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31화 (132/222)

131. 피에람

‘수호자의 망토’

과거에 한 기사가 있었다.

기사는 초인의 영역을 목전에 둔 강자였다.

어느 날 악마의 군세가 대륙으로 진군해왔다.

군세의 경로에는 기사의 고향이 있었다.

고향 주민들은 겁에 질려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군세의 행군은 너무나도 빨랐다.

죄 없는 주민들이 악마들의 먹이가 되는 건 이미 정해진 미래와도 같았다.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그때, 기사가 나섰다.

기사는 자기만 믿으라는 말과 함께 갈색 망토를 휘날리며 다리 위에 섰다.

도하를 준비하던 군세는 그런 기사의 무모함을 보며 비웃음을 흘려댔다.

하지만 기사는 의연한 얼굴로 선언했다.

“신께 맹세한다. 나는 지금부터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선언이었다.

악마의 군세는 족히 만을 넘어갔다.

아무리 기사가 강하다 해도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끝끝내 자신의 맹세를 지켜냈다.

다리 위에서 사흘간을 홀로 군세를 막아내,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번 사내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이 전설 같은 사내에게 경의를 담아 ‘수호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

창고지기는 조금 놀란 얼굴로 설명했다.

“와. 설마 이 물건을 선택하실 줄이야. 깜짝 놀랐어요. 겉보기에는 평범한 망토일 뿐인데…….”

“제가 감 하나는 좋거든요.”

“역시! 영웅님은 뭔가 다르다는 거네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이안은 이미 게임에서 창고에 무슨 보물이 있는지 다 확인했을 뿐이다.

창고지기는 조심스럽게 망토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수호자께서는 숨을 거두기 직전, 근처 사제님께 유언을 남겼다고 해요. 교단의 창고에 그저 다른 평범한 물건처럼 진열해달라고. 그러면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말이에요. 결국에는 유언이 이뤄졌네요!”

창고지기는 감격한 얼굴로 망토를 이안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좋은 망토였다.

겉보기에는 꽤 두꺼워 보이는데, 무게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만족스럽게 망토를 쓰다듬었다.

‘수호자의 망토. 타격의 충격을 상당 부분 흘려줄 뿐만 아니라 마법에 뛰어난 저항성을 보이지. 그리고 한 자리에서 계속 싸우면 근력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증가하고 말이야.’

뒤쪽의 옵션은 활용하기 쉽지 않지만, 높은 방어력과 마법 저항성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물건이었다.

이안은 만족했다.

아무리 스텔이 곁에 있다고는 하지만,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은 하나라도 많으면 좋은 법이다.

장비를 모두 챙긴 이안은 잡다한 도구들이나 물약, 혹시 몰라 성수까지 교단에게서 뜯어냈다.

게다가 교단에서는 튼튼한 마차에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과할 정도로 충분히 채워주었다.

평소, 돈에 쪼들리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행 준비는 얼추 끝난 것 같네요.”

“예. 그럼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아비게일은 안경을 고쳐 쓰며 설명했다.

“만약 교단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지역의 예배당에 가 상징을 보여주십시오.”

“예.”

“저희 신의 목소리는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내 대륙의 정세나 정보들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계획의 변동이나, 필요 사항이 있으면 곧바로 알려주십시오.”

“옙.”

“황태자는 저희의 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조사를 끝날 때까지는 부디 은밀히 행동해주십시오.”

“예입.”

이안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강력한 집단을 아군으로 두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여정의 안정성과 편의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다니.

지금까지 한 고생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편의는 이안의 능력이 받쳐주기 때문이었다.

‘만약 실력이 충분하지 못했으면 이리저리 휘둘렸겠죠.’

[꼭두각시가 되었을 수도 있어요.]

아비게일의 설명을 들으며 이안은 마차에 올랐다.

이른 아침.

늦은 봄의 공기가 제법 포근했다.

스텔은 이안이 앉은 마부석의 옆자리에 함께 올랐다.

이안은 물었다.

“뒷자리 보니까 푹신하던데, 거기서 편히 쉬어.”

스텔은 고개를 저어 거부의 표시를 했다.

뭐, 심심한 여정길에 말동무는 언제나 환영이다.

스텔이 좋은 말동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비게일이 슬슬 출발하려는 이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안 님, 무운을 빌겠습니다.”

“예.”

“그리고 이제 슬슬 얘기 좀 해주시죠.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혹시 아직 안 정하신 건 아니겠죠?”

조금 못 미더워하는 아비게일의 시선에 이안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어디로 갈지는 이미 진즉에 정해놨습니다. 만날 사람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곳이 대체 어디입니까.”

“피에람. 피에람 영지로 갑니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아비게일을 향해 이안이 씨익 웃었다.

그 건방지고 허당인 귀족 영애를 볼 생각하니, 벌써부터 유쾌해지는 기분이었다.

***

제국은 넓다.

귀족과 명문가 또한 너무나 많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제국하면 떠오르는 귀족 가문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피에람이라고.

피에람의 역사는 길다.

위대한 마법사였던 피에람의 선조는 전설 속 드래곤의 화신이라고 불리던 자였다.

당시 대륙에는 많은 국가들이 전쟁을 벌이는 혼란기였다.

화염 마법사가 활약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인 셈이었다.

피에람의 선조는 제국의 편에 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제국이 대륙의 패권을 거머쥐는 데 일조했다.

그 당시의 황제는 친히 피에람의 선조에게 땅과 작위를 내주었다.

그 뒤로도 피에람은 뛰어난 마법사들을 꾸준히 배출하며, 점점 그 세력을 불려 나갔다.

특히 로잘리아 피에람이 속해 있던 결사대가 악마를 토벌한 이후, 피에람의 힘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제는 황제조차 쉽게 볼 수 없을 만큼 성장한 피에람은 일개 왕국조차도 가뿐히 넘어서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피에람의 대저택.

그 넓은 홀에서는 조촐한 만찬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촐하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피에람의 기준.

기다란 식탁 위에는 각지에서 공수해온 산해진미가 가득 차 있었다.

식사에 참여하는 인원이 단 세 명이라는 걸 생각하면,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우리 딸. 표정이 왜 그러니. 혹시 너무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 못해서 그런 거니? 뭣하면 아빠가 코르디스에 빨리 개학하라고 압력을 좀 넣을까?”

붉은 머리를 단정히 빗어넘긴 근사한 외모의 중년은 로드릭 피에람.

공작위를 가진 대귀족이자, 현재는 피에람 가문을 이끄는 가주이기도 했다.

“이이가 참. 분명 밤사이에 꿈자리가 나빴던 거예요. 그렇지 플로라?”

말을 받은 건 붉은 머리를 길게 기른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피에람의 먼 방계출신이자, 현 피에람의 안주인이며 스스로도 뛰어난 마법사.

알리사 피에람이다.

알리사의 말에 로드릭이 책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뭣! 그렇다면 이 아빠가 밤에 동화책을 읽어줄까?”

음식을 입에 찔러 넣던 플로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 아니. 어머니 아버지. 제 나이가 몇인데 악몽을 꿨다고 기분이 상해있겠어요. 그리고 학교에 압력 넣지 마세요. 그러면 한 달 동안 아버지랑 말 안 할 거예요.”

플로라의 반격에 로드릭은 의자에 힘없이 쓰러졌다.

“하, 한 달이라니. 하루만 플로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도 이 아빠는 눈물이 줄줄 흐른단다. 아니, 그것보다 그런 나쁜 말은 어디서 배웠니! 예전처럼 아빠라 불러주지도 않고! 코르디스에서 혹시 안 좋은 친구라도 사귄 거니?”

“어머. 여보. 우리 플로라가 예쁘고 능력 있는 건 맞지만, 친구가 생길만한 성격은 아니잖아요? 추종자라면 모를까.”

“흠. 듣고 보니 그렇군. 역시 당신이야.”

“호호.”

알리사의 말이 화살이 되어 플로라의 마음에 푹 박혔다.

플로라를 과보호하는 둘이었지만, 자기 딸한테도 이렇게 신랄하게 굴 때가 있었다.

일부러 자존심 강한 플로라를 도발해, 그 반응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상대로 플로라는 곧장 반발했다.

“누, 누가 친구가 없다는 거예요!”

“오. 그럼 친구가 있다는 거니? 그러면 이참에 얘기 좀 해보렴. 학교 얘기는 아빠한테 죽어도 안 하려고 하잖니.”

“아빠가 귀찮게 구니까 그렇죠. 아니, 아빠래. 아버지!”

“엄마도 궁금하구나. 대체 누가 우리 딸의 성격을 받아주는 걸까? 어서 얘기해보렴.”

“윽.”

플로라가 입을 다물었다.

막상 친구라고 말할 만한 사람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레아?

레아는 악마 강림 이후, 좀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더 사교적으로 다가갔고, 무려 자치회에 들어가 코르디스를 변화시키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레아와는 중요한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다.

바로 이안의 위장 죽음에 대한 것.

하지만 그래도 레아와 친하다고 묻는다면 플로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치, 친구가 맞나?’

이미 고민한 순간 끝이라는 걸 플로라는 깨달았다.

‘이, 일단 황녀 저하는 넘어가자.’

그렇다면 또 누가 있는가.

한때는 그녀를 따라다니던 추종자들이 있었다.

이제는 플로라가 전부 해산시킨 이들을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가끔 인사하는 마법사 학우들?

아니면 플로라를 유독 부담스러워하는 교수님?

모두 아니다.

플로라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로드릭이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단다 플로라. 친구는 천천히 사귀면 되지. 너무 부끄러워할 건 없단다.”

“그래 플로라. 그러니 그렇게 너무 용쓰지 않아도 된단다. 엄마는 다 이해해.”

“아, 아니야!”

플로라는 책상을 탕! 하고 쳤다.

있었다. 단 한 명.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가.

낮은 신분임에도 플로라를 스스럼없이 대해주었던 한 명이.

사실 요즘 들어 기분이 나쁜 것도, 1년 넘게 그에게서 어떤 연락이나 소식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택에 한 번 방문한다고 했으면서.’

짜증과 서운함이 솟구쳐오르는 마음을 플로라는 억지로 억눌렀다.

이러면 마치 자신이 이안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플로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있어요. 하지만 말 못 해요.”

이름을 말한다면 누군지 꼬치꼬치 캐묻겠지.

평민에 검은 머리, 심지어 남자라는 얘기를 듣는다면 로드릭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이 안 간다.

무엇보다 이안은 현재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비밀은 지켜야 했다.

피에람 부부도 더 딸을 놀려먹지 않고 인자하게 말했다.

“……표정을 보니 정말 있는 것 같구나. 소중한 친구가.”

“윽! 별로 소중하진 않거든요.”

“사정이 있는 거겠지. 나중에 엄마한테도 꼭 말해주렴.”

“아빠한테도!”

그렇게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이 무르익어 갔다.

식사가 끝나자 가문의 사용인들이 후식을 내왔다.

로드릭은 와인을 홀짝이며 플로라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플로라, 곧 성인식이구나.”

“……예.”

“몸 관리 잘하렴. 우리 가문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니까.”

“알고 있어요.”

플로라는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에서 말하는 성인식이 평범한 의식이 아니라는 걸 플로라는 잘 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그저 피에람의 적통 후계자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밖에는.

하지만 왜일까.

성인식을 생각하면 불안하게 가슴이 쿵쿵거렸다.

괴로운 일이 일어날 거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플로라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로드릭과 아리사가 딸을 달래주려고 할 때였다.

저택의 집사장이 사진 한 장을 가지고 들어왔다.

“실례지만, 아가씨. 편지가 하나 와 있습니다. 투박한 필체로 코르디스의 전우라고 쓰여 있는데, 아시는 분입니까?”

“어머. 별일이네요. 플로라한테 편지가 다 오고. 플로라, 누구인지 아시…….”

“어서 줘!”

플로라가 자리를 박차고 집사장에게서 편지를 낚아챘다.

아리사는 그런 그녀의 품위 없음을 꾸짖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플로라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기쁨에 물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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