에는 이안 님이 강해지셔야 합니다. 동료를 모으고, 황태자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게 성장하세요. 저희 교단이 이안 님의 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뭐, 저만 믿으세요.”

“…….”

이안의 짧은 한마디에 아비게일이 벙찐 얼굴을 했다.

“왜 그러세요?”

“아. 흠흠. 혹시 며칠 사이에 무언가 변화라도 있었나요? 방금 그 한마디가 너무 믿음직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네요.”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거인의 힘이 목소리에 담긴 모양이다.

이네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충고를 건넸다.

[너무 빠르게 느는 것도 문제군요. 거인의 포효를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주의를 좀 해야 할 필요는 있어요. 특히 이성을 상대로는요.]

‘예? 왜요?’

[영혼을 울리는 힘답게 상대의 마음을…… 아무튼 직접 겪어보면 알 거예요.]

왜인지 설명을 포기하는 이네스.

이안이 되물으려 하던 그때, 교황이 그를 호출했다.

“이쪽으로 서시길.”

“아, 예.”

이안은 성검을 쥐고 교황이 가리킨 곳에 섰다.

그가 선 곳은 성도의 높은 봉우리 중 하나였는데, 교단의 선지자가 처음 계시를 받은 장소였다고 한다.

이안의 옆에 총총 걸어온 스텔이 따라 섰다.

교황이 입을 열었다.

“에…… 또다시 대륙이 위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대행자를 우리에게 보내…….”

지루한 연설이 길어지자 이안은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이네스가 신랄하게 내뱉었다.

[몇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죠. 이런 건 제발 좀 변했으면 좋겠지만요.]

마침내 교황의 연설이 끝났을 때, 이안은 서서 잠들기 직전이었다.

“이안 님.”

“…….”

“이안 님!”

“헙! 안 잤습니다. 좋은 연설이군요.”

“……어서 하늘에 대고 각오를 보여주시지요.”

하늘에 올리는 맹세.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안은 메리를 통해 대본을 전달받았다.

참된 영웅이 할 법한 정석적이고 신심 가득한 내용이었다.

메리는 부탁이니 제발 대본과 비슷한 느낌으로 말해달라 간청했다.

‘하지만 하늘에 맹세하는 자리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는 없겠지.’

이안은 성검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었다.

눈부신 오후 햇살을 반사한 성검이 찬란하게 빛났다.

“신은 들어라!”

이안은 큰소리로 쩌렁쩌렁하게 말했다.

저 높은 하늘까지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도발적인 첫 문장에 교황을 포함한 사제들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하지만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에게 무얼 바라는지,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안은 왜 이 세계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신이라면 알고 있을까?

하지만 그런 건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난 그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겠다! 악마를 베고!”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진 순간부터, 이안의 목표는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반드시 살아남고 말겠다!”

처음부터 변함없었던 각오를, 이안은 다시 한번 입 밖에 내면서 의지를 굳혔다.

어떤 시련이 와도 꼭 살아남는다.

그 대담한 선언에 주위 모두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한바탕 소란이 가시고.

이안과 교황은 대담을 가졌다.

제국에서 벌어지는 혼란 때문에 교황은 급히 제국의 황도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교황은 이안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륙의 운명이 당신께 달렸습니다.”

최근 이안이 보여준 모습 때문에 영 못 미더웠던 모양이다.

교황의 표정은 사뭇 간절했다.

이안은 붙잡힌 손을 슬쩍 빼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해낼 테니까.”

“……믿겠습니다.”

“그보다 도움이 좀 필요해요.”

“무슨 일이든 말만 하십시오.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그 말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이안이 곧바로 요구 사항을 말했다.

“일단 돈이 좀 필요해요. 돈은 좀 넉넉하게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은 품에서 은색 고리 두 개를 꿰놓은 목걸이를 내밀었다.

얼핏 보면 평범한 교단의 상징이었지만 그 안에 깃들은 신성이 심상치 않았다.

“제 신성을 담아 두었습니다. 대륙의 그 어느 예배당을 가든, 이 상징만 보여주면 기꺼이 도움을 드릴 겁니다. 돈이든, 정보든, 인력이든. 전부 다요.”

“오오.”

이안은 작게 감탄했다.

확실히, 무거운 금화를 직접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예배당에 들려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거둬가는 게 더 편했다.

게다가 교단의 정보와 인력을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건 큰 혜택이었다.

뭣하면 상대하기 까다로운 강적을 상대로 사제와 성기사를 우르르 불러다 두들겨 팰 수도 있는 거다.

그렇게 하면 이목을 너무 끌게 되겠지만 말이다.

이안은 상징을 받아들여 품속에 고이 집어넣으며 말했다.

“교단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처음 보이는 이안의 공손한 모습에 교황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허허. 아닙니다. 이 정도 도움은 당연한 거지요. 그렇다면 만족하신 듯하니…….”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교황이 움찔했다.

영웅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신도로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이안의 입가에 걸린 사근사근한 미소를 보니 괜스레 불안해졌다.

교황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무,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무래도 제가 무기는 몰라도, 방어구가 좀 부실한 감이 있지 않습니까?”

“아. 흠흠. 그런 얘기 셨군요. 이안 님께 걸맞는 갑옷을 찾아.”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

“교단의 창고를 열어주십시오. 그 안에 든 보물들을 좀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골라 입겠습니다. 당연히 허락해주실 거죠?”

흠칫한 교황이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다, 당연합니다. 부디 부담 없이 둘러보시길.”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이안은 씨익 웃었다.

허락은 맡았다.

이제부터는 쇼핑 시간이다.

***

역사가 깊은 단체는 으레 보물 창고 하나둘 정도는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교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 대륙을 아우르는 종교 단체답게 교단의 창고에는 참으로 많은 양의 보물과 성유물, 아티팩트 따위가 잠들어 있다.

창고지기는 이안과 스텔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보안 마법들은 모두 꺼두었습니다. 안심하시고 느긋이 둘러보시면 됩니다. 만약 설명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저를 호출해주십시오.”

“예. 천천히 둘러보겠습니다.”

사람 좋게 웃어 보인 창고지기가 뒷걸음질로 총총 물러갔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이안을 불안하게 쳐다보던 교황이 생각났다.

마치 이안이 창고를 싹 다 털어갈까 걱정이라도 하는 듯했다.

‘역시 교황이라도 자기 창고에 있는 물건은 아까운 법이려나요. 무려 대륙을 구할 영웅한테 내어주는 건데.’

[영웅은 엄밀히 말하면 교단 소속이 아니니까요.]

악마를 성공적으로 토벌한 결사대는 보통 제국의 황족이나 귀족이 되거나, 고향 가문으로 되돌아간다.

교단에 몸을 투신하는 이는 극소수.

그 과정에서 교단에서 챙겨온 무구를 순순히 되돌려 주는 경우는 잘 없는 편이다.

감히 대륙을 구한 영웅들에게 무구를 되돌려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말이다.

‘교황은 토벌 이후까지 생각하는 거군요. 제국에 교단의 보물들이 넘어가면 서로 간의 균형이 더 깨지니까요. 어찌 생각하면 참 태평하네요. 대륙이 멸망할 수도 있는 건데.’

[그래서 대놓고 거절은 못 했잖아요. 그리고 지난 역사 동안 성공적으로 악마를 막아왔으니, 이번에도 그리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일 수도 있고요.]

이곳에 있는 동안 계속 황태자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전해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최대한 황태자에 대한 인식을 안 좋게 해, 악마 토벌 이후 이안이 제국에 넘어가는 걸 막는 것이다.

이안이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뭐, 저야 필요한 장비를 챙기면 그만이지만요.’

이안은 걸음을 옮기며 창고 안을 꼼꼼히 살폈다.

교단의 창고답게 특히 스텔이 쓸 만한 물건들이 아주 많았다.

“스텔. 저거 챙겨서 입고 다녀. 가볍고 튼튼해 보이네.”

“응.”

“신성을 더 잘 다루게 하는 상징물? 이것도 챙겨.”

“응.”

“지혜의 성서네. 평소에 이거 들고 다녀.”

“응.”

어느새 스텔의 양손에 물건들이 수북이 쌓였다.

스텔이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은 안 챙겨?”

“응.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거든.”

이안은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짙은 갈색의 망토 하나가 창고 구석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